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드 문제로 한반도 주변정세의 긴장이 높아지고 있는 요즘, 이 책은 긴장 해결의 실마리와 영감을 준다. 1980년대 SDI(전략방위구상)에 집착하던 레이건과 이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고르바초프가 결국 군축에 이르게 된 과정이 흥미롭다.
냉전 종식에 관해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고르바초프를 내세우며, 그의 '새로운 사고'가 역사를 바꾸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다. 고르바초프에게만 공을 돌릴 수는 없다. 미국 대통령 레이건의 의지와 노력,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9장 고집부리다 발목 잡힌다:레이캬비크 정상회담 284쪽
레이건 행정부의 대소련 정책은 조금씩 변화했다. 레이건 집권 초기에 3,400억 달러이던 전체 국방 예산을 1986년에는 거의 4,500억 달러로 늘리기도 했다. 그러나 레이건 정부는 198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힘으로 소련 체제를 무너뜨릴 의사가 없으며, 그런 목적을 추구하는 집단에 물질적 지원을 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분명히 했다. 또한 소련의 인권 개선을 촉구했지만 그것을 모든 현안의 전제 조건으로 삼지는 않았다.
-앞의 장 299쪽
레이건의 군사 강경정책이 소련의 변화를 불러와 결국 냉전이 종식되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고르바초프의 대미 정책 실무를 책임졌던 도브리닌 소련 국제부장은 "만약 레이건이 강경책을 지속하면서 협상을 거부했다면 고르바초프 역시 소련 내부에서 강경파의 반대에 부딪혔을 것이고, 그 결과로 국내 개혁과 국제적인 개방을 시도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 앞의 장 312쪽
현재 북미관계가 강대강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과거 미소 지도자의 협상 사례는 시사점을 준다.
신간 '협상의 전략'은 협상이 필요한 상황에서 어떻게 임해야 하는지 협상에 대한 큰 그림을 보여준다. 지역분쟁 같은 작은 단위의 협상에서부터 국가 간 혹은 다국가 간 거대한 협상까지, 한반도는 물론 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다양한 협상의 역사를 들려준다. 아울러 그 협상을 이끈 리더들이 위기의 순간 어떤 선택을 했는지 살핌으로써 협상에 임하는 자세와 참된 리더의 역할이 무엇인지 돌아본다.
초국가적 협력을 대표하는 유럽석탄철강공동체, 벼랑 끝에서 핵전쟁을 막은 쿠바 미사일 위기, 용서로 흑백의 화해를 이끌어낸 남아프리카공화국 민주화 협상같이 갈등과 분쟁, 전쟁을 피한 위대한 협상은 물론, 서두르다 망한 예멘의 통일협상과 너무 쉽게 타협해 역사가 복수한 한일협정, 상대를 인정하지 않아 아직도 서로 피를 흘리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카슈미르 분쟁 등과 같은 아직 해결되지 못했거나 더 큰 문제를 불러온 실패한 협상까지 지난 20세기 역사를 이끌며 세계를 바꾼 20가지 협상의 명장면을 펼쳐낸다.
성공하거나 혹은 실패한 세계적 협상에서 협상의 지혜와 성공 노하우, 역사적 교훈과 성찰의 기회를 찾음과 동시에, 화해와 평화, 공존, 협력을 위한 다양한 협상이 어떻게 세계를 움직여왔는지, 역사를 만든 협상의 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인간관계, 사회관계, 국제관계에서 벌어지는 협상의 수준과 방법은 다르지만, 어떤 협상이든 그 주체는 사람이다. 협상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기에 상대와 ‘관계’를 이루어야 하며, 협상에서 성공하려면 이익의 기계적인 배분보다 신뢰를 먼저 쌓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저자 김연철은 말한다.
