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우리 나이로 94세(1923년생)인 키신저는 현존하는 인물 가운데 국제 관계와 관련해 가장 권위 있는 인물로 여겨진다. 문화별로 다른 역사적 관점, 테러와 같은 폭력적인 갈등, 극단적 이데올로기가 판치는 이 세계에서 공유된 국제 질서를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할 것인지가 이 책의 테마이다. 키신저는 그 해결책을 '힘의 균형'과 '정당성' 위에 세워진 질서에서 찾고자 한다. 현대의 국제 질서를 떠받치는 양대 지주라 할 미국과 중국의 역할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다.
"중국과 미국, 문화도 전제도 다른 이 두 거대한 나라는 둘 다 대내적으로 근본적인 조정 과정을 거치고 있다. 두 나라가 경쟁 관계로 바뀔지,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협력 관계로 바뀔지에 따라 21세기 세계 질서에 대한 중요한 전망이 형성될 것이다."-본문 중에서
키신저는 마치 세상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것처럼 역사의 거대한 지판과 각국의 행위 동기를 검토하고 현재의 각종 국제 현안을 분석하면서 서로 다른 질서관들이 결국 화해 가능한 것인지 그것은 어떤 토대 위에 이루어져야 할지를 고민한다.
역사상 수많은 문명이 등장하여 저마다의 관점에서 세계 질서를 세우고자 했지만 모두 보편적인 동의를 얻지 못했다. 키신저는 이 책에서 역사상 네 개의 거대한 세계 질서, 즉 유럽, 이슬람, 중국, 미국에서 세워진 질서 개념이 존재했음에도 전 세계적 합의를 이끄는 원칙이나 최종 목적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없었기에 세계 질서에 대한 역사적인 개념들이 서로 충돌하고 있다고 말한다.
키신저에 따르면 진정한 의미의 세계 질서는 아직까지는 결코 존재한 적이 없다. 대부분의 역사에서 각 문명은 자신만의 질서관을 가졌다. 각각의 문명은 자신을 세계의 중심으로 간주했고, 자신의 원칙을 보편적인 것으로 여겼다.
가령 유럽에서 로마는 자신이 야만인들에 의해 포위되었다고 상상했다. 로마가 몰락한 이후, 유럽인들은 주권 국가들 간의 균형 개념을 고안했는데, 특히 1648년에 베스트팔렌 평화 조약이 체결된 이래 유럽인들은 처음에는 유럽 대륙 내에서, 그리고는 전 세계에서 국제관계상의 균형을 잡으려고 애써 왔다.
키신저에 따르면 베스트팔렌 원칙만이 거의 유일하게 일반적으로 국제 질서라고 인정할 만한 요소의 토대를 이루기에, 역사상 가장 의미 있고 성공적인 국제 질서로 거듭 언급된다. 19세기 영국 정치가 파머스턴 경은 이 원칙을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다. 이익만이 영원하다."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슬람 국가들은 이슬람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까지 세력을 확대하는 것이 자신들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또 2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중국인들은 '천하'가 중국 황제의 속국이라고 생각했으며, 미국은 스스로가 '언덕 위의 도시'이자 세계의 등불로 여기며 자신들의 가치가 보편적인 타당성을 지닌다고 믿는다. 특히 민주주의 원칙의 보편적 확산에 대한 믿음을 탄생시켰고, 그 확신이 이후 미국의 외교 정책을 주도했다.
이렇듯 서로 다른 사고방식들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발전되어 왔으며, 어떻게 각자의 국가와 지역, 전 세계의 역사를 형성해 왔을까? 그들이 서로 접촉하게 되었을 때 어떤 일이 발생했는가? 그들은 시대에 따라 정당성과 힘의 균형을 어떻게 맞춰 왔을까? 각각의 세계 질서는 지금 어떤 상태에 처해 있고, 국가들 간의 관계를 어떻게 형성해 가고 있는가?
헨리 키신저는 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평생에 걸친 역사 연구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적인 정치가로서의 경험에 의존한다. 이 책에는 역사적 변화가 발생하는 과정, 자신의 시대를 만들어 가는 지도자가 있는가 하면 그렇게 하는 데 실패하는 지도자가 생기는 이유, 국가를 규정하는 이념으로부터 국가가 얼마나 멀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의견에 이르기까지 평생을 정책 입안자이자 외교가로 살아온 그의 역사적 통찰이 가득하다.
