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딱딱하던 연기를 찾아볼 수 없게 됐을 즈음, 김민희는 충무로 대표 감독들의 뮤즈가 되더니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로 우리 곁에 돌아왔다.
연기력으로 인정받는 자리에 오기까지 김민희가 순탄한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다. 외모만으로 반짝 빛나는 스타로 끝날 수도 있었고, 연기력 논란을 아직도 짊어지고 있었을 수도 있다.
대중은 결과물을 갖고 평가할 뿐이지만 김민희는 그 과정 하나 하나를 소중하게 여겨왔다. 그래서 과거를 변명하기 보다는 그 때도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임했다'는 대답을 내놓을 뿐이다.
다음은 냉정한 겉모습 속에 누구보다 뜨거운 열정을 가진 배우 김민희와의 일문일답이다.
▶ '아가씨'라는 작품을 어떻게 만나게 됐나?
- 당시 읽었던 시나리오 중에서 가장 관심이 많이 갔던 영화였다. 캐릭터 자체가 보편적이지 않아서 제가 마음껏 무언가를 많이 입힐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부분이 좋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시나리오를 정말 긴장감 있게 잘 읽어 내려갔다. 마음에 드는 시나리오를 만나는 것이 쉽지 만은 않다. 사실 저는 작품을 결정할 때, 이 작품이 내게 어떤 이점을 주는지는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고민이 되는 부분은 있었지만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 대문에 선택한 것 같다.
▶ 실제로 처음 완성된 영화를 봤을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
- 칸국제영화제에서 처음 봤는데 내가 생각하고 기대한 박찬욱 감독님의 작품이었다. 물론 감독님의 전작에 비해서는 조금 고와진 느낌이 있다.
▶ 애정신의 경우 수위가 꽤 높았다. 촬영을 하면서 어려움을 겪은 적은 없었나?
- 그런 부분을 다 알고 선택한 것이다. 영화에 대한 애정이 있으니 거기에 대한 책임감 또한 당연히 있다. 영화적으로 필요한 요소들이면 감독님도 제게 이야기를 해서 설득시켰다. 저 역시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서 했다. 물론, 힘든 부분은 있었지만 그것은 제가 감당해야 될 몫이라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너무 거부감이 있었다면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 같다.
- 태리는 현장에서 야무지게 해냈다. 감독님과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준비를 많이 했다고 하더라. 내가 도움을 주고 이끈다기보다, 함께 호흡하면서 무리 없이 잘 맞았던 것 같다. 베드신은 정확한 콘티가 있었다. 스스로 감정이나 행동을 창조한 건 없었다. 감독님이 확실히 원하는 그림이 있었고, 감정적인 측면에서도 몰입은 괜찮았다.
▶ 아가씨 히데코라는 캐릭터는 굉장히 양면성이 도드라진다. 하녀 숙희의 시점에서 보는 히데코와 히데코 본인이 고백하는 모습은 완전히 딴판이다.
- 어느 정도는 진실을 많이 포함해야 했다. 어떤 캐릭터라고 해서, 딱 그 모습만 있는 것은 아니다. 특정한 모습이 그 사람의 실체가 아니고, 상황에 따라 계속 변화할 수 있으면서 한 순간에 여러 복잡한 감정을 드러낼 수도 있다. 히데코라는 캐릭터에 진실성을 주고 싶었다.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아가씨' 이미지보다는 생동감과 개성을 넣기 위해 노력했다. 내게 히데코는 유년시절의 억압으로 인해 뒤틀리고, 변형된 인간이다. 그것이 가여웠다. 정말 나쁜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 백작 역을 맡은 배우 하정우와의 호흡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하정우와는 코믹한 느낌이 있었다.
