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상선암에서 수행하던 현각스님이 자신의 염불 기도로 지리산에서 죽임을 당했던 빨치산의 영혼을 달래주는 신비로운 체험까지 했다는 이야기를 그곳 스님에게서 전해듣는다. 자기 자신을 버리고 찾는 일상 밖 작은 수행의 공간이 시공의 경계를 넘나드는 깨달음의 장소로 변화한 것이리라. 삼불사에서 저자는 누구나 부처와 같이 될 수 있다는 선종의 가르침을 다시 만나 깨달음을 얻는다. "결국 모든 것은 '저기'가 아닌 '여기', 자신에게 있다."
책은 지리산의 역사가 우리네 삶의 역사임을 자주 상기시킨다. 그 역사에는 특히 지배에 대한 저항, 중심에 대한 변방의 정신이 지리산 속 암자에 서려 있다. 해인사의 말사인 법계사는 고려 말에는 왜군에 의해, 대한제국 시기에는 일본군에 의해 불에 탔다가 중창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천왕봉 부근의 천불암은 동학농민혁명 때 부상병 치료소이자 한국전쟁 중에는 빨치산의 야전병원이었다. 본래 지리산은 왕실과 귀족의 무대가 아니라 지방 호족과 민초의 터전으로 면면히 세월을 이겨내왔다. 산세가 험해 수행을 위한 은둔의 땅이기도 했지만, 민란 세력이나 의병 혹은 화전민이나 유민 들까지 저항과 생존을 위해 굽이굽이 이어진 지리 능선 아래로 모여든 것이다. 그리하여 지리산 암자는 불교적 깨달음의 공간이 되는 동시에 우리의 역사와 문화까지 품는 인문의 산이 된다.
책 속으로
문수대는 50미터가 넘는 아찔한 벼랑 아래에 아늑하게 자리하고 있다. 예부터 육산肉山에는 바위가 있는 곳이, 골산骨山에는 부드러운 흙이 있는 곳이 기운이 모인다고 했다. 문수대는 육산인 지리산의 바위 벼랑 아래 부드러운 대지에 터를 잡았으니 애써 명당이라 말할 필요가 없다. 한두 사람이 머물기에는 물도, 땅도 넉넉하니 예부터 수도하기에 좋았던 것이다. 지금도 화엄사의 스님이 이곳에서 수도 중이다. 이곳에 암자가 처음 들어선 건 1803년경 화엄사의 초운대사에 의해서라고 한다. 그러나 자세한 내력은 알 도리가 없다.
그런데 이 고요한 암자도 지리산의 아픈 역사를 비켜가지는 못했다. 문수대가 역사에 드러난 건 구한말 지리산 일대에서 일어난 항일의병 활동 때문이다. 한때 의병 1,700명을 이끌던 의병장 김동신이 이곳 문수대 일대를 근거지로 활발한 활동을 벌인 것이다.
_불국토 지리산이 감춘 곳, 문수대(141~142쪽)
이 승방에는 구층암을 대표하는 특이한 구조물이 있다. 모과나무 기둥이다. 직접 보고 나면 그 기이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어떠한 인위적인 조작도 없이 살아 있던 모습 그대로의 모과나무를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서까래와 지붕을 얹어 집을 지었다. 나무의 생김새대로 천연덕스러운 기둥을 세운 것은 서산 개심사 종루나 안성 청룡사 대웅전 등 우리 옛 건축에서 종종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기본적인 대패질조차 하지 않고 최소한의 손질도 하지 않은 나무를 그대로 기둥으로 쓴 이 무심의 경지에는 놀랄 수밖에 없다. 죽은 모과나무를 그대로 쓴 목수도 능청스럽지만 그것을 허락한 스님의 안목은 또 얼마나 통 큰가.
_모과나무의 소신공양, 구층암(191~192쪽)
연기암이 자리한 곳은 해발 530고지. 지리산 암자치고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세상으로부터 한참이나 들어온 깊숙한 곳이다. 이곳에 서면 산자락 끝으로 멀리 구례 들판과 그 들판 사이를 굽이치며 흘러가는 유장한 섬진강을 볼 수 있다. 연기암의 건물은 마치 저 멀리 있는 섬진강을 염두에 둔 듯 일제히 강을 향해 서 있다. 산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큰 암자 건물이 다소 생경스럽지만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아득한 풍경은 가히 압권이다. 피안의 세계가 있다면 아마 저런 모습일 거라고 누구든 말할 것이다.
_굽이치는 섬진강을 굽어보는 피안의 땅, 연기암 가는 길(268쪽)
김종길 지음/미래의창/304쪽/1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