세부적으로는 유럽 연합의 형성과 브렉시트의 배경이 되는 문제점들,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테러 문제, 한국전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비롯해 레이건 대통령이 레이캬비크에서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벌인 긴장감 넘친 논쟁, 닉슨 행정부가 베트남전 종전 문제를 놓고 하노이 정권을 상대로 벌인 협상의 진행 과정은 물론, 미중 관계의 미래와 유럽연합에 다가올 변화에 대해 설득력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한편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발생한 충돌이 주는 교훈이나 이란과의 핵 협상에 대한 분석에서부터 아랍의 봄에 대한 서방세계의 반응, 우크라이나 문제로 인해 형성된 러시아와의 긴장관계까지, 우리 시대의 결정적인 사건들에 역사적 분석력을 적용한다.
이 책은 경험에 입각한 이야기와 분석, 위대한 역사적 행위자들의 초상화들로 이루어진, 헨리 키신저만이 쓸 수 있는 대작이다. 책 곳곳에 평생을 정책 입안자이자 외교 전략가로 살아온 그의 역사적 통찰이 가득하다. 키신저의 하버드대 정치학과 논문의 일부를 인용한 책의 결론 마지막의 ‘역사의 의미’에 대한 내용이 의미심장하다.
"젊은 시절에 나는 나 자신이 '역사의 의미'에 대해 공언할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자신만만했다. 이제 나는 역사의 의미는 선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임을 깨달았다. 역사라는 것은 늘 논쟁의 대상이 될 것이고, 모든 세대는 인간의 조건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쟁점들을 직면했는지 여부에 의해 평가받을 것이며, 어떤 결과가 발생할지 알게 되기 전에 그들이 직면한 도전에 대한 결정은 정치인이 내려야 한다는 사실들을 인정하면서 최선을 다해 답해야 할 문제라는 것을 말이다."-결론 중에서
책 속으로
유럽 연합의 형성 과정(브렉시트를 예견하듯 배경을 설명) 유럽은 스스로 세계 탐험을 시작했고, 전 세계에 유럽의 관습과 가치를 퍼뜨렸다. 세기마다 유럽은 내부 구조를 바꾸어 국제 질서의 특징에 대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고안했다. 이제 한 시대의 정점에 이른 지금, 유럽은 그 질서에 참여하기 위해 350여 년 동안 유럽 내 문제를 처리할 때 이용한 정치 기구를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부분적으로 새로 통일된 독일의 충격을 완화시키려는 바람이 작용하여 탄생한 유럽 연합은 2002년에 단일 통화를 도입했고, 2004년에는 공식적인 정치 조직까지 수립했다. 유럽 연합은 평화적인 기구를 통해 차이를 조정하는 완전하고 자유로운 통합 유럽을 선언했다. 유럽 연합은 회원국의 주권과 통화 관리, 국경선 통제와 같은 전통적인 정부 기능을 축소한다. 한편 유럽 정치는 기본적으로 국가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여러 국가에서 유럽 연합의 정책에 대한 반대가 주요한 국내 문제로 대두되었다.
