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전쟁'은 저마다 새로운 인생을 꿈꾸며 인천으로 향하는 증기선에 오른 세 사람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부산 출신의 아편쟁이 아들 최장학, 벌교 출신 입담왕 송상현, 고성 출신 주먹 나용주. 세 사람은 동갑내기라는 이유만으로 친구가 된다. 증기선이 인천에 도착한 뒤, 그들은 인천 조계지에서 일본 회사 '대일 해운'의 하역 노동자 생활을 시작한다. 하역이 손에 익고 이들의 우정도 무르익을 때쯤, 최장학은 청나라 기녀에게 첫눈에 반한다. 그 기녀는 '천락원'이라는 주점에서 감당할 수 없는 빚과 아편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지만, 최장학의 그녀를 향한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간다.
'대일 해운'이 노동자들에게 약속한 임금을 지급하지 않자 노동자들은 파업을 감행하고, 최장학은 그 과정에서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살인 혐의를 받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일본인 사장은 최장학에게 이 일을 덮어 줄 테니 대체 노동자들이 도착할 때까지 임금 협상이 타결된 것처럼 거짓 통보하라는 협상을 제안한다. 대체 인력이 도착하면 기존의 노동자들은 무더기로 해고되는 상황. 망설이던 최장학은 청국 기녀를 '천락원'에서 빼낼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받는 조건으로 협상에 응함으로써 친구와 동료를 배신한다.
한 달이 지나고 예정대로 하역 대체 노동자들이 도착한 뒤, 협상이 타결됐다는 것이 거짓임을 알게 된 노동자들이 거세게 항의한다. 이 과정에서 세 사람의 우정은 부서지고, 함께할 줄 알았던 이들의 운명도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하는데...… 일본?청?미국?독일?러시아?프랑스까지,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조선 속 외국, 인천 조계를 배경으로 아편을 둘러싼 거대한 범죄가 롤러코스터 같은 운명을 살아내는 두 남자의 이야기와 함께 펼쳐진다.
소설의 중심축을 이루는 캐릭터는 최장학과 나용주다. 이들은 대결적 구도에 있지만 선과 악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나용주는 인생 가장 밑바닥에서 시작해 최고의 자리까지 오르는 인물. 아편을 밀매해 부를 증식하고 아편 밀수 조직 '자청방'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우두머리로 성장한다. 한편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화자이자 또 다른 주인공 최장학. 그는 나용주와 달리 카멜레온같이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하는 인물이다. 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순정, 친구들을 그리워하는 우정으로 가득 찬 마음 한편에는 이해득실에 따라 움직이는 기회주의적인 면모도 있다. 타고난 명석함으로 빚더미에 오른 아편쟁이 아들에서 왕의 신뢰를 받는 관리로 성장한다. 아편을 증오하면서도 끝내 아편을 거부하지 못하는 모순적인 존재.
청나라가 아편으로 몰락해 가고 있을 때 인접해 있던 조선은 제국주의 열강들의 먹잇감이 되어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운명을 맞고 있었다. 그런 태풍의 한가운데에서 조선만이 아편의 바람을 피해 갈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작가들의 상상력은 동서양의 아편전쟁 틈바구니에 있던 조선에 일어났을 법한 스토리를 상상하는 데서 시작됐다. 새로운 문물이 들어와 옛것과 부딪치고 동양인과 서양인이 한데 모여 서로 다른 문화를 공유하며 살아갔던 시절. 아편에 중독되어 스스로를 좀먹는 자들과 그들의 중독을 이용해 부를 증식해 가던 또 다른 무리, 그리고 그 무리를 없애기 위해 사활 건 사람들의 먹고 먹히는 이야기가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책 속으로
인천으로 가기로 했소. 왜 인천이었을까? 조선 팔도에 고을이 수백 군데지만, 나는 부산에서 익힌 삶의 기술을 써먹을 곳을 바랐소. 개항장으로 쏟아진 새 세상의 맛을 이미 본 게요. 농사를 지으며 땅만 보고 살기엔 세상도 내 마음도 너무 바뀌었소. 그래서 돈이 있고 기회가 있는 개항장을 택했소. -28쪽
조계는 인천에 존재하는 독립된 이국(異國)들의 전시장이었다고나 할까. 제물포항과 인천 앞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응봉산 정상에 올라가 보면 인천에 자리 잡은 조계가 한눈에 훤히 들어온다오. 그중 가장 넓고 사람이 많았던 곳이 청국 조계와 일본 조계였소. 두 나라가 조선에서 지리적으로 가장 가깝기도 했지만, 또한 그 두 나라가 망해 가던 조선을 서로 먹겠다며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놓고 으르렁거렸다오. -61쪽
이즈음 아편은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 자청방이 아편을 풀면 중간 판매상들이 구입하여 유통시켰다. 중간 판매상 대부분이 조선인이었기에,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아편이 전달되었다. ‘천락원’을 비롯한 아편굴과 매음굴의 기생들은 물론이고 은행 거리에 늘어선 은행의 번듯한 은행원들,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의 학생들, 하다못해 아편을 단속하는 인천 감리서 순검들까지 아편에 손을 댔다. 허물어져 가는 초가 곁방에서 아편을 피우다 쓰러져 죽은 여인도 있었다. 그 곁에는 갓난아기가 울고 있었다. 자청방을 통해 인천으로 들어오는 아편의 양은 급속히 늘었지만, 쩍쩍 갈라진 논바닥에 물 들어가듯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소리도 형체도 없는 아편 연기만 인천 하늘로 흩어졌다. ‘천락원’만으로는 늘어나는 손님을 모두 받지 못할 정도였다. 왕지충은 아편굴 하나를 더 만들기로 하고 그 이 름을 ‘지락원(地樂園)’이라고 정했다. -206쪽
이원태· 김탁환 지음/민음사/288쪽/1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