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가 얀 후스, 루터 이전에 양초를 밝히다

신간 '종교개혁 이야기', 사토 마사루 지음

일본 논객 사토 마사루가 15세기 종교개혁 이야기를 들고 나왔다. 루터와 칼뱅보다 백 년 전 보헤미아의 사제였던 얀 후스의 이야기이다. 얀 후스가 범접할 수 없는 절대 교황권에 대항하며 제대로 된 신앙을 부르짖다가 화형대의 잿더미로 사라진 이야기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저자는 신학자들로부터 ‘종교개혁 이전의 종교개혁자’로 일컬어지는 얀 후스의 사상과 투쟁을 되짚어본다. 그 방법으로 중세와 근대, 현대를 아우르는 후대 종교학자들이 쓴 다양한 원문을 아낌없이 교차로 인용하면서 얀 후스 및 당대 종교개혁 전후 사정을 객관적으로 풀어준다. 무엇보다 얀 후스의 종교투쟁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대립만이 아니라, 그제야 민족(네이션)이란 개념이 틀을 잡고 제대로 된 국가관이 성립되는 계기가 되었음을 역사와 문헌을 되짚어 증명하고 있다.

존 위클리프, 얀 후스, 루터, 츠빙글리, 칼뱅…… 서양 중세기가 끝나고 근세가 시작되는 시기에 로마가톨릭교회에 맞서 종교개혁이라는 대역사를 만든 인물들이다. 하지만 보헤미아에서 출판된 16세기 문헌을 보면 위 인물들의 영향력을 한눈에 보여주는 그림이 있다. 세 컷으로 나눠진 그림의 맨 위에는 위클리프가 어둠 속에서 부싯돌로 불씨를 일으키는 모습이, 가운데 칸에는 얀 후스가 양초에 불을 붙이는 모습이, 마지막 칸에는 루터가 횃불로 세상을 밝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위클리프가 중세교회의 신앙관에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한 선구적 이론가에 그쳤다면, 이 책의 주인공인 얀 후스는 훗날 루터로 대변되는 종교개혁 완성형 이전의 첫 교회 개혁가인 셈이다. 그것도 ‘실천적 개혁가’로 말이다.

보헤미아, 지금의 체코 출신이었던 얀 후스는 그저 안정적인 삶을 위해 신학을 공부하고 사제가 되었지만, 막상 그의 눈에 비친 현실의 교회는 온갖 부조리의 장이었다. 기초학문인 철학은 신학이라는 절대권력에 무릎 꿇은 시녀가 되었고, 교황은 돈을 받고 극악한 범죄에 면죄부를 내려주었다. 이때부터 후스는 강단에서, 설교단에서, 문서를 통해서 부패한 교회 현실을 비판하며, 오직 예수와 성서만을 근본으로 하는 초기그리스도교로 돌아가자고 호소하였다. 후스의 동향민이었던 체코인들도 로마 교황청 중심의 신앙에서 탈피하기 위해 자국어로 설교하는 등 후스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이에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눈엣가시가 된 후스는 강제로 소환되어 굴욕적인 심문을 당하다가 결국 콘스탄츠 공의회 자리에서 화형에 처해지고 만다. 자기주장을 철회하면 없던 일로 해주겠다는 추기경들의 회유에도 그는 “부디 나의 적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마지막 말을 남기며 눈을 감았다.

얀 후스는 절대권력의 교황과 추기경들을 강하게 비판하며, ‘눈에 보이는 교회’에 다니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에 속해 있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즉 제도적인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꼭 구원받으리라는 법은 없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한 교회에 소속되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는 그 구분이 쉽지 않다. 누가 구원의 대상이 되는지 아닌지를 사람이 판단할 수 없으며 곧 신만이 알고 있음을 후스는 확신했던 것이다.

종교개혁 역사에 있어 얀 후스가 더욱 전무후무한 인물로 기억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체코라는, 당시 비주류 민족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앞서 거론했던 영국의 위클리프나 독일의 루터, 프랑스의 칼뱅 등은 당시 서유럽 주류 국가 출신이어서 종교활동을 하는 데 민족적인 설움을 겪을 일은 없었다. 그와 달리 보헤미안인 체코 출신의 후스는 프라하대학의 학장으로 지냈던 당시에도 자국민보다는 독일인 교수와 학생들의 세력이 더 컸던 것에 대해 늘 저항하고 개선하고자 노력했다. 라틴어로만 되어 있는 성서 교재를 버리고 체코어로 번역하여 다시 만들었고, 체코어로 설교하지 말라는 로마 교황청의 명령에 불복하며 의지를 이어나갔다.

설교와 저술로써 초기 기독교 정신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체코의 지식인들과 왕실, 일부 귀족, 그리고 많은 대중은 열렬히 환호했다. 이렇듯 후스는 체코 민족에게 종교뿐 아니라 ‘우리 민족’이라는 사회적 아이덴티티를 부여해주는 역할을 해냈을 뿐만 아니라, 소외된 농민이나 하층 계급에게까지 자국 언어 및 눈높이에 맞춰 설교하는 등 소외된 자에게 사랑을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 즉 초기 기독교 정신을 여실히 실천하였다. 그런 그의 행보를 거슬려했던 교황청에서 그를 공의회에 불러 불시에 처형하기까지 그는 체코 민족의 아버지에 다름 아니었다. 예상 가능한 일이지만, 그의 화형 이후 체코인들은 ‘후스전쟁’을 일으켜 15년간 조직적인 전투를 곳곳에서 이어나갔고, 그의 기독교정신을 이어받은 모라비아 형제단은 ‘체코 개신교’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19세기 중반에 체코 민족의 아버지라 불린 프란치섹 파라츠키가 후스를 재해석함으로써 체코 민족을 형성했다. 후스에 의해 체코인은 독일인의 멍에로부터 헤어 나올 수 있었으며, 약속대로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 체코인의 나라를 건국하리라는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1918년 토마슈 가릭 마사리크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 슬로바키아와 칼파치아를 합해 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을 건설했다. 이렇게 해서 신화는 현실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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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와 근대가 교차하는 서양사에서 종교개혁은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하지만 종교개혁을 그리스도교의 역사 안에서만 국한되어 바라본다면 중세와 근대의 교차로에 왜 종교개혁이 놓여있는지를 모르고 넘어가게 된다. 예수가 아닌 교황, 즉 가톨릭이라는 종교가 지배하던 한 시대가 끝난 것이 중세의 종말이며, 이제 제대로 된 예수 중심의 신앙을 회복함과 동시에 그간 인식하지 못했던 ‘우리 민족’에 대한 개념의 탄생이 곧 근대의 시작을 알렸다(일반적인 역사 구분법에서는 17~18세기를 ‘근세’라고 하나 이 책의 저자는 이때부터를 근대라고 통합하여 부르고 있다). 오랫동안 ‘사회와 교회는 일체’라는 관념이 의심 받기 시작했고, 이 의심은 유럽사회에 분열을 일으킨다. 이 분열은 훗날 ‘네이션(민족)’이라는 강력한 아이덴티티로 뿌리내리는데, 이처럼 세계사에 민족을 탄생시킨 중요한 기원이 곧 후스의 종교개혁이었다.

사토 마사루 지음/김소영 옮김/바다출판사/508쪽/2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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