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자 "詩는 내게 생존증명서"

신작 시집 '빈 배처럼 텅 비어'

하루 종일

하루 종일 군시렁거리는 구름들이 바라본다
시간의 무의미를 겨냥하는 것일까
맑은 슬픔
진짜 혁명이 안 되는 이유는
우리들의 너무 많은 이기심 때문이다
그러나 천국은 혁명 없는 혁명


나는 하루 종일 군시렁거리는 구름들만 바라본다

죽은 시계

나는 죽은 시계
세계가 노자 時 장자 分에 멈춰 있다
장자가 無라면 노자는 虛다
장자가 소설가라면 노자는 시인이다
꽃잎들이 흘러가는 강물처럼 보인다

나의 생존 증명서는

나의 생존 증명서는 詩였고
詩 이전에 절대 고독이었다
고독이 없었더라면 나는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세계 전체가 한 병동이다

꽃들이 하릴없이 살아 있다
사람들이 하릴없이 살아 있다

최승자 시인의 신작 시집 '빈 배처럼 텅 비어'가 출간되었다. 천국, 혁명, 노자, 장자, 無와 虛의 세계, 절대 고독, 죽은 시계, 세계 전체가 한 병동. 위의 시 세 편에 등장하는 시어들은 추상적인 인식의 범주가 크고 넓다. 반면 인식의 표상은 구체적이다. 하루종일 군시렁 거리는 구름, 꽃잎들이 흘러가는 강물, 하릴없이 살아있는 꽃들과 사람들.

시인은 혁명이 안 되는 이유를 이기심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천국은 혁명 없는 혁명이라고 했다. 사람은 천국을 꿈꾸지만 혁명 없는, 인간의 노력으로 이뤄지지 않는, 시도되지 않는 이미 완성된 천국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인간의 이기심을 극복하고, 인간의 노력으로 이뤄내는 아름다운 세계가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라고 묻고 있다.

시인은 노장사상의 無와 虛 에 머문다면, 시간의 그물 속에 펼쳐져는 세계를 지워 버린, 생명력을 잃어버린 죽은 시계 또는 죽은 세계임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생노병사의 고해를 살아가는 인간의 유한성을 '꽃잎'으로 표상한다. 그래서 이 세계는 '꽃잎들이 흘러가는 강물'처럼 소멸할 수밖에 없지만, '꽃잎'이 드러내듯이 이 세계는 구체적이고 활동적이고, 살아있는 세계인 것이다. 세계 전체가 한 병동이지만, 그리고 꽃들이, 사람들이 하릴 없이 살아 있지만, 사람을 살아있게 하는 건 절대고독이다. 최 시인에게는 그 절대고독을 표현할 수 있는 詩가 생존증명서인 것이다.

매번 결코 벗어날 수 없는'나'라는 '빈 감방'에서 그럼에도 탈출하려 안간힘을 써온 그의 일기가 92편의 시로 묶였다.

최승자 지음/문학과지성사/124쪽/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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