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에서 민란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

신간 '주식회사 대한민국', 박노자 지음

신간 '주식회사 대한민국'은 한국 사회에 대한 날카롭고 근본적인 성찰을 이어온 박노자 교수가 헬조선에 대해 분석한 책이다. 헬조선의 원인은 무엇이고, 그럼에도 '헬조선에서 민란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하여 지금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1부 지옥의 논리는 헬조선을 떠받치고 있는 논리들을 살펴본다. 2부 그들이 원하는 세상은 박근혜 시대 우리 사회 주류세력의 모순과 한계를 집중 분석하고, 3부 씨줄과 날줄: 병영국가, 민족주의, 식민성에서는 박근혜 시대를 가능하게 했던 우리 사회 기저에 깔려 있던 인식들을 이야기한다. 4부 문제는 국가다에서는 대안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간다. 적어도 재분배 기능, 자본에 대한 견제·보완 기능은 갖춘 국가로 나아가자고 외친다.

'주식회사 대한민국'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저자가 꼽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자본의 탐욕을 견제하고 사회 약자를 보호하기는커녕 스스로 기업국가화되어 자본의 이익 보호에 집중하고 사회적 약자의 연대는 막아선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을 하나의 주식회사에 견주어본다면 상황은 더욱 명확해진다. (주)대한민국의 주주는 누구인가? "경영 참여는 꿈도 못 꾸고, 하라는 대로 잔업과 특근을 하느라 일주일 실질노동시간이 50~60시간이나 되는, 40대 이상 되면 근골격계 질환이나 신경질환을 앓게 되는 대한민국의 피곤한 노동자들은 과연 주주인가?"(11쪽)

대기업의 대주주나 임원, 고급공무원, 혹은 땅부자 등 고액재산보유자들이야말로 (주)대한민국의 진짜 주주라 할 수 있을 터인데, 이들은 서로 겹치거나 혼맥 등 긴밀한 사회적 네트워크로 연결되기까지 해서 매우 공고하고 배타적인 집단이 되었다. 그러기에 (주)대한민국은 기업 중에서도 악질기업이 되기 쉽다. 오로지 주주들의 배당금 극대화만을 위해 분투할 뿐, 피고용자에 대해서는 그저 주주 배당금 극대화의 재료쯤으로 여기는 것이다.

특히 대기업-하도급중소기업으로, 정규직-비정규직으로 이원화되어 있는 경제구조를 보자. 재벌들은 아주 제한적으로만 직접 고용을 하며, 대부분은 각종 하도급·영세업체에 고용되어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일하거나 비정규직 혹은 알바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정규직-비정규직 사이의 차이는 단순히 고용 형태의 차이가 아니다. 의료·교육 등 본인의 생존과 자녀의 성장에 가장 필요한 사회적 서비스부터 기업에 소속되어 있지 않으면 제대로 꾸려나가기 힘들다. 실업수당, 국민연금 등 각종 사회적 임금들은 그 지급 기간이 짧거나 조건이 까다롭거나 생활이 불가능한 작은 액수다. 결국 정규직 직장이 없는 이상 한국 사회에서 인간다운 삶이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측면에서 비정규직 양산은 현대판 천민계급 만들기와 다름없다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결국 생존에 대한 불안을 조장하며 끊임없이 착취를 이어가는 것이 헬조선의 모습이다. 하여 우리는 개인이라기보다는 전사로 살아가고 있다. 살아남기 위해서, 부적응자로 낙인찍혀 걸러지지 않고 어떻게든 사회에 편입되기 위해서 매일같이 처절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우정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친구들과 어울리"지 말고 계획한 공부에 매진하라던 한 사교육 기업의 광고 문구는 우리 사회가 생존 전사를 키워내는 데 얼마나 총동원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사가 되기 위해서 우정 따윈 필요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동되며 이 시스템의 유지에 기여하게 되는 가장 큰 요인은 아무래도 성장 신화일 것이다. 여태까지의 성장 속에서 어느 정도 생계 안정을 이룩한 부모 세대가 있고, 그 지원으로 실업자가 돼도 당장 굶어죽을 일은 없는 많은 젊은이들이 있다. 이들은 한편으론 헬조선 지옥도를 그리면서도, 한편으론 경제성장과 각자의 노력이 결국 문제를 풀어줄 것이라고 은근히 기대한다. 하지만 성장은 둔화되고, 재벌경제가 아무리 수출을 잘해도 다수의 삶이 나빠지기만 하는 경험은 늘어나기만 한다.


헬조선의 피해자들이 연대해서 이 사회를 바꾸지 않는 이상 다른 길은 없을 것이다. 생존 공포라는 상황에 빠진 사람들에게 사회적 책임츺 요구한다는 것이 지나치게 가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존공포에 빠져 그저 경쟁에서 살아남아 일정한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는 것만을 꿈꾸는 사람은, 사회적 부조리를 거부할 줄 아는 자율적 개인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 사회의 주류가 간절히 열망하는 사항이다.

"결국 문제는 '정치'다."(10쪽) 하지만 여기서의 정치란 단순히 정치인들이 하는 행위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기본적 구조와 그 구조를 유지하려는 지배계층의 힘, 그리고 그에 맞서는 피해대중들의 저항력. 이 두 거대한 힘이 서로 맞서 그 사이에서 어떠한 균형을 이루는 것이 정치의 본질이다. 우리 사회는 이런 정치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였고, 특히 최근의 진보정치 약화는 바로 이 부분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그리고 어쩌면 당연한, 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해답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우리 사회는 공통의 책임의식을 공유하는 자율적인 개인들 사이의 연대만이 살릴 수 있을 것이다"(33쪽)라고.

