‘쉽지 않겠다’. 그런 생각이 든 건 감독과 인터뷰를 시작한 지 10분도 안 돼서다. 감독 스스로도 밝혔지만 ‘음악 다큐를 빙자’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있었다. 음악 다큐라고 단순히 정의하기엔 심오했다.
‘못 쓰겠다’. 2시간 가까이 쉴 새 없이 이야기한 감독의 말을 글로 풀어 놓고, 어떻게 정리해야 하나를 오랜 시간 고민했다. 이렇게까지 고민에 빠져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그와의 인터뷰는 인상적이었지만 정리하는 게 도무지 쉽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그런 시절이 있다. 그 시기가 지금의 자신을 만든, 자기 인생에 가장 결정적인 해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에 열광하는지도 모른다. 권 감독에게는 1991년이 그러한 해이다.
“저에게 1991년은 이렇게 기억됩니다. 그리고 그 해 우리에게는 이런 ‘큰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와 같은 공간에 있던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요. 혹시 잊고 산 것은 없나요. 그 시절에 무언가 놓고 온 것은 없나요.”
권경원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강기훈 말고 강기타’는 누구보다도 1991년을 뜨겁게 살았던 그 시절 사람들에게 말을 건다. "우리 함께 그 시절을 이야기해 봅시다. ‘강기훈’이라는 인물을 매개로 우리의 1991년이라는 서로 덧써 봅시다"하고.
권경원 감독과의 인터뷰를 1문 1답으로 정리했다. 권 감독은 쉬지 않고 말을 이어갔지만, 독자들이 읽기 편하게 질문, 답 형태로 구분했다.
덧붙여, 현재 다큐멘터리 영화 '강기훈 말고 강기타' 스토리 펀딩이 진행 중이다. 기사에는 실리지 않은 영화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 '강기훈 말고 강기타' 스토리 펀딩 바로 가기
= 원래는 극영화 시나리오였다. 유서가 강기훈 씨가 쓴 게 아니라고 말하는 수사관을 주인공으로 한 블랙코미디였다. 나는 몰랐는데, 실제로 그런 분이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원래는 검찰과 운동권을 모두 풍자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다 자료조사차 강기훈 씨를 만나면서….
▶ 만나면서 음악 다큐로 바뀐 건가.
= 강기훈 씨를 만났을 때는 극영화라고 밝혔고, 그분도 다큐를 찍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다큐로 돌아선 것은 강기훈 씨가 간암 진단을 받은 이후이다. 그를 처음 본 게 2011년 11월이었고, 다음 해 초에 발병했다. 나도 개인적으로 집안에 일이 있던 시기라 시나리오 작업을 할 수 없었다. 간암 진단 받고 2013년에 기타 연주를 한다고 강기훈 씨에게 연락이 왔다. “내가 기타를 치는데 한번 오실래요”하고.
▶ 그때까지는 강기훈 씨가 기타를 칠 줄 안다는 것을 몰랐나 보다.
= 몰랐다. 기타를 친다는 얘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딱히 해드린 것도 없는데, 연락이 온 그 자체로 고마웠다. 10명도 채 안 되는 지인들 불러놓고 저녁 식사와 함께 하는 연주회 자리였는데, 나를 초대한 거다. 그래서 아는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카메라 여러 대로 촬영해서 편집을 해드리려고 했다.
= 프로는 아니지만, 아마추어치고는 잘 친다. 기타를 가르치는 친구에게 보여줬더니, ‘연주에 자기 색을 넣으려 한다. 대단하다’고 했다. 몸이 아프면 말초신경부터 안 움직이니, 코드 집기가 어렵다. 그러니 연주 중간 흐름이 끊기곤 한다. 그래도 계속 이어나가려 한다. 내가 사람에게 감정이 이입돼서 그런가, 그게 더 슬펐다. 선곡부터 시작해서 연주까지, 뭔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 것 같다고 보였다. 그런데 그렇게 의미부여를 하면 강기훈 씨는 “그냥 연주야. 갖다 붙이지마”라고 할 거다.
▶ “그냥 연주야. 갖다 붙이지마”라. 그러고 보니 강기훈 씨를 취재한 후배 기자에게 강 씨가 ‘쿨’한 성격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 평범한, 그러면서도 특별한 가장이다. 배려가 몸에 배인 사람이고. 그 또래에 그런 배려를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을 정도니까. 요즘 말로 하면 ‘츤데레’(상대방에게 애정이 있지만, 겉으로는 쌀쌀맞게 행동하는 성격 유형)이다. 그를 만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쓰는 시놉시스의 강기훈은 소심하고 음험한 인물인데, 내가 미안할 정도로 알지도 못한 채 썼구나. 그래서 접었다. 그냥 강기훈 씨라는 인물 그 자체를 주인공으로 하고 싶었다.
