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그 목마름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 거창한 이념이나 환상, 성공신화에 주눅드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발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진짜 아파하는 삶을 얘기하고 싶었다. 관념의 형상화나 이념적, 문학적 수사는 나의 능력 밖이기도 하지만 맨 얼굴 그대로 드러내놓고 싶었다."
소설 '남자는 바흐를 듣고 여자는 바흐를 느꼈다'는 남자주인공 성빈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삶과 내면을 통해 상대방은 물론이고 자신의 삶에 대해서조차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우리 시대의 근원적 아픔을 그려내는 소설이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출세로 대변되는 인간의 권력의지와 관습처럼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남녀 간의 사랑 행위, 그리고 끊임없이 현실에서 탈출하고 싶은 막연한 꿈들이 소설 제목처럼 비슷한 모습으로 때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펼쳐진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행복을 향한 거대한 욕구를 갖고 있지만 서로 그 목적이 불분명해서 각자 다른 시선과 방향으로 살아가게 되는데, 작가는 주인공 성빈을 통해 그 과정에서 갈등하고 아파할 수밖에 없는 모습을 잘 그려내고 있다.
소설은 크게 두 축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지방대학 사립대학 교수로 있는 주인공 성빈이 몸담고 있는 대학 총장 선거이며, 또 다른 한 축은 성빈이 아내와의 갈등으로 인해 빚어지는 주변 인물들 간의 엇갈린 사랑 이야기다.
성빈은 10년 전 불거진 아내와의 갈등으로 서울의 명문대학 교수 자리를 포기하고 지방대학으로 옮겨 혼자 살고 있는 중이다. 몇 년 전부터 그가 몸담고 있는 대학이 사학 분규에 휩싸이자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평교수들이 조직한 대책위원회 간사와 위원장을 역임하며 사학 분쟁의 중심인물이 되고, 마침내 교수들이 내세운 총장 후보로 사학재단과 결전을 벌여야 하는 상황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총장이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벌이는 대학 구성원들의 권력 다툼은 인간 내면에 자리한 왜곡된 권력욕을 적나라하게 표출시키는데, 작가는 주인공을 비롯한 주변 인물들의 세세한 감정 선까지 그려내고 있다.
또 다른 소설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주인공 성빈과 아내와의 갈등 관계, 그리고 그로부터 빚어지는 주변 인물들 간의 엇갈린 사랑 등은 읽는 재미를 더한다. 가정을 이룬 것만으로 사랑이 완결된 것으로 보는 무심한 주인공 성빈과, 섬세한 감정의 교류를 통해 일상에서 사랑을 공유하고 싶어 하는 성빈의 아내는 결국 서로가 넘을 수 없는 높은 장벽에 가로막히게 되고 이로 인해 두 사람은 또 다른 새로운 사랑을 찾아 나서게 되는데 주인공과 작가가 그려내는 그 주변 인물들의 세세한 심리 묘사가 꽤 흥미롭다. 특히 한때는 젊었으나 지금은 중년이 된 부부와 지금 젊은 연인 관계인 이들의 변화하는 모습은 상황에 따라, 혹은 환경에 따라 어떻게 사람의 감정이 움직이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제목 '남자는 바흐를 듣고 여자는 바흐를 느꼈다'에서도 알 수 있듯 소설 속에서는 바흐 음악을 비롯해 상황에 따라 음악이 자주 등장한다. ‘바흐’는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목적이나 꿈일 수도 있고, 생활 속 아주 사소한 취향이나 관심사일 수도 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과거와 현재의 20대 청춘들은 자신들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현실을 딛고 살아야 하는 기성세대들은 자신들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세대에 관계없이 인간은 누구나 고달픈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막연한 꿈을 꾼다. 그래서 같은 음악을 들으면서도 전혀 다른 반응을 하고, 다른 기억을 갖게 되며, 그럼으로써 갈등하고 방황하고 마침내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작가는 소설 속 음악 이야기를 통해 그 모습을 잘 표현해 내고 있다. 이 작품의 덕목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이 구원의 대상으로 또다시 사랑을 찾아 나선다는 점이다. 그래서 모든 걸 내려놓고 독일 뮌헨 슈바빙 거리의 한 카페에 앉아 있는 주인공의 마지막 모습에서 온기를 느끼는 이유다.
작가 윤병대는 CBS PD로 일해오다 최근 정년한 뒤 이 소설을 첫 작품으로 발표했다. 그는 작가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소회를 밝혔다. "치열했던 방송 생활 30년을 정리하고 먹먹해진 가슴을 안고 훌쩍 먼 길을 떠났다.(…) 젊은 시절부터 해소되지 않은 갈증이 있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그리고 직장생활을 마무리했음에도 결코 해소되지 못한 목마름이 있었다. 어는 순간, 걸어온 삶의 발자취를 뒤돌아보면 아쉬움이 가득한데 더 나은 내일을 기약할 수도 없는 현실이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그 목마름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 거창한 이념이나 환상, 성공신화에 주눅드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발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진짜 아파하는 삶을 얘기하고 싶었다. 관념의 형상화나 이념적, 문학적 수사는 나의 능력 밖이기도 하지만 맨 얼굴 그대로 드러내놓고 싶었다."
책 속으로
그런데 인간은 생존을 뛰어넘는 보다 복합적이고도 다양한 고도의 적응력을 보여준다.(…) 그 중의 하나가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고도의 적응력을 가졌다는 점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서로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 이별하는 게 자연의 이치이다. 그런데 인간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탁월한 적응력을 지녔다. 자신의 본능까지도 필요에 따라 적당히 제어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셈이다.
성빈은 아내로부터 마치 은밀한 제안을 받은 것처럼 느껴졌다. 사랑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남들에게 적당하게 보이면서 잘 살아 보자는 은밀한 거래. 총장 후보가 되는 게 싫었지만 동료교수들과 서로 상처 주지 않고 잘 살아가기 위해 그가 정추위의 제안을 받아들였던 것처럼.
-149쪽
이정인이 "은채랑 잔 건 아니죠?"라고 물었을 때 결코 그런 일이 없다고 말했지만, 그 날 이후 그의 머릿속엔 이정인의 간절한 눈빛이 깊은 잔상으로 남아 있었고, 그 잔상이 사라지지 않는 건 자신이 진실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위선이다. 그건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마저 송두리째 저버리는 일이었다.
-178쪽
"그럼 성교수, 당신은 도대체 뭘 위해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지독하게 싸웠나?"
"글쎄, 난 그냥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던 것뿐이네, 나도 모르게 여기까지 오게 된 거고, 그리고 떠나야 할 때가 돼서 떠나는 거고."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어둠침침한 '희다방'에 흐르는 강물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261쪽
안타까운 마음으로 계속 뒤쫓아 보지만 나비는 아랑곳없이 하늘을 향해 날갯짓을 했다. 한참이나 뛰어가던 그녀에게 갑자기 까마득한 절벽이 펼쳐졌다. 발아래엔 깊고 푸른 강물이 흘렀다. 파란 나비가 그곳에서 날아올랐다. 그녀는 나비처럼 하늘을 향해 몸을 날렸다.
-276쪽
윤병대 지음/생각을담는집/280쪽/13,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