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66주년, 숫자로 되돌아보는 6·25

[데이터] 관련 통계로 살펴보는 한국전쟁

1953년 휴전협정문에 담긴 김일성 서명.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

시간이 흘러 눈에 보이는 전쟁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분단된 현실 곳곳에는 6·25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한국전쟁 발발 66주년을 맞아 통계청 한국통계연감(1953년)과 국가보훈처 참전유공자 등록 현황(2016년 5월)을 통해 6·25의 슬픔을 숫자로 되돌아보았습니다.

◇피해규모 약 4105억 환(圜)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다리를 건너는 피난민들.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1953년 화폐를 기준으로 했을 때 한국전쟁 당시 피해총액은 약 4105억 환(圜)이었습니다.

당시 1달러가 60환이었던 점을 고려해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7조 9000억 원에 해당하는 피해였는데요. 이는 KT의 시가총액(약 7조 7811억)과 비슷한 금액이었습니다.

가장 손실이 컸던 지역은 수도인 서울이었습니다.

당시 서울의 총 피해액은 약 1769억 환으로 현재 가치로 환산했을 때 약 3조 4000억 원에 달해 전국에서 피해가 가장 컸습니다.

◇피해자 약 100만 명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끊어진 대동강 철교를 따라 피난 가는 민간인들. (사진=e영상역사관 제공)

한국통계연감 자료에 따르면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인명피해 현황은 99만 968명이었습니다.

이 중 37만 3599명은 사망 또는 학살당했고 28만 7744명은 납치 또는 행방불명됐습니다.


오늘날과 비교해보면 현재 서울시 인구(약 1000만 명)의 1/10에 해당하는 인명피해가 발생했고 그중 영등포구 인구(약 37만 명)가 목숨을 잃었으며 성동구 인구(약 29만 명)의 행방이 묘연해진 셈이었습니다.

특이한 점은 전라남도의 사망 및 학살 수치였습니다.

전라남도는 총 8만 3980명의 민간인이 사망 또는 학살 당해서 가장 높게 나타났습니다.

이는 2014년 한 해 동안 서울시에서 출생한 인구(약 8만 3700명)와 비슷한 수치인데요.

당시 전라남도에서는 보도연맹 사건, 노근리 학살 사건 등 민간인을 상대로 한 학살이 많았던 것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생존 참전유공자 약 14만 명

한국전쟁 당시 국군 병사가 처가에 보낸 안부편지.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2016년 5월 말 기준으로 한국전쟁에 참여해 참전유공자로 등록돼 생존하고 있는 사람은 모두 14만 822명이 있었습니다.

이들 대다수 연령대는 80세~89세였는데요. 1953년 당시 14세~23세 때 전쟁에 참여한 셈이었습니다.

70세~74세 유공자도 18명이 있었는데요.

당시 나이 4세~8세로 미취학 아동이거나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어린이가 전쟁에 참전한 셈이었습니다.

가장 나이가 많은 100세 이상 참전유공자(참전 당시 34세 이상)도 38명이 생존해 있었습니다.

◇생존 이산가족 6만 명

한강을 건너는 수많은 피난민들.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통일부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 이산가족신청자료통계에 따르면 2016년 4월 30일 기준 생존하고 있는 이산가족은 총 6만 4767명입니다.

이중 절반(3만 9401명) 이상은 80세 이상 고령자인데요.

2016년 4월 한 달만 하더라도 150명의 이산가족이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채 눈을 감았습니다.

남은 분들의 연령을 고려했을 때 당분간 그 숫자는 급격히 늘어날 듯합니다.

자료=통계청 한국통계연감(1953년), 국가보훈처 참전유공자 등록 현황(2016년 5월), 통일부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 이산가족신청자료통계(2016년 4월)

*1953년 화폐와 현재 화폐의 가치 비교는 당시 1달러와 현재 1달러의 기준을 적용한 수치로 공식적인 수치가 아님을 밝힙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한강철교 개통식 후 기차에 시승하여 한강을 건너고 있는 모습. (사진=e영상역사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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