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화 강행 9개월이 지나도록 집필진 46명과 심의진 16명 모두 철저하게 '복면 집필'을 이어가고 있어서다.
실제로 '99% 국민'을 분노하게 만든 나향욱 전 정책기획관의 "민중은 개돼지" 망언은 박근혜정부의 국정교과서 강행과 무관치 않다.
나 전 기획관은 지난 11일 국회에 출석해 "역사교과서 국정화 여론조사를 보니까 처음에 했을 때하고 고시를 하고 났을 때 여론조사 결과가 많이 바뀌는 것을 보고 영화 대사가 갑자기 생각났다"고 밝힌 바 있다.
교과서 국정화는 물론, 누리과정 예산과 이공계 위주 대학 구조조정 같은 핵심 정책을 조율해온 현 정부의 고위관료가 국민들의 반대 여론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져왔는지 드러내는 대목이다.
문제는 국민보다 권력을 좇는 이런 인식이 비단 나 전 기획관 한 명에 그치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사흘전만 해도 자진 사퇴 가능성까지 언급했던 이준식 장관이 나 전 기획관에 대한 파면 요구 이후 태도를 바꾼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장관은 14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지금 현재 추진중인 여러 교육 개혁들을 차질 없이 완수하는 것이 더 책임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며 사퇴를 거부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 장관이 '완수' 의지를 밝힌 국정화 작업은 한 개인을 파면으로 몰아넣은 "민중은 개돼지" 인식의 결정판이라는 데 있다.
"내 의도에 맞춰서 교과서 내용을 담고 그걸 가르쳐야 자기 입맛에 맞는 국민이 생산된다고 보는 발상"이자 "1960~70년대 개발독재 시절 '국민은 권력자가 계도해야 할 대상'이란 인식의 연장선"이란 것이다.
하 교수는 "국민은 정부 입맛에 맞게 붕어빵처럼 착착 구워져 생산되는 그런 대상이 아니다"라며 "정부가 국민의 소리를 듣는 게 민주사회의 기본 원리"라고 강조했다.
'귀족(엘리트)-천민' 구도에 기반을 둔 봉건적 역사 인식이 국정교과서에 대거 반영될 수 있다는 점도 심각한 대목이다.
지난해 10월 국정화 고시 강행 이후 9개월이 지났지만, 교과서 집필에 참여한 46명과 심의를 맡은 16명 모두 '철통 보안'으로 베일에 가려져있는 실정이다. 어떤 역사 인식을 갖고 있는 인사들이, 어떤 기준으로 교과서를 만들고 있는지조차 국민들은 여전히 '깜깜이' 상태다.
실제로 국사편찬위원회는 지난해 11월 집필진을 공모했지만, 지원이 저조해 17명을 선발하는 데 그치면서 두 배에 가까운 30명을 '초빙'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역사학자가 아닌 '기타 전공자'나 적극 참여 의사를 밝혀온 '우편향 인사'들로 집필진을 채웠을 거란 게 학계 안팎의 관측이다.
대표적인 뉴라이트 사학자인 권희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가 당시 자유경제원이 주최한 세미나에서 "자유민주주의를 기본가치로 인정하는 인사들로 집필진을 구성해 교과서를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하일식 교수는 "정부는 11월쯤 집필진과 편찬기준을 공개하겠다지만, 이마저도 책이 배포되는 내년 2월로 미뤄질 것"이라며 "벌써 약속을 어긴 게 몇 번이냐"고 반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