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나는 한국이 낳은 정직한 화공이다"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6.3-10.3

돌아오지 않는 강(양면화), 종이에 유채, 18.8x14.6cm, 임옥미술관 소장(사진=국립현대미술관 제공).
40의 나이에 삶을 마감한 화가 이중섭. 그가 작품을 남기지 않았다면, 그 혼란스런 시기를 겪어온 반도의 한 남자를 누가 기억이나 할까. 그는 왜 은박지에 수 많은 그림을 그렸을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마음 속 깊은 곳의 갈망은 무엇이었을까. 1916년 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과 귀국, 일본 여성과 결혼, 한국 전쟁, 피란 생활, 가족과의 이별, 정신질환을 앓으며 무연고자로 40세에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의 삶은 신산했다.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린다. 이중섭 탄생 100년을 기념한 것이다. 이번 전시는 이중섭의 원작을 최대한 한 자리에 모아 원작을 전체적으로 감상하고 살펴볼 수 있다. 60개 소장처로부터 200여 점의 작품, 100여 점의 자료를 빌려왔다. 그의 대표적인 유화 60여 점 외에 드로잉, 은지화, 엽서화, 편지화, 유품 및 자료가 망라되었다.

이번 전시 작품들은 이중섭의 여는 전시와 마찬가지로 소와 가족, 자연물들이 다양하게 변주되며 그만의 화풍을 풍부하게 느껴볼 수 있다. 대체적인 흐름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소처럼 힘차게 일어서려는 힘, 가난 속에서도 가족들과 자연생활의 즐거움, 가족과 이별의 고통 속에서도 재회의 간절한 소망을 작품으로 표현하고 있다.

묶인 새, 연도 미상, 종이에 연필, 색연필, 개인 소장.
이런 대체적인 흐름 중에서 특이점을 보여주는 작품 몇 점이 눈에 띈다. '묶인 새'(연도 미상)는, 새를 통해 자유로움을 표출한 그의 여느 작품들과는 다른 정서를 담고 있다. '묶인 새'가 그가 처한 답답한 현실을 반영했다면, 다른 작품들 속에 자유로운 자태의 새들은 억압된 현실을 벗어나고픈 그의 열망을 표현한 것이리라.

이중섭의 작품 '세병관'(1954)도 특이하다. 그가 통영 시절(1953-1954)에 그린 작품이다. 통영시절엔 건강이 회복되어 마음이 안정되었을 때이며, 이 때 다수의 황소그림을 그렸다. 이 시기 황소그림들이 역동적이고 힘차다. 이와 달리 '세병관'은 왠지 초라하고 힘빠진 느낌이 든다. 실제 세병관의 모습은 우람한 기둥들이 넓게 펼쳐진 기와지붕을 받치고 있어 군사 훈련기관임을 실감케 한다. 그런데 이중섭의 작품에 그려진 '세병관'은 한 칸 정도의 기와지붕만 등장하고, 담장에 식물 한줄기가 서 있는 풍경이다. 나라를 지키는 군사기관을 이처럼 묘사한 것은 식민지배를 받은데 이어 전쟁의 혼란에 놓인 나라의 처지를 투영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노란 태양과 가족, 1955, 종이에 혼합재료, 개인 소장.
이중섭의 작품에서 신화적 요소들도 찾아볼 수 있다. 그가 죽기 1년 전에 그린 '노란 태양과 가족'(1955)는 숫말과 맞서는 남자, 암말을 껴안은 남자 아이, 아이의 뒷편에 선 몸집이 큰 여인, 그리고 화면 중앙 상단의 노란 태양이 등장한다. 숫말과 싸우는 남자는 외부로부터의 위기를 물리치는 것을 상징하고, 몸집이 큰 여인은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또 백조를 안은 여자 그림은 백조로 변신한 제우스가 여성(레다)에게 안기는 신화를 떠올리게 한다. 월계수 잎에 둘러싸여 월계수 꽃을 든 그리스 남자는 아폴론을 연상시키고, 활을 쏘는 남자는 헤라클레스를 연상케 한다.