사람들은 시공간을 초월해서 언제나 통하는 협상의 비법을 찾지만, 그런 것은 세상에 없다. 똑같은 기술이라도 상황에 따라 맞기도 틀리기도 한다. 협상의 기술은 줄타기에서 균형을 잡는 것과 같다. 상대의 의도와 나의 목표 사이에서,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의 사이에서, 상대에 대한 배려와 내편의 지지 사이에서 균형을 잃지 말아야 한다. 때를 아는 것이 협상의 유일한 기술이다. 서두르지 않되 기회를 잡아야 하고, 정확해야 하지만 얼버무려야 할 때가 있다. 또한 양보할 때와 얻어야 할 때를 적절히 판단해야 한다. 지금 지더라도 나중에 이길 수 있고, 이번에 양보하면 나중에 얻을 수 있다
―책을 펴내며 ‘이제는 협상의 시대다’ 중에서(7~8쪽)
협상의 성공과 실패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협상을 이끈 지도자의 리더십 또한 그 성패에 큰 영향을 미친다. 성공한 협상에는 반드시 협상을 성공으로 이끈 위대한 인물이 있다. ‘위기의 13일’이라고도 불리는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핵전쟁이라는 긴급한 위기 속에서도 열린 토론과 신속한 결정으로 대안을 마련했고, 이는 아직도 외교사의 전설로 남아 있다.
‘유럽 통합의 아버지’라 불리는 장 모네는 전후 유럽 질서의 변화를 예감하며 유럽연합의 출발인 유럽철강공동체를 설계했다. 모네는 그야말로 때를 아는 인물이었다. 또, 오랜 차별과 억압의 시대를 넘어 위대한 화해를 이룬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와 데 클레르크 대통령도 빠트릴 수 없다. 두 사람은 협상의 가장 기본 원칙인 신뢰와 인정을 바탕으로 대타협을 이뤄낼 수 있었다.
물론 준비 없이 서두르거나 리더십의 부재로 실패한 협상도 있다. 캠프데이비드 중동평화협상이 가장 대표적인 예다. 중재자였던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은 너무 서둘렀고, 협상의 당사자인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는 상대를 인정하지도 자신의 이익을 양보하지도 않았다. 고집만 부리다 끝난 이 협상 이후 아직까지도 중동에는 평화가 오지 않았다.
그러나 협상의 성공과 실패를 판단하는 기준은 다를 수 있다. 이 책에서는 ‘겁쟁이가 선택한 협상’으로 낙인찍힌 히틀러와 체임벌린의 뮌헨협상을 첫 번째로 소개하며, 그 의미를 재해석한다. 그동안 역사에서 승자와 패자로 낙인찍힌 리더들의 이야기를 다시 살피며 반전의 재미를 들려준다.
위기 상황에서 지도자의 리더십이 돋보인다. 무능한 지도자는 위기를 만들고, 유능한 지도자는 위기를 해결한다. …… 협상은 전쟁만큼이나 어렵다. 자칫하면 정치적으로 사망할 수도 있다. 또 극도의 불신관계에서는 상대의 약속을 믿기도 어렵다. 그러나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협상이 필요하다. 케네디 대통령의 말처럼 “두려움 때문에 협상을 시작할 필요는 없지만, 협상 자체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2장 ‘벼랑 끝에도 대안은 있다: 쿠바 미사일 위기’ 중에서(52, 71쪽)
베긴은 사다트에게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에서 누가 이기고, 누가 졌는가를 물었다. …… 사다트 역시 누가 얘기할 때 가만히 듣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카터가 끼어들어 분위기를 진정시키려고 했으나, 베긴과 사다트는 …… 상대의 말은 듣지 않은 채 책상을 주먹으로 치고 소리를 질렀다. 카터는 뒷짐을 지고 먼 산을 바라보았다. 예측하지 못한 절망적인 광경이었다. 카터는 논리적으로 접근했지만, 전쟁을 겪었던 양국 대표는 감정적이었다. 증오는 화해보다 쉬웠다.
―12장 ‘양보 없이는 성과도 없다: 캠프데이비드협정’ 중에서(409쪽)
역사는 뮌헨협정이 제2차 세계대전의 포문을 열었다고 평가한다. 윈스턴 처칠은 “체임벌린은 굴욕을 선택했고, 그래서 전쟁이 일어났다”라고 비난했다. …… 왜 사람들은 체임벌린에게 침을 뱉었을까? 처칠의 말대로 굴욕이 아니라 전쟁을 선택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히틀러의 야망을 사전에 차단하고, 야만적인 ‘홀로코스트’를 막을 수 있었을까? …… (체임벌린은) 이런 유언을 남겼다. “뮌헨이 없었다면, 우리는 전쟁에서 졌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제국은 1938년에 파괴되었을 것이다. 나는 결코 역사가의 평가가 두렵지 않다.”
