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돌려 보내는 희한한 일터…관행화된 산재 은폐

[일터 사망, 이것만 없었어도‥④]숨기지만 않았어도…산재사망 줄일 수 있다

컵라면도 못 먹고 일에 쫓겨 혼자 일하다 사고를 당한 김 군, 그런가하면 김 군의 아버지뻘인 건설노동자들은 지하에 가득 찬 가스가 폭발해 목숨을 잃는다. 안전보건공단 통계에 따르면 오늘도 일터에서는 하루에 평균 대여섯명 꼴로 사망사고가 일어난다. 그렇다면 산재사망사고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CBS는 기획시리즈를 통해 5차례에 걸쳐 과거의 산재사망사고를 되짚어보고 그 사고를 촉발한 원인을 찾아본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빨리빨리'만 없었어도…목숨걸고 달렸던 18살 배달알바
② "그게 메탄올이었다고?" 메탄올 실명, 안전교육만 받았어도
③ 장마때면 떠오르는 '그 사고'…노량진 수몰사고의 악몽
④ 돌려보낸 119, 사람잡는 공상처리...숨기지만 않았어도
(계속)

노컷뉴스 자료사진

◇ 동료가 지게차에 치였다. 119 불렀지만...

"단순 찰과상인데 놀라서 신고한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신고를 받고 7분 만에 회사 후문에 도착한 119 구급차를 팀장 A씨는 다시 돌려보냈다. 구급차가 떠난 현장에는 34살 B씨가 피를 흘리며 누워 있었다. 의식은 있었지만 단순 찰과상은 분명히 아니었다.

2015년 7월 29일 오후 2시. 청주의 한 화장품 제조공장에서 자재관리를 하는 B씨는 시속 14㎞로 달려온 지게차에 치였다. 지게차에는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물건이 쌓여 있었고, 지게차 운전자 C씨는 B씨가 치인 줄도 몰랐다. 5m를 더 달린 뒤에야 차는 멈춰섰다.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 나온 동료들이 급히 119에 신고했다.

그러나 119구급차는 되돌아갔고, 회사는 복통을 호소하는 B씨를 차에 싣고 지정병원으로 달렸다. 불과 15분 거리에 종합병원이 있었지만, 회사 측은 굳이 두 배나 먼 정형외과 전문병원을 고집했다. 그렇게 찾은 지정병원의 의사는 여기서는 치료가 힘들다고 고개를 저었다. B씨는 그제야 청주의 한 종합병원으로 옮겨졌다.

사고 발생 1시간 20분이 지난 뒤였고, B씨는 끝내 숨졌다. 사인은 '다발성 장기 손상에 의한 복부 내 과다출혈'. 경찰의 의뢰를 받은 대한의사협회는 "(B씨가) 사고 직후 바로 이송돼 적절한 응급치료를 받았다면 생존할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고 감정 결과를 내놨다. 그러나 이미 그는 함께 살던 홀어머니를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자료=안전보건공단 '지게차 중대재해사고 모음집' 발췌
구매팀장 A씨는 경찰 조사에서 "사고 당시 이 씨에게 외상이 없어 생명이 위독한 상태라고 판단하지 못했다"며 "119를 통해서 이송을 하면 산재 처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회피하기 위해서 그랬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119 구급차로 이송하면 기록이 남기 때문에, 산재 사실을 숨기기 위해 119구급차를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이후 대전고용노동청과 안전보건공단이 합동 점검반을 구성해 특별감독을 벌인 결과, 문제의 사업장에서 최근 3년 동안 29건의 신고 되지 않은 산업재해가 드러났다.


공교롭게도 숨진 B씨는 미신고 29건에도 포함돼 있었다. B씨는 지난해 1월에도 지게차에 치여 석 달이나 병원치료를 받았지만, 회사에서 치료비용과 급여를 지급하는 공상처리 조건으로 산재 신고를 하지 않았다.

이같은 산재 은폐는 비단 해당 업체만의 문제는 아니다. 산재 숨기기는 산업 현장에서 관행적으로, 빈번하게 이뤄지고 있다.

지난 2014년에는 제2 롯데월드 공사현장에서 60대 작업자가 추락했지만, 119에 신고하지 않고 지정병원에만 연락했다가 산재 은폐 논란이 일었다. 그런가하면 최근에는 현대건설이 시공 중인 울진 원자력발전소 공사현장에서 하청 노동자 100여명이 다쳤지만 산재처리가 되지 않았다는 의혹이 제기돼 고용노동부가 조사를 벌이고 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산재 사망 1위 국가이지만, 전체 산업재해 발생률은 OECD 국가 평균 이하인 기이한 통계를 갖고 있다"며 "이는 산업재해의 80% 이상이 은폐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 산재 숨기면 이득 보는 구조 바꿔야

기업들이 산재를 은폐하는 이유는 산재가 많이 발생할수록 산재 보험료가 오르고, 거꾸로 산재를 성공적으로 숨기면 산재 보험료가 할인되는 구조적 문제 때문이다.

안전보건공단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지난 5월 '산업재해 은폐에 대한 처벌방안' 보고서를 통해 "산재 미보고로 부과되는 과태료보다 영업정지나 공사입찰제한, 보험료 인상 등 산재 발생사실을 보고하면서 받게 되는 불이익이 더 크다"고 적시했다.

그러면서 "악질적인 은폐행위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과태료 부과대상 행위에서 은폐행위를 분리해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제언했다.

고용노동부도 산업안전보건법을 개정해, 원청업체의 산재 은폐를 1천만원 이하의 벌금 또는 1년 이하의 징역으로 처벌하는 내용을 추가하기로 하고, 이런 내용을 지난달 17일 입법예고한 상태다. 그동안 과태료만 부과하던 것에 비해 처벌이 더욱 강화될 전망이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입찰참가자격사전심사(PQ)제도의 산재관련 가산점 제도를 폐지하고, 공상처리에 대한 적발을 강화하기 위해 응급기록이나 진료기록을 산업안전의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법령의 근거를 마련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실시간 랭킹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