'노란 태양과 가족'(1955)에서 처럼 작고하기 직전에 그린 작품들에는 '노란'이 들어간 제목이 많다. '꽃과 노란 어린이'(1955), '나무와 노란 새'(1956). 왜 어린이, 새, 태양을 '노란색'으로 표현했을까?


1955년에 그린 '소'는 뚜벅뚜벅 걸어가는 소의 형상을 그린 것이다. 몹시 마르고 지친 모습으로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늘어뜨린 얼굴의 이마에는 상처가 나서 피가 묻어있고, 바닥으로는 선연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진다. 이 피 흘리는 소는 작가가 정신병원을 오가며 고통 속에 있을 때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작가 자신이 처한 비극적 현실을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소, 1941, 종이에 연필, 개인 소장.
앞서 언급했듯이 소는 이중섭의 작품에서 다양하게 변주되는데, 통영 시절 소가 역동적이라면, 1941년에 그린 '소'는 불안정하고 놀란듯한 자세와 겁먹은 듯한 눈매가 느껴진다. 이 작품은 1942년에 도쿄에서 열린 '제 6회 미술창작가협회전'에 출품됐던 작품이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때 조선인의 상징인 '소'를 그려서 일본의 공식 전시회에 출품한 것이다. 이중섭은 "나는 한국이 낳은 정직한 화공이다"고 말했다고 한다.그의 작품 소는 조선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상징이었으리라.

이중섭이 죽기 직전에 그린 '돌아오지 않는 강'(1956,맨 위 작품) 연작은 진한 슬픔의 여운을 남긴다. 소년은 창에 턱을 괴고 어머니를 기다리고, 소년의 시선이 닿지 않은 골목길에 한복차림의 어머니가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집으로 오고 있다. 작가는 신산한 생을 마치며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리라.

이중섭이 일본인 부인과 주고 받은 편지들은 그에게 부인의 존재가 삶의 버팀목이자 예술혼의 샘물임을 실감케 한다.

가장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아내와
모든 것을 바쳐 하나가 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좋은 작품을 만들어낼 수 없어요.

독신으로 작품을 만드는 사람도 있지만,
아고리는 그런 타입의 화가는 아니에요.

이중섭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7월경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내고 홀로 남겨졌다. 이후 그는 여러 지역을 정처없이 떠돌며 가족들에게 수많은 편지를 보냈다. 처음에는 언제든 곧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즐겁고 다정다감한 편지를 많이 썼다. 특히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아들을 염려하며, 그림을 곁들인 사랑스러운 편지들을 많이 남겼다.

시인 구상의 가족, 1955,종이에 유채 32.0x49.5cm,개인 소장(사진=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시인 구상의 가족'(1955)은 시인 구상의 가족을 그린 작품이다.구상은 환한 미소로 세발 자전거를 타는 아들과 놀아주고 있고, 부인과 다른 아이는 뒤에서 행복한 부자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화면 오른쪽에 무표정한 얼굴로 물끄러미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이가 이중섭이다. 이중섭은 일본에 있는 아들들에게 '자전거를 사주겠다'고 반복해서 편지에 썼지만 그 약속을 끝내 지키지 못하고 있었기에, 이 부자가 특히 부러웠을 것이다. 악수하듯 손을 내민 이중섭은 구상의 아들을 보면서 자신의 아들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은지화는 이중섭이 창안한 새로운 기법의 작품이다. 그는 상당히 오랜 기간 약 300점의 은지화를 제작했다는 증언이 있는데, 그 중 40여 점의 수준 높은 은지화 작품이 이번 전시에 선을 보였다.

전시 기간: 6.3- 10.3
전시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전시 작품: 유화 60여 점을 비롯해 드로잉, 은지화, 엽서화, 편지화 등 200여 점
유품 및 자료 100여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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