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난 전 씨는 1939년 진남포 실천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월남해 서울에 정착했다. 작곡가 조두남에게서 화성악을 배웠으며 정동방송국(HLKA) 경음악단 전속 기타리스트로 활동했다. 작곡가 박시춘이 운영하던 럭키레코드에서 음반 녹음 시 기타 연주를 맡기도 했다.
여동생 나애심(본명 전봉선)의 데뷔곡 '밤의 탱고'를 시작으로 '언제까지나', '미사의 종', '과거를 묻지 마세요', '아카시아 꽃잎 질 때' 등 유행곡을 작곡했다.
또 명국환의 '아리조나 카우보이'와 '방랑시인 김삿갓', 박경원의 '이별의 인천항', 현인의 '인도의 향불'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음반 제작 자체가 쉽지 않았던 1950년대 김용만의 '효녀 심청', '박재홍의 '휘파람 불며', 박재란의 '푸른 날개', 송민도의 '인생행로' 등을 작곡해 한국 가요사에 의미심장한 족적을 남겼다.
이어 1960년대에는 민요풍의 노래인 '장희빈', 번안곡 '남의 속도 모르고'를 비롯해 암살당한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부인 재클린의 심경을 그린 '재클린의 슬픔' 등 다양한 소재를 활용한 곡을 선보였다.
전 씨의 가족은 '스타 패밀리'로도 유명하다. 여동생 나애심과 전봉옥이 가수로 활동했으며, 나애심의 딸 김혜림 역시 '디디디'를 부른 가수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옥희'로 기억되는 아역배우 출신 전영선이 전 씨의 둘째 딸이다.
전 씨는 1978년 허성희의 '전우가 남긴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활동을 정리하고 1979년 미국에 이민을 갔다.
장지는 LA의 포레스트 론 공원묘지이며, 유족들은 발인 등 정확한 장례일정을 논의 중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진화 여사와 딸 영심·영선·영희 씨, 아들 창태·창무 씨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