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권력이 묻고 이미지가 답하다'는 딱딱한 정치와 말랑한 미술, 서로 전혀 상관이 없을 것 같은 두 분야를 접목해 그림이 말하는 역사적 사실과 해석을 흥미롭게 풀어가며 미술 속에 숨겨진 정치성을 좇는다.
"TV나 영화, 사진이 나오기 전에는 광장의 한가운데 서 있는 동상이나 교회의 벽화나 제단화가 그 역할을 했다. 사람들 대부분이 좁고 어두운 집에 살던 옛 유럽 사회에서 도시 한복판의 광장이나 교회에 놓인 시각 매체들은 영웅을 만들고, 심판자를 만들고, 이를 대중의 의식에 각인시키는 역할을 했다."(6쪽)
이 책은 고대 이집트부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 이르는 현재까지 다양한 예술작품들을 살핀다. 나아가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담은 작품 속에서 예술가와 권력가의 관계를 모색하고 당대의 시대정신을 추출함으로써 작품의 전방위적 감상을 가능케 한다.
가령 11센티미터에 불과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통해 작품명에 담긴 이데올로기적 태도를 살피고, 앵그르와 들라크루아가 하렘의 여인들을 그린 작품에서 동방을 바라보는 제국주의의 시선을 짚어본다. 이는 작품을 작품 자체로 감상하는 것을 넘어 왜 이러한 작품이 탄생할 수밖에 없었는지, 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사회문화적인 맥락에서 작품의 당위성을 이해하게끔 도와준다.
또한 교황 율리우스 2세, 나폴레옹, 루이 14세, 엘리자베스 1세, 마리 앙투아네트, 빅토리아 여왕, 엘리자베스 2세 등 시대와 평가가 제각각인 인물들의 초상화를 통해 권력자의 욕망을 살핀다. 오랫동안 서양미술을 현장에서 연구해온 지은이의 시각은 시대의 변화와 요구에 의해 점차 달라지는 예술의 흐름을 꼼꼼하게 짚으며, 권력자들이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이미지를 어떻게 활용해왔는지, 이미지와 권력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알기 쉽게 설명한다.
"당시 왕의 초상화는 왕을 대신하는 역할을 했다. 왕이 직접 가지 못하는 지방 행사에 초상화를 보내기도 했으며, 왕이 베르사유를 떠나 있을 때는 왕좌 뒤에 놓은 초상화가 왕을 대신했다. 초상화는 곧 왕을 존재하게 하는 매체이므로 왕의 초상 앞에서는 등을 돌려선 안 되었다. 등을 돌리는 것은 곧 배반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왕의 초상은 왕의 위상을 지니고 있어야 했으며 동시에 그의 모습을 닮아야 했다."(51쪽)
예술가는 이미지를 통해 권력을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현실을 고발하기도 한다. 권력과 현실에 어떤 이미지를 덧씌우느냐에 따라 숭배와 풍자, 찬양과 조롱 사이를 오간다. 이 책은 정치적 함의를 다양한 목소리로 내고 있는 예술작품들을 선별하여 일곱 가지 관점으로 살폈다.
먼저 1부 ‘권력과 이미지의 어떤 관계’에서는 권력을 쥔 주체가 자신을 높은 존재로 인식시키고자 제작한 이미지들을 다루었다. 스스로 베누스의 후예라고 신화화한 아우구스투스 황제, 정의의 혁명으로 역사에 등장했다가 황제에 등극하며 제우스를 연상하게 하는 도상으로 자신을 나타낸 나폴레옹 등 정치가가 권력을 위해 어떻게 이미지를 사용했는지 그 예들을 볼 수 있다.
2부 ‘예술가의 눈으로 본 폭력’에서는 19세기 이후 미술가들이 주문생산에서 벗어나 자신의 작품으로서 이미지를 제작한 시대를 말한다.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의 학살」, 마네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게르니카」에 이어 「한국에서의 학살」이란 작품을 남긴 피카소, 함박웃음을 짓는 인물로 톈안먼 사건을 은연중에 드러낸 웨민쥔의「처형」 등 작품 속에 담긴 당대 현실과 폭력을 바라보는 예술가의 시선을 살핀다.
3부 ‘종교라는 이름의 정치’는 종교화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정치성을 다루었다. 그리스도교 사회였던 유럽의 중세와 근세에서 종교의 이름으로 비롯된 작품들을 통해 당대의 사회구조를 세심히 들여다본다.
4부 ‘다시, 시선의 방향성을 찾다’는 다른 측면에서 재해석해야 할 작품들을 모았다. 이미 보편성을 띤 가치로 답습되어온 작품들을 날선 시각으로 다른 방향에서 접근한다.
5부 ‘무엇을 기록할 것인가’는 이미지의 기록성을 주제로 작품을 읽는다. 무엇을 기록할 것인지는 권력자의 뜻에 달렸다. 하이집트를 정복한 상이집트의 나르메르 왕은 자신의 승리를 기록했고,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출신의 윌리엄은 영국을 정복하고 왕이 되면서 자신의 정당함을 기록했다. 이미지의 역사 또한 승리자의 역사임을 다각도에서 살핀다.
6부에서는 ‘여왕의 초상화’를 짚어본다. 영국은 많은 여왕을 배출했고 여왕들의 시대에 가장 번성했다. 표면적으로는 강인한 제국의 여왕이지만 동시에 그들에게는 순결하면서도 다소곳한 여성의 이미지가 요구되었다. 이렇듯 한 국가의 여왕마저도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는 주체적인 개인이 될 수 없었다. 여왕의 모습이 담긴 다양한 이미지를 통해 사회의 요구와 개인의 삶을 조명한다.
7부는 ‘그림, 이상을 펼치다’다. 그림은 현실을 비판하기도 하고, 은폐하기도 하며 그림을 통해 이상 세계를 꿈꾸기도 한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던 영국과 스페인은 루벤스의 그림을 통해 평화 외교를 하고, 시에나의 9인 정부는 「좋은 정부와 나쁜 정부」 벽화를 주문하며 좋은 정부를 꿈꾼다.
책 속으로
다시 「게르니카」를 마주했을 때 신기한 점은, 싸우고 쓰러지고 절규하는 극도의 표현성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이 우리를 흥분 상태로 몰아넣지만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피카소가 의도적으로 선택한 색과 구도 때문이다. 그가 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 쏟아낸 수많은 습작은 원색의 울분과 짐승 같은 포효를 표현한 데 반해, 이 거대한 대작은 거의 흑백의 무채색으로 처리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이 그림을 차분하게 바라보게 한다. 더불어 화폭의 양쪽 아래에서 중앙의 위로 향하는 거대한 삼각형 구도는 화면을 안정되게 한다.
_「예술은 장식품이 아니라 무기」에서(81쪽)
빅토리아는 제국의 여왕이었으나 개인적으로는 결혼을 하고 아홉 아이를 둔 어머니였으며 남편의 이른 죽음으로 오랜 기간 과부의 삶을 살았다. 밖으로는 당당한 여왕의 이미지가 필요했지만 여성으로서는 복종과 희생의 미덕을 보여줘야 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미술에서의 가장 큰 변화를 일으킨 사진이 발명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화가가 초상화를 그리던 시대와 같은 완벽한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없었다. 제국의 여왕이며, 과부이고, 어머니인 그녀는, 이 새로운 사진의 시대에 과연 자신을 어떻게 나타냈을까.
_「제국의 여왕과 중산층 부인 사이, 빅토리아 여왕」에서(236쪽) 닫기
이은기 지음/아트북스/ 320쪽/1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