- 백작 입장에서는 히데코를 사랑하게 됐는데 히데코 입장에서 보면 백작은 제물이다. 그런데 그게 통쾌한 장면인 것 같다. 후원자 이모부의 목표가 백작에게 옮겨졌을 때 본인은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행복한 다른 목표에 도달한 것이고. 재밌는 거 같다. 어떻게 보면 백작은 순진하고 불쌍하기도 하다. 마지막에 회상하는 장면은 좋더라. 시나리오 봤을 때보다 인물이 잘 살아서, 비중이 커 보인다. 아무래도 하정우 선배가 존재감이 있어서 그런 느낌이다.
▶ '아가씨'가 첫 데뷔인 김태리와의 호흡에서는 아무래도 이끌어 가는 입장이었나?
- (김)태리가 나한테 좋아한다는 표현을 많이 하지만 현장에서는 자기 할 몫을 다하는 배우다. 상황도 잘 살피고. 계속 나만 따르는 건 아니다. 본인도 시간을 갖고 고민하고, 어떤 순간에는 상대를 방해하지 않아야 겠다고 생각한다. 태리가 그렇게 어린 나이가 아니더라. 이제 90년생이라고 그래서 어리게 생각했는데 스물 일곱이니까.
- 어떤 작품을 만나고, 그 안에서 어떻게 녹아나느냐에 따라 다르다. 영화마다 각각의 분위기가 있고, 캐릭터가 다 다르니까 자동적으로 그 안에서 충실하게 만들어진다. 변하겠다거나 만들겠다는 생각보다 그런 만남에 충실하면 자연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흥행이 되지 않은 작품들도 굉장히 소중하고 의미가 있다. 예전부터 똑같은 것 같다. 그 때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충실했고, 즐겼기 때문에 재밌었다.
▶ 동성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는 평소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 전부터 편하게 받아들였다.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은 사실 없다. 어쨌든 다 다양하게 사랑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다 사랑으로 인정해줘야 되는 것 같다. 만약에 여기에 거부감이 있었다면 선택할 수 없지 않았을까.
▶ 그 동안 여러 감독들과 함께 작업을 많이 했는데 박찬욱 감독과의 작업은 어땠나?
- 현장에서 이야기도 많이 필요가 없었다. 그냥 테이크마다 변화를 주고 어떤 게 좋을지 이야기를 나눴다. 미리 분석해서 촬영 전부터 이 길로 가자고 정하지 않았다. 촬영을 들어가기 전에 감독님이 '김민희 씨와 나는 현장에서 열어놓고 가자'고 하더라. 모든 장면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런 장면들이 몇 가지 있었다. 촬영 시작하면 즐기면서 여러 가지 표현을 했다. 테이크마다 미묘하게 감정이 변하니까.
▶ 원래도 자유롭고 많이 열려 있는 작업을 좋아하는 편인가? 배우 입장에서는 여러 해석과 표현을 해야 하는 것이 어려울 법도 한데.
- 대개 혼자 촬영하는 장면에서 그렇게 열려 있는 편이다. 합을 맞출 때는 아무래도 그렇게 하기 힘드니까. 다른 작품에서도 이런 기회가 있었고, 이런 식으로 작업을 많이 했다. 할 수 있는 한에서는 여러 표현을 하고 싶고, 열려 있을 때는 재미와 즐거움을 느낀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들을 잘하고 싶고, 만약 감독님이 원하는 게 정확히 있다면 그걸 충족시켜 드리고 싶다. 어떻게 보면 정확한 게 있을 때 더 고민이 되기도 한다. '화차'를 찍을 때, 감독님이 옥상으로 달려가면서 죄의식을 느낀다는 것을 표현하라고 주문을 하더라. 그 때 어떻게 해야될 지 고민을 많이 했다.
▶ '아가씨'는 아가씨 히데코를 중심으로 인물들이 서로 속고 속이는 이야기를 담았는데 실제 김민희는 진실하게 살아가는 편인가.
- '아가씨'와 유사하게 사람을 속고 속였던 경험은 생각나는 게 없다. 그냥 누구나 다 솔직하게 살고 싶어하지 않을까. 나 역시 그러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