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밀양과 부산 가덕도를 두고 여야 정치권은 물론 지방자치단체, 학계, 시민들까지 나뉘어 유치 '전쟁'을 벌이면서 10년을 이어온 신공항 국책사업이 국론 분열을 이끄는 화약고로 전락하고 있다.
"지난 2002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선 행정수도 공약 이후 10년 넘도록 나라를 온통 뒤흔들었던 분열상이 신공항 사태로 재연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대선때마다 영남권 표심을 흔들었던 신공항 시한폭탄이 내년 대선, 이듬해인 2018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벌써부터 작동에 들어갔다.
경남 밀양과 부산 가덕도 중 어느 곳이 선정되더라도 탈락한 쪽의 극심한 반발이 뻔하고 이미 불복 움직임이 노골화되고 있다.
하지만 탈락지역 불복을 막거나 반발을 무마할 대책이 없어 선정뒤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불투명한 실정이다.
◇ 신공항 입지…10년 끈 갈등과 논란 종지부 찍을수 있을까
영남권(동남권) 신공항 건설은 김해공항의 대안 필요성이 제기된 1992년 부산시 도시기본계획이 출발점이다. 지난 2006년 노무현 전 대통령 지시로 공식 검토가 시작된 신공항은 이후 10년간 선거때마다 '표심얻기'에 이용돼 왔다.
2007년 대선에서는 이명박 후보가 신공항 건설을 공약했고 용역을 통해 부산 가덕도와 경남 밀양으로 후보지가 압축됐으나 2011년 정부는 "경제성이 없다"며 계획자체를 백지화했다.
2011년 백지화때는 지역 갈등과 반발이 최고조에 이르러 이명박 전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까지 했다. 하지만 2012년 대선에서는 박근혜 후보가 영남권 신공항 건설을 공약으로 다시 꺼냈다.
재검토에 나선 정부는 "김해공항의 용량 포화가 예상된다"며 "신공항이 필요하다"는 결론 내리고 2015년 6월 파리공항공단엔지니어링(ADPi)에 입지 선정 용역을 발주했다.
대구·경북, 경남, 울산은 "우수한 접근성, 경제성 등을 내세우며 밀양에 신공항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부산은 "24시간 운영이 가능하고 필요시 확장도 할 수 있는 가덕도에 신공항을 세워 김해공항과 함께 운영하는 편이 낫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신공항 사전 타당성 검토 용역을 맡은 파리공항공단엔지니어링(ADPi)은 오는 24일 이전에 용역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국토부는 용역 결과가 나오자마자 즉시 신공항 후보지와 논란이 된 평가기준, 배점 등을 공개한다는 방침이다.
신공항 논란을 둘러싼 막판 최대 쟁점은 평가항목과 항목별 배점(가중치)이다. 밀양과 가덕도는 장단점이 크게 엇갈린다.
밀양은 내륙에 있어 접근성이 높지만 소음 피해와 주변 산지로 인해 안전에 대한 우려도 그만큼 높다. 가덕도는 소음 피해 걱정 없이 24시간 공항을 활용할 수 있지만 매립비용이 더 들고, 영남권 전체로부터의 접근성이 떨어진다.
결국 두 지역의 우열은 평가항목과 배점이 어디에 유리하게 결정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부산과 밀양은 "서로 우위를 주장하며 상대에게 유리한 조건이 부여됐다거나 용역 과정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의혹까지 제기하면서 한 치의 양보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부산은 산봉우리와 같은 '고정 장애물'이 개별 평가항목에서 없어졌다"며 "밀양에 유리한 평가항목 조작"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안전 관련 핵심항목인 고정장애물은 반드시 독립적으로 평가해야 하는데 밀양이 유리하도록 '보이지 않는 손'이 개입한 것 아니냐"고 주장하고 있다.
밀양이 주장하는 '항공학적 검토'도 논란을 빚었다. '항공학적 검토'를 도입하면 애초 27개나 깎아야 했던 산을 4개만 깎아도 장애물을 피하는 비행기술상 항공기 이·착륙에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만큼 안전성과 경제성 평가 점수를 높일 수 있다.
이에 대해 국토부는 "ADPi가 지난달 25일~27일 열린 전문가 자문회의에서 평가항목과 항목별 가중치, 배점기준 등을 정했고 평가공정성과 객관성은 문제가 없다“며 ”평가항목이나 가중치를 미리 공개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냐”고 강조했다.
