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서니 기든스, 유럽의 미래를 진단하다

신간 '유럽의 미래를 말하다: 기든스의 통합유럽 프로젝트'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유럽의 비극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아주 넓은 지역에서 고통 받고 굶주리고 근심하고 당황하는 무수한 사람들이, 폐허가 된 그들의 도시와 고향의 모습에 경악하고 (…) 그러나 처방이 있습니다. 만약 이것을 여러 나라의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지금 즉시 널리 채택한다면, 그 처방은 마치 기적을 일으킨 것처럼 모든 풍경을 바꾸어놓을 것입니다. (…) 이 소란스럽고 강력한 대륙에서 제각각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확장된 애국심과 공통의 시민정신을 부여해줄 유럽 공동체를 구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다른 거대한 집단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지위를 누리면서 인류의 장래 운명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유럽을 일어서게 하라!”
― 1946년 9월, 윈스턴 처칠의 스위스 취리히 대학 연설 중

1946년 윈스턴 처칠이 ‘유럽 합중국’을 제안한 뒤로 70여 년이 흐른 지금, 유럽연합(EU)은 단일 통화 유로, ‘미니 헌법’인 리스본 조약, 유럽 내 국경을 없앤 솅겐 조약, ‘유럽 문화수도’와 ‘유럽 문화도로’ 프로젝트, 학생교환 프로그램인 ‘에라스무스’ 등을 통해 내·외적인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유럽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쟁과 회원국의 자국 이기주의, 유로화 체제의 불안정 등 유럽연합의 존속 자체에 대해 커지는 불신은 유럽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든다. 유럽은 더 이상 ‘강력한’ 대륙으로 보이지 않으며, 유럽 합중국의 꿈은 요원해 보인다. 더 나쁘게는, 유럽 대륙이 다시 한 번 혼란과 갈등의 ‘소란스러운’ 무대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 유럽의 미래는 유럽연합의 성패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현재,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수 있을까?

신간 '유럽의 미래를 말하다: 기든스의 통합유럽 프로젝트'의 저자 앤서니 기든스는 유럽연합이 민주주의와 효과적인 리더십이 동시에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하면서, 유럽연합의 행정을 두 개의 조직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이사회(European Commission), 집행위원회(European Council), 유럽의회(European Parliament)로 이루어진 첫 번째 조직 ‘EU1’은 평상시의 이론적인 업무를 집행한다.

위기 시 실제 업무를 집행하는 두 번째 조직 ‘EU2’는 막강한 실권을 갖고 있고, 선별적이고 비공식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한다. EU2의 멤버는 현재 사실상 유럽연합을 운영하는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 그 외 한두 명의 회원국 지도자, 유럽중앙은행(ECB)과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등인데, 이들은 유럽연합을 지지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국의 이해관계를 우선시한다.

민주적이지 못하고 합법적이지도 못한 이 조직을 내세우면서 시민들에게 “확장된 애국심과 공통의 시민정신”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다. 또한 실행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 없거나 현실화할 수 없는 수많은 미래 전략과 로드맵, 즉 ‘종이 유럽(paper Europe)’은 유럽연합의 내부와 외부에 분명하게 존재하며 이는 유럽연합의 신뢰도를 하락시킨다고 지적한다.

기든스는 현재의 문제점을 타개하려면 이원화된 두 개의 조직, 즉 EU1과 EU2가 더 긴밀하게 통합되어 운영되고, 민주적이고 합법적으로 제도화된 리더십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계획을 수립해서 종이 위의 글자로만 남아 있는 수많은 ‘야심찬 계획’들을 실행해야 한다고 말하며 각 분야의 주요 전략을 제시한다.

기든스가 제시하는 또 하나의 주요 개념은 ‘플러스 주권(sovereignty+, 확대 주권/더 큰 주권)’이다. 세계화와 정보화, 그리고 미국과 중국이 지배하는 ‘G2의 세계’에서 지금처럼 뿔뿔이 흩어져 있다면 개별 국가의 힘은 약해지며 몰수되어 갈 것이며, 따라서 유럽연합 회원국들이 연방제 구조 위에서 강력한 유럽의 연방 주권을 형성해 운명의 공동체를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회원국들이 통합을 통해 국가끼리 힘을 합쳐 영향력을 확대함으로써, 기존의 주권 상실을 만회할 뿐 아니라 주권의 확대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2014년 5월, 유럽 통합에 대한 의견을 묻는 유럽의회 선거가 대륙 전역에서 치러졌다. 유럽연합 찬성론자인 기든스는 2013년 이 책을 출간하면서 유럽의회 선거의 전략도 함께 제시했다. 그러나 선거 결과, 유럽 통합을 반대하는 극우·극좌 정당이 선전했고, 이제 유럽에는 통합을 위한 대대적인 개혁보다 유럽연합 체제 자체를 재검토하자는 목소리가 커질 가능성이 크다. 유럽연합의 가장 두드러진 문제점인 ‘유로화의 위기’을 해결하기 위한 경제구조의 강화를 위한 경제개혁도 무산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기든스는 이러한 분리주의 그룹들의 목소리가 유럽 통합에 영향을 주지는 못할 것으로 전망한다.