▶ 강기훈 씨가 다큐를 허락하던가.
= “네가 뭘 하든지 알아서 해라. 내가 적극적으로 도와주지는 못한다. 네가 원하는 대로 내 몸이 나가지는 못하겠지만 뭘 해도 너의 작품이니 ‘감 놔라 배 놔라’ 하지는 않겠다”고 했다. 이게 신경 안 쓰겠다는 게 아니다. 너의 작업을 존중한다는 의미이다. 날카롭지만 속이 깊은 사람이다.
= 인간극장 같은 다큐는 아니다. 그런 식으로 다루는 것 자체가 결국 강기훈 씨와는 다른 모습으로 나가게 되고, 또 다른 가해가 된다. 그는 1991년 운동을 할 때도 그랬지만, 삶에 천착한 사람이었다. 세상을 바꾸려는 게 아니라, 일상의 소소한 문제부터 시작해서 하나씩 조금만 바꾸자 했던 그런 사람이다.
생각해봐라. 강기훈 씨는 25년을 넘게 고통받는 삶을 살았다. 본인은 조용하게 있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런 사람에게 다큐를 찍겠다고 하면 협조적일까. 그 고통을 다시 꺼내야 하는데, 그것도 시한부 인생의 사람이. 사람이라면, 아니어야 맞다. 그래서 나는 강기훈이 없어도 강기훈을 보여줄 수 있는 영화를 만들자고 생각했다. 음악이 있고, 남아 있는 사람이 있는 그런 영화를.
▶ 남아 있는 사람?
= 나는 이 다큐가 ‘응답하라 1991’이 됐으면 좋겠다. 91년 그 자리에 있었던 분들에게 묻고 싶다. “지금 어떠세요?” 당시 거리에 대학생만 40~50만 명이 모였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강기훈 씨가 잡혀가는 과정에서 뿔뿔이 흩어졌다. 묻고 싶다. 응답하라고 절실하게 불러보고 싶은 거다. 그때는 분명 더 나아질 거라 생각했던 미래였는데, 왜 지금 이런 현실인지 묻고 싶다. 딱딱하게 말고 다른 방식으로.
▶ 강기훈 씨 사건이 현대사에서 중요한 일인 것은 동의하지만, 91년에 더 의미 부여를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 나는 1991년이라고 하면 헤비메탈 그룹 ‘메탈리카’가 모스크바에 간 게 생각난다. 가장 미국적이면서도 하류문화인 것이 냉전을 다 깨고 군복 입은 소비에트 애들을 헤드뱅잉하게 했다. 이념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은 그 콘서트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리고 터미네이터2, 5월 가판대에서는 윤상과 신승훈의 이별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런 시기였다. 그때 기득권들이 뭘 했는가. 빨갱이 잡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87년 이후 우리 사회는 사회·문화적으로 민주화 혹은 불완전한 민주주의를 보완하려는 움직임이 봇물 터지듯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과정이 91년에서 딱 멈춘다. 그 시발이 3당 합당이었다. 그때 사회는 마치 멈추자고 합의한 것 같다. 더 나가지 말고 요대로 살자. 치사하게 반칙도 하고, 거짓말도 하고, 속여도 가면서 이 정도로 살자. 대충 이 정도면 잘 살 것 같으니.
나는 이런 것들이 서로가 무관한 일이 아니라는 거다. 우리가 그때 뭘 놓고 왔다. 운동권을 살렸어야 한다가 아니라 아주 기본적인 것, 조금이라도 진전된 민주주의 이런 걸 놓고 온 거다.
▶ 영화의 주인공이 어째 강기훈 씨가 아닌 것 같다.
= 강기훈 사건은 무죄를 받음으로써 끝난 게 아니다. 무죄로써 시작한 것이다. 나는 사법부나 국가의 잘잘못을 논단하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게 아니다. 그런 얘기는 검색만 해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나는 '우리는 이 사람이 무죄받기까지 뭘 했나, 뭘 하며 살았나'를 돌아보자고 이야기하고 싶다. 이 사람이 무죄받는 지금은, 기소될 때보다 더 나아졌나, 우린 잘 살고 있나, 이런 거다.