―1장 ‘힘이 없으면 시간이라도 벌어라: 뮌헨협정’ 중에서(26~27쪽)
저자 김연철은 2005년 9월 남북회담의 합의문을 조율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협상에 관한 책을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세계의 협상을 돌아보며 한국 사회의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이 책에서는 한반도에서 이루어진 협상 가운데 한국전쟁 휴전협상과 한일협정을 다룬다. 이 두 협상은 오늘날까지 한국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거대한 증오의 진원지라 할 수 있다. 총을 내려놓지 않고 서로에 대한 적개심을 가득 품은 채 협상에 임했던 한국전쟁 휴전협상은 결국 분단을 초래했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신뢰하지 않은 결과였다. 눈앞의 이익만 좇은 한일협정은 역사 청산이라는 중대한 과제를 후대의 몫으로 남겼다. 이와 비슷하게 에스파냐에서도 독재 시절의 모든 불의를 덮고서 나아가자는 망각협정이 이루어졌지만, 2000년 이후 기억은 다시 살아나 역사 청산의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기억은 협상의 대상이 아님을 보여주는 분명한 사례다.
한반도의 남북회담은 이 책에서 직접 다루지는 않지만, 통일협상에 나선 다른 나라의 사례를 통해 한반도 문제의 해법을 찾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남북으로 갈라져 있던 예멘에서는 모두가 원해 통일을 했지만, 아무런 준비 없이 서둘러 통일하는 바람에 오히려 통일 이후 정치적 혼란과 경제 위기 등 더욱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다. 이와 반대로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해 통일 국가를 이루었지만 부족 간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분단을 택한 수단과 남수단의 사례도 있다. 또, 전쟁과 대화라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지만 결국 평화로운 분단을 선택해 땅은 물론 기억까지 분단되고 있는 키프로스의 상황은 현재 한반도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이처럼 한반도의 문제를 거울처럼 비추고 있는 세계의 협상들은 오늘날 한반도에 살아가는 우리가 직면한 갈등을 어떻게 해결해나가야 할지 반면교사의 역할을 할 것이다.
반공전선을 위해, 한미일 삼각관계를 위해, 그리고 경제성장을 위해, ‘역사 문제’는 언제나 당대가 아니라 후대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 밀려났다. 어설프게 봉합된 역사는 망언이라는 옷을 입고 역사 인식 문제로, 혹은 독도라는 영토 문제로 불쑥불쑥 고개를 내민다. 2015년 12월 한일 양국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해결’을 선언했다. …… 합의한다고 과연 ‘집단 기억’이 잊힐까? …… 아시아에서는 지금도 과거가 미래의 문을 가로막고 있다. 역사를 바라보는 철학의 빈곤 때문이다. 매듭짓지 못한 역사는 …… 반드시 복수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11장 ‘쉽게 타협하면 역사가 복수한다: 한일협정’ 중에서 (386~387쪽)
왕래가 자유로워지면서 남북 양쪽 통일운동 활동가들의 협력도 …… 발전했다. 그러나 통일에 대한 여론은 여전히 갈라져 있다. 그리고 사회구조가 변하면서 통일에 대한 인식도 달라지고 있다. …… 새로운 세대 또는 국제화 세대는 정치에 관심이 없고, 과거의 증오에 무관심하다. 자연스레 이들은 통일을 바라지 않는다. …… 지금 키프로스는 분단과 통일 사이에서 멈추어 서 있다. ‘해결은 어렵지만, 그렇다고 위험하지도 않은’ 그런 상황, 그래서 절박하게 노력하지 않고, 당연히 비용을 지불할 생각도 없는 어중간한 시간들이 흘러가고 있다. 평화가 지켜진다면, 교류가 이어진다면, 이런 분단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과연 원치 않는 결혼을 강요하는 것보다 차라리 평화로운 이웃으로 사는 게 맞을까? 분단이 길어지면 통일은 참 어렵다. ―15장 ‘의지가 없으면 방법도 없다: 키프로스 통일협상’ 중에서(549쪽)
김연철 지음/휴머니스트/768쪽/3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