기든스는 오늘날 유럽연합이 큰 위기에 봉착한 것은 유로화 체제의 불안정 때문이라고 진단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원인이라고 판단하지는 않는다. 유럽연합은 거의 모든 선진국이 겪고 있는 문제에 직면해 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유로화의 안정 너머 연방제 구조 위에서 더 강력한 ‘통합 유럽’을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막대한 국가 부채와 구제금융 등 유로화 안정을 위한 독일의 구체적인 역할 제시를 비롯해, 유럽식 복지제도의 존속을 위한 방안, 새로운 산업 체계 구상, 자국 기업 국내 유치와 청년 도제 시스템을 통한 실업률 해결, 신재생 에너지를 통한 환경 문제 개선 등 다양한 분야의 문제와 해답을 구체적이고 실천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수많은 위기와 분란 속에서도 변화를 망설이고 개혁을 거부하는 유럽 대륙, ‘운명의 공동체’로서 다시 주도권을 잡을 것인가 ‘종이 유럽’으로 전락할 것인가! '유럽의 미래를 말하다'에 글로벌화와 세계화라는 새로운 세상이 던지는 근본적인 도전을 해결하고 유럽 통합의 새로운 진화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해법을 담았다.

책 속으로

유로화의 시련은 결코 극복되었다고 할 수 없다. 유럽연합이 당면한 문제들은 심각하고 위험하다. 심각하다고 말한 것은 통일된 대륙을 구축하는 사업이 전반적으로 붕괴할 위기에 놓였기 때문이고, 위험하다고 말한 것은 만약 현재 사태가 더욱 악화된다면 그 결과는 대재앙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과거에 전쟁을 일으킨 적대감들이 여전히 주위에서 어른거린다고 주장한다. “악마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잠자고 있을 뿐이다.” (9쪽)

유럽의 연방제는 리더십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오랫동안 방치되어온 민주제의 결핍을 시정해야 한다. 리더십과 합법성은 함께 가는 것이다. 효과적 리더십이 없는 유럽연합의 문제는 얄팍한 민주제의 외양과 관련이 있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유럽연합은 단지 ‘따라잡기’만 할 것이 아니라, 다른 모델들과 마찬가지로 앞서 나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유럽의 정치적 통합은 무엇보다도 유럽연합의 핵심 결핍 사항을 시정하는 것이어야 하지 그것을 증폭시키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리더십과 민주제에 대한 접근은 단지 형식적인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달리 말해서 선출제도만 신경 써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가장 근본적인 목표는 관료제를 축소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49쪽)

높은 실업률을 생각할 때, 유럽연합의 핵심 과제는 순수한 새 일자리의 창출이다. 달리 말해서 특정 시점에 사라지는 일자리보다 더 많은 수의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 현재의 경제적 난관은 구조적인 것이므로 충분한 수의 일자리는 수요를 재창출하고 구매력을 높일 때에만 만들어낼 수 있다. EU2가 주도하는 개입주의는 추가 개혁을 밀어붙여야 하고 투자의 촉진을 도와야 한다. 유럽 차원의 인프라 투자는 성장을 진작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며, 장단기 상승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유럽연합은 이런 투자를 창출하는 정책 수립에 힘써야 하는데, 투자의 대부분은 민간 부문에서 나와야 한다. (83쪽)

2013년 6월에 열린 G8 회의에서 조세 회피와 포탈에 맞서기 위한 10개조 계획이 합의되었다. (…) 각국의 국세청은 정보를 공유하고, 기업들이 이익금을 외국으로 송금하는 규칙을 악용하여 조세를 회피하는 것을 막기 위해 관련 규칙을 개정한다는 것이다. 이 협정은 구체적인 정책 제안이 없어서 부실하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변화의 도도한 흐름에 힘을 보탰다.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구글, 스타벅스 같은 세계적 기업들이 전에 없이 주목을 받았다. 이 기업들은 이익금을 세금이 없거나 아주 낮은 지역으로 빼돌림으로써 그들이 사업하는 나라에는 최소한의 세금만 납부한다. 그들은 법을 위반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방식으로 엄청난 액수의 세금을 회피한 것이다. G8 합의는 이것을 막을 새로운 제도를 마련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다국적 기업이 어떤 나라에서 얼마나 세금을 냈고, 조세 피난처에 어떤 계정을 유지하는지 살펴본 다음 철저하게 과세하겠다는 것이다. (118쪽)

에너지 정책의 올바른 수립은 유럽연합이 현재 당면한 다른 많은 문제들 못지않게 중요하다. 에너지에 대한 집중적 투자가 유럽연합 경제를 되살리기 위한 부양책에서 핵심 부분이 되어야 한다. 현재 다른 어떤 분야보다 에너지 정책 분야에서 ‘종이 유럽’이 만연해 있다. 계획과 실행 사이의 괴리, 특히 탄소 배출권 거래제 부분의 괴리는 유럽의 에너지 미래에 대해 위험스러운 불확실성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자금 지원이 민간 부문에서 나올 것인데, 그들은 상당한 투자를 하기에 앞서 좀 더 투명한 결과를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유럽연합 차원에서 존재하는 전향적 조치들은 실제로 많이 있다. (242~243쪽)

앤서니 기든스 지음/이종인 옮김/책과함께/336쪽/2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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