◇ 선정뒤 파국 불보듯…탈락뒤 불복 위한 명분 쌓기 이미 진행중
지난해 사업 재추진에 앞서 영남권 5개 시·도지사들이 유치경쟁을 자제하고 결과에 승복하기로 합의했지만 이미 휴지조각이 됐다.
지자체들이 각종 의혹을 제기하는 것도 탈락 후 불복을 위한 명분 쌓기라는 주장도 있다. 이미 일부 정치권과 시민단체들은 다른 지역으로 신공항 입지가 선정되면 결과에 불복하겠다는 입장을 공공연히 내놓고 있다.
서병수 부산시장은 이미 "납득할 수 없는 결과가 나오면 시민들의 힘을 모아 독자적인 민간공항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힌 상태다.
더욱이 내년은 대선, 이듬해인 2018년에는 지방선거가 예정돼 있다. 영남권에 기반을 둔 지자체들이 '선거 보증수표'인 신공항 유치에 목을 맬 수밖에 없다.
탈락한 지역의 민심을 달래기 위해 정부가 별도의 '선물 보따리'를 풀 것이라거나 민심을 추스르는 대책도 함께 검토 중이라는 말, 다른 인프라를 집중 투자하는 등 대안을 마련해줘야 한다는 주장도 흘러 나온다.
하지만 국토부는 "대형국책사업 탈락지에 반대급부를 줬다는 선례를 남길 수는 없다" 며 '정치적 보상'이 없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 서병수 부산시장 신공항 상생안 제안?…영남권 4개 자치단체 “현실성 없다”
신공항 예정지 발표를 앞두고 서병수 부산시장이 20일 서울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신공항 상생안'을 발표할 것으로 보여 관심을 모으고 있다.
서 시장은 그동안 양쪽의 갈등을 풀수 있는 대안으로 신공항 ‘상생안’을 여러차례 언급해 왔다.
상생안의 핵심은 정부의 신공항 예산 12조원 중 6조원을 투입해 가덕도에 활주로 1개를 건설하고, 나머지 6조 원은 소음 민원으로 대구의 가장 큰 현안인 K2 전투기 공항의 이전 사업 등에 사용하자는 것이다.
부산 가덕도에 신공항을 건설하고 대구 등에 반대 급부를 주자는 논리다. 이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면 "부산 가덕도 신공항 건설비는 3조원만 국비로 지원 받고 민자로 부족한 부분을 마련한 뒤, 나머지 9조원 모두를 대구 등에 양보할 수 있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이에대해 경상남도 관계자는 “서 시장의 상생안에 대해 영남권 4개 자치단체는 이전부터 현실성이 없는 일이다고 판단하고 있다”며 “5개 단체가 원래 정부 용역 결과에 따르자고 한 만큼 그 결과를 수용하면 될 일이다”고 밝혔다.
◇ 대형국책사업 정치와 선거 이용 막을 대책 없나
정치권이 선거 때마다 국책 사업을 선심 공약으로 내걸며 지역사회의 분열을 부추기고 있지만 부작용을 제어할 방법이 없다.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는 국책 사업에 지역 이기주의나 선심성 정치 논리에 휘둘리지 말고 경제적 논리로 접근할 수 있도록 대책이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신공항 같은 대형 국책 사업은 100% 국고로 지원되는 데다 향후 운영 과정에서 적자가 나도 지자체로선 책임질 일이 전혀 없다.
해당 지역에선 공사비 5조~10조원에 이르는 신공항을 따낼 경우 일자리 창출과 향후 공항 운영에 따른 지역 발전 등이 예상되기 때문에 어떻게든 유치하려는 움직임을 보일 수밖에 없다.
이에대해 강동석 전 인천공항공사 사장은 "미국이나 유럽 등에선 공항·항만 등을 지자체가 대부분 투자하고 중앙정부는 일부 보조만 해준다"며 "일단 유치만 하면 적자가 나도 지자체는 손해날 것은 없는 현재의 시스템이 문제“라고 밝혔다.
대형 국책 사업은 아예 대선 공약에서 제외하도록 규정을 마련하거나 사업비에 지방비를 분담하도록 하는 등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