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무새 죽이기'와 유작 한 편만을 남기고 얼마 전 한 요양시설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 소설가 하퍼 리. 그녀에겐 평생 잊지 못한 아주 특별한 친구가 있었다. 그는 '앵무새 죽이기'의 바탕이 된 하퍼 리의 유년 시절을 함께한 소꿉친구이자 그녀를 소설가의 길로 이끈 인도자였다. 그가 없었다면 어쩌면 불후의 명작 '앵무새 죽이기'는 탄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인 콜드 블러드'로 논픽션 소설의 신기원을 열어젖힌 트루먼 커포티.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원작자, 앤디 워홀과 무라카미 하루키가 사랑한 작가로 더 유명한 그 역시 하퍼 리와 함께했던 유년 시절에서 깊은 영감을 받았다. 그들의 각별한 관계는 커포티가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 뉴욕으로 이사한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심지어 하퍼 리가 '앵무새 죽이기'로 퓰리처상을 수상하며 명성을 얻게 된 이후에도, 친구의 '인 콜드 블러드' 집필을 돕기 위해 열 일 제쳐두고 함께 캔자스로 향할 정도였다.
그들이 처음 만난 해, 1929년은 미국에 경제 대공황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당시 트루먼(트루)은 일곱 살, 넬(하퍼 리)은 여섯 살이었다. 부모의 불화 때문에 시골 마을의 친척 댁에 홀로 맡겨진 트루먼은 이웃집에 사는 넬을 처음 봤을 때 남자애라고 생각했다. 머리카락이 짧고 멜빵바지를 입은 데다 또래 아이들보다 키가 컸기 때문이다. 넬 역시 트루먼이 남자애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머리모양과 앙증맞은 흰색 세일러복 때문에 여자애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트루먼과 넬은 금세 친해졌다. 둘 다 책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독서광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에겐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트루먼의 엄마는 뉴욕 사교계에 진출할 꿈에 부풀어 아들 양육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넬의 엄마는 병약해서 딸의 양육을 책임질 형편이 못 되었다. 불행한 사람은 불행한 사람을 잘 알아본다고 하지 않던가. 애정 결핍에 시달리던 둘은 서로에게서 큰 감정적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트루먼과 넬은 함께 집 앞에서 책 얘기로 시간을 보내거나 재미있는 놀이를 찾아 다녔다. 셜록 홈스 시리즈를 특히 좋아해서 각기 셜록과 왓슨 박사를 자처하며 탐정 놀이도 즐겨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약국과 학교 교장실에 도둑이 들면서 두 아이는 드디어 그토록 바라던 탐정 활동에 나선다. 범인을 찾아 온 마을을 뒤집고 다니면서 둘은 탐정 놀이의 쾌감을 만끽하지만, 대도시가 아닌 남부의 평화로운 시골 마을에 엄청난 미스터리가 존재할 리는 만무했다. 단조로운 현실에 실망한 두 아이는 이야기라는 허구의 세계에 푹 빠져 글쓰기 놀이를 즐기기 시작하는데….
이 소설 '트루와 넬'은 그들의 문학 세계가 유년 시절로부터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G. 네리 지음/ 차승은 옮김/미래인/ 272쪽/1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