유럽 지도자들은 지금도 국가별 민주 절차에 의해 인정을 받거나 거부를 당하기 때문에 국가에 이익이 되는 정책을 실시하고 싶어 한다. 따라서 유럽의 여러 지역 간에는 대개 경제 문제를 두고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2009년에 시작된 위기에서처럼 유럽 체제는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 점점 더 개입 폭을 넓히는 비상조치 쪽으로 기울어진다. 그러나 대중에게 ‘유럽의 계획’을 위해 희생하겠냐고 물으면 그 의무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런 경우에 지도자들은 국민의 뜻을 무시할 것인지, 유럽 연합의 브뤼셀 본부에 반대하며 국민의 뜻을 따를 것인지 선택에 직면한다. 108-113
이슬람교와 중동순수한 형태의 이슬람교에서 국가는 국제 체계의 출발점이 될 수 없다. 국가는 세속적이어서 정당성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국가는 더 큰 규모의 종교적 독립체로 옮겨 가는 도중에 일종의 일시적인 지위를 얻을 수 있을 뿐이다. 국가에 대한 충성심은 진정한 믿음으로부터의 일탈을 의미하고, 지하드 전사들은 이슬람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세계인 다르 알 하르브를 바꿔 놓아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이 세계 질서 개념의 지도 원리는 안정성이 아니라 순수성이다.142-143
사우디는 미국이 중동에서 철수할 것으로 보이면 중국이나 인도, 심지어는 러시아 같은 다른 외부 열강이 참여하는 지역 질서를 추구할 수도 있다. 따라서 21세기의 첫 20년 동안 중동 지역에 괴로움을 안기고 있는 긴장과 소란, 폭력 사태는 그 지역이 다른 더 큰 세계 질서 개념과 관계를 맺을지, 맺는다면 어떻게 맺을지를 결정하는 경합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내전과 종교 갈등으로 이해해야 한다. 164
아시아의 다양성 '아시아'라는 말은 이질적인 국가들로 이루어진 한 지역이기 때문에 기만적인 일관성을 지닌다. 근대 서양 열강들이 출현하기 전까지 어떤 아시아 언어에도 '아시아'라는 단어는 없었다. 현재 50개국에 가까운 아시아의 주권 국가들 중에서 자신들이 단일한 '대륙'에 살고 있다거나 다른 모든 민족들과의 연대감이 필요한 지역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민족은 하나도 없다. 아시아는 '동양'으로서 '서양'에 대등하게 위치한 적이 결코 없었다. 공통된 종교도 없었고, 서양 기독교처럼 여러 지류로 갈라진 종교조차 없었다.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 모두 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번창한다. 그리고 로마 제국에 대한 기억과 비교할 만한 공통 제국에 대한 기억도 존재하지 않는다. 198
새로운 역할을 찾고 있는 일본은 중국의 성장, 한국의 발전, 그들이 일본 안보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면서 물질적, 심리적 요인들의 균형을 다시 한 번 신중하고 냉정하고 겸손하게 평가할 것이다. 일본은 미국과의 동맹 관계는 물론 광범위한 상호 이익을 충족시키는 데 크게 성공하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지 평가할 것이다. 일본은 미국과의 동맹을 계속 중요시한다, 중국의 등장에 적응한다, 점점 더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띠는 외교 정책에 의존한다, 이 세 가지 폭넓은 선택권의 관점에서 분석을 실시할 것이다. 218
미국과 중국미국과 중국은 세계 질서에서 없어서는 안 될 두 기둥이다. 놀랍게도 두 나라 모두 역사적으로 자신들이 현재 안착한 국제 체계에 대해 양면적인 태도를 보여 주었다. 중국은 21세기 질서의 핵심 국가로서 역할을 해 달라고 요청받은 선례가 없다. 미국 역시 확실하게 다른 모델의 국내 질서를 받아들인 국가지만, 덩치나 영향력, 경제적 성과가 비슷한 국가와 지속적으로 상호 작용을 한 경험이 없다. 양측의 문화적, 정치적 배경은 중요한 부분에서 현저히 다르다. 정책에 대한 미국의 접근 방식은 실리를 중요하게 여기지만, 중국의 접근 방식은 개념을 중요시한다. 미국은 한 번도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는 강력한 국가를 이웃으로 둔 적이 없었다. 반대로 중국은 국경선 주변에 강력한 상대가 없었던 적이 없다. 미국은 모든 문제에는 해결책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모든 해결책은 새로운 문제의 입장권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인들은 당장의 상황에 맞는 결과를 추구하지만, 중국인들은 발전적인 변화에 집중한다. 미국은 실질적으로 "얻을 수 있는" 항목들로 의사 일정을 세우지만, 중국인들은 일반적인 원칙을 찾아낸 뒤 그 원칙들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분석한다. 중국식 사고는 부분적으로 공산주의에 의해 형성되지만, 전통적인 중국식 사고방식 또한 점점 더 많이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 두 사고방식 모두 미국인들에게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익숙하지 않다. 문화도, 전제도 다른 이 두 거대한 사회는 둘다 대내적으로 근본적인 조정 과정을 거치고 있다. 이것이 경쟁 관계로 바뀔지,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협력 관계로 바뀔지에 따라 21세기 세계 질서에 대한 중요한 전망이 형성될 것이다. 257
헨리 키신저 지음/ 이현주 옮김/ 민음사/ 460쪽/ 2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