책 속으로

모든 지배 이데올로기들처럼 능력주의는 사실상 그저 허구에 불과하다. 대다수가 스트레스, 열등감, 자책을 안고 불안 속에서 떨어야 하는 사회는 단기 수익은 더 올릴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침몰로 간다. 인간의 진정한 능력은 남들과의 경쟁적 비교가 아닌 남들과의 연대,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는 독창성으로부터 비롯된다. _78쪽

남한 지배층은 사실 내부 동질성이 강한 하나의 배타적 집단이다. 주요 재벌과 관벌(전직 국무총리, 외교부 장관 등), 그리고 언론재벌·재벌언론들을 보면, 이미 일제강점기 때부터 벼슬을 하거나 기업을 경영했던 그 조상들이 자기들만의 ‘네트워크’를 만들기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 저들은 혼맥으로 철저히 이중삼중 연결돼 있으며, 서울의 몇 군데 특정 동네에서 살며, 자녀들을 같은 학교나 같은 대학에 보낸다. 이들이 한국을 배타적으로 소유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부 서열 상위 1%가 개인 소유의 땅 50% 이상을 가지고 있으며, 주식부자 1%가 시가총액의 63%를 소유하는 사회가 바로 대한민국 아닌가?
문제는 한국을 저들 소유의 개인회사처럼 여기고 있는 저 관리자들의 '이너 서클'이, 그 무엇도 누구와 나누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저들의 지배는 철저히 독점적이고 배타적이다. 저들이 소유하는 기업에서 노동자들이 경영 참여권을 한 번이라도 가져본 적이 있는가? 노조 대표자 몇 명이 이사회에 참석한다고 해서 저들이 가져가는 배당금이 크게 줄어들 일도 없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저들이 원칙상 저들의 권력을 나눌 생각이 없는 것이다. _120~121쪽

세월호를 침몰하도록 한 것은 국가와 자본이라고 하지만, 문제의 중심에 있는 것은 분명히국가다. 고물 선박 구입과 과적 운항 등을 저지른 것은 자본이었지만, 규제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자본도 필연적으로 이와 같은 폭리를 노리는 행위를 할 것이다. 오로지 이윤만을 추구하는 것은 자본의 생리다. 자본의 이윤 추구 본능을 공공이익을 위해 견제하고, 자본의 탐욕으로 인한 사고가 났을 때에 피해자들을 구제하고, 참사의 원인을 규명하고 책임자들을 처벌하는 것은 국가만이 할 수 있다. 세월호 사태가 보여준 것은, 대한민국이 그중에서 어떤 것도 못한다는 점이었다. _205쪽

한국 군대는 군사기관인 동시에 종속적 신자유주의를 지탱해주는 유순한 인력의 양성기관이다. 꽃다운 나이에 연애나 즐기고 취업 준비나 해야 하는 청년들을 사회와 격리시켜 반복적인 복종 훈련을 시키는 것은 사실 개개인으로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매우 가혹한 처사다. 이렇게 부자연스러운 상황을 그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끔 하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맞다, 바깥 사회까지 군사화시켜야 병영 속에 갇히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일반 사회 전체에서 군기 잡는 분위기는 박근혜 정권 이전에도 있어왔지만 안보주의 정권의 이데올로기에 힘입어 강화됐다. 초등학생부터 초로의 직장인까지 신자유주의 시대판 새마을운동이라고 할 각종의 극기훈련을 종종 받게 해 한시적 유사 군인으로 만드는 것이 하나의 커다란 병영을 방불케 하는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_229~230쪽

대한민국에서는 대다수에게 안정적인 삶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재벌 대(對) 하도급화된 중소기업'이라는 이중적 경제구조 때문이다. 재벌들의 직접 고용은 매우 제한적이며, 대부분은 각종 하도급·영세업체에 고용되어 열악한 노동조건하에서 일하거나 비정규직 혹은 ‘알바’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청년층의 거의 4분의 1이 자신들을 ‘체감 실업자’로 분류하는 오늘의 이 구조 속에서, ‘머슴’의 자리마저도 점차 더 얻기 어려워지고 있다. _6~7쪽

삼성 노동자 중에는 이미 백혈병으로 죽은 사람이 56명에 이르고, 적어도 1명(14년 동안 방독마스크나 보호구 없이 위험물질을 다루었다가 2011년에 사망한 김진기 씨)의 경우에는 산재사망이라는 공식 판정까지도 나와 있지만, 이는 대다수 언론에서 뉴스’도 되지 못하고 주류 사회에서 거의 거론조차 되지 않는다. 다행히도 몇 해 전 서울대 학생들이 ‘기업 살인’의 직접적인 책임이 있으리라고 판단되는 황창규 전 삼성전자 사장의 초빙교수 임용에 반대해 ‘침묵의 카르텔’에 균열을 일으켰다. 그러나 지금도 버젓이 자행되고 사건화도 잘 되지 않는 기업의 탐욕에 의한 살인을 방지하기 위해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삼성전자의 제품들이 얼마나 많은 '을'들의 고통. 질병.사망을 대가로 해서 만들어지는지를 뻔히 알면서, 우리가 수십 명의 노동자를 죽인 이 기업에 대한 불매운동이라도 제대로 해봤는가? 그렇게 죽어나가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한 공동체에 속한 개인으로서의 책임을 과연 느끼고 있는가? _30~31쪽

박노자 지음/한겨레출판/ 264쪽/1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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