▶ 다큐에 그런 이야기들을 다 담을 수 있나.
= 담고 싶다. 91학번쯤 되면 갖고 있는 죄책감이 있다. 근데 죄책감이라 하고 싶지 않다. 세월호 때도 그랬지만 그때도 가만히 있자는 분위기가 있었고, 지금이 가만히 있었던 결과이다. 용인하고 묵인하고. 그래서 이 다큐가 상호 텍스트가 됐으면 좋겠다.
▶ 상호 텍스트?
= 서로 덧쓰자는 거다. 기록 저장이라 하는데 4.16도 기록저장을 하고. 푸코고 기록을 저장하는 거라고 했다. 91년에 대한 기억을 나누다 보면, 많은 것을 새로 알아낼 수 있을 거다.
스토리펀딩을 진행 중인데, 후원을 하시는 분들이 이런 댓글을 달았다. 자기는 김기설 씨 분신을 목격한 사람인데 트라우마가 남았다고 한다. 어떤 분은 당시 전경이었는데 서울대에서 진압을 했다고 한다. 그분은 전경도 피해자였다고 적었다.
이런 이야기들 하나하나가 소중하다. 지금까지 강기훈 씨의 이야기를 검찰도, 사법부도, 운동권도 전부 일방적으로 했다. 삶의 디테일이 없는 얘기들이다. 근데 그 시대를 살았던 분들이 덧써준다면 이제까지 못했던 삶의 이야기를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게 강기훈 씨의 기타를 핑계로 만들고자 하는 다큐의 진심이다.
= 음악 다큐 맞다. 그런데 강기훈 씨가 비웃었다. “이게 무슨 음악 다큐야? 너 왜 사기 치냐.” 그래도 음악 다큐이다. 분명 어둡고 예전의 고통스런 과정을 꺼내는 얘기이긴 한데, 음악 다큐라고 해야 야들야들해 보이지 않나.(웃음) 영화는 음악에 맞춰 장을 나눴다. 기타를 위한 전주곡, 성당, 아멜리아 유서, 사라방드(금지된 노래) 등.
▶ 강기훈 씨는 좀 어떠한가.
= 강기훈 씨는 재판 과정에서 늘 이 이야기만 했다. "사과하라". 정확한 워딩은 ”이건 내 재판이 아니다. 검찰과 사법부의 잘못을 바로잡는 기회이다”고 이야기했다. 작년에 최종으로 무 죄판결이 나왔는데 그 어느 누구도 책임 있는 사과는 하지 않았다.
그래도 강기훈 씨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이 사람이 억울하다는 걸 아는 사람이 있지 않는가. 다른 조작 사건은 비참해서 못 볼 정도이다. 혹자는 무죄 받으면 보상금이나 배상금 받았겠네 하는데,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세월호도 같은 양상이다. 국가에 의해 삶과 죽음을 유린당했을 때 똑같은 패턴이라는 거다. 누군가 알아준다고 해서 피해가 줄어드는 게 아니니까.
= 찻잔 속 태풍이다. 영화는 생각하는 만큼 만드는 게 아니라 돈이 있는 만큼 만드는 것이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 치고 돈이 많이 든다. 음악 저작권료 문제도 있고, CG를 하고 싶은 게 있다. 이런 게 겹치다 보니 돈이 많이 부족하다. 솔직히 말하면 펀딩은 우리가 이런 일을 하고 있다고 알리기 위한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빨리 돈이 모일지는 몰랐다. 하지만 목표는 1만 명이다. 그저 돈 때문만은 아니다. 그 정도 분들이 관심을 가져줘야, 부족하더라도 상호 텍스트가 된다고 본다. ☞ '강기훈 말고 강기타' 스토리 펀딩 바로 가기
▶ 언제쯤 영화로 만날 수 있을까.
= 80% 촬영했고, 올해 안에 상영하는 게 목표이긴 한데, 개봉은 내년이 될 수도 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하고는 있다.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
☞ 1991년 5월 노태우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한 김기설의 자살 방조와 유서대필 혐의로 검찰이 강기훈을 기소한 사건이다. 강기훈은 징역 3년을 선고 받고 1994년 만기 출소하였다. 대법원은 2015년 5월 재심 상고심에서 무죄로 확정했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며, 직접적인 증거 없이 필적 감정과 정황만으로 기소된 대표적인 인권 침해 사례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