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에게 영감을 준, 톨스토이의 그 책

신간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 톨스토이 지음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기독교는 신비의 종교가 아닌 새로운 생활의 이해다'는 톨스토이가 1891년 63세에 쓰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893년에 집필을 종료했으나 바로 검열에 걸려 러시아에서는 출판되지 못하고 1년 뒤인 1894년 독일과 영국에서 출판된 저작이다.

간디는 1894년 막 영국에서 출판된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를 남아프리카에서 읽은 뒤 비폭력운동을 시작했고, 그것은 곧 20세기의 마틴 루서 킹을 비롯한 많은 비폭력운동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이후로도 종교인은 물론 다양한 위치에서 활동하는 여러 사람들에게 국가와 종교, 진리와 자유, 평등과 평화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해주었다.


이 책에서 톨스토이는 세 가지 인생관―개인적인(동물적) 인생관, 사회적인(이교도적) 인생관, 신적인(영성적) 인생관―에 따른 인류의 발달 과정과 각 차원에 수반되었던 모순들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과연 어떻게 하면 ‘신의 나라’라고 일컫는 고차원적인 삶에 이를 수 있는지 그 길을 안내한다.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라는 제목 때문에 종교서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 책은 무조건 기독교를 찬양하는 흔한 종교서가 아니다. 오히려 국가 권력과 결탁한 부패한 기독교, 특히 종교인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제멋대로 왜곡하여 이를 널리 퍼트림으로써 군대로 상징되는 국가 권력을 어떻게 옹호하는지, 그리스도 가르침의 정수인 사랑과 용서, 평화와 평등, 폭력 거부와 무저항 등의 진리를 어떻게 변색시켰는지 보여주는 가장 반(反)기독교적인 책이다.

19세기 말 러시아 정교에서 톨스토이를 파문시킨 것도 이해 가능한 일이다. 톨스토이가 이 책에서 예수의 가르침에 따르면 가능해진다고 하는 ‘새로운 생활’이란 곧 비폭력 무저항, 반(反)권력의 자유와 평등 및 평화의 삶을 말한다. 그것은 모든 폭력 특히 전쟁을 거부하는 삶이며, 군대에 가거나 무기를 드는 것조차 거부하는 삶이고, 국가기구와 관련된 모든 법제와 억압을 거부하는 삶이다. 그러므로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는 톨스토이가 당대 러시아의 국가 종교였던 기독교를 비판하면서 국가의 무용성과 아나키즘을 강조한 책인 동시에 그가 개인적인 삶의 문제를 다루었던 '나의 신앙은 어디에 있는가?'를 잇는 사회적 확대판이자 학문ㆍ예술ㆍ사회ㆍ문화ㆍ경제 등 세상사 전반에 걸친 톨스토이 사상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여주는 저작이라 할 수 있다.

톨스토이는 ‘신의 나라’가 ‘네 안에 있다’고 말한다. 천국이나 천당이 있다면 그것은 곧 나의 실천, 나의 생활, 나의 삶 속에 있는 것으로, 이는 우리의 삶을 바꾸지 않으면 도무지 접근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즉 기독교를 아무리 열심히 믿는다 해도 각자의 삶이 그대로라면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은 삶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의 내용은 ‘기독교는 신비의 종교가 아닌 새로운 생활의 이해’라는 부제와 함께 생각할 때 한층 명확해진다. 핵심 내용인 ‘권력에 대한 비폭력 저항’의 문제 역시 신의 존재나 하늘나라의 유무와 관계없이 “새로운 삶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와 연결되는 탓이다. 톨스토이는 위선과 억압으로 자신과 세상을 더럽히지 말고, 그리스도의 본래 가르침에 따라 각 개인이 사랑과 평화ㆍ평등의 관계를 유지하며, 병역의무나 전쟁ㆍ사형과 같은 국가 권력에 봉사하지 말고, 사리사욕을 채우는 탐욕에서 벗어나야만 ‘새로운 생활’에 이를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 점은 그가 ‘산상수훈’과 ‘사도신경’ 간의 모순을 지적하는 일련의 기독교적 논의에 대한 비판, 날아가고자 애쓰는 벌 떼의 비유, 그리고 무력하게 징병당한 러시아 민중의 예 등에서 가감 없이 드러난다.

책 속으로

애국적 미신은, 인민으로부터 거두어들인 돈으로 국경일 행사라든지 구경거리, 기념물 제작이나 축제 등 행사들을 벌여 인민이 자신의 국가와 통치자들의 권위를 느끼고 이에 중요성을 부여하도록, 그리고 자기 국가를 절대적으로 우월하다고, 자국과 그 통치자들이 위대하다고 인식시키며, 다른 국가에 대해 반목하고 증오심을 느끼도록 유도하고 장려하는 제반 행동에 있다.
이런 목적을 가진 독재 국가에서는 인민을 계몽하는 책을 인쇄하거나 배포하거나 연설하는 것을 금지하게 마련이다. 인민을 무감각으로부터 깨우려는 사람은 누구든 추방되거나 투옥된다. 어디 그 뿐인가? 모든 국가에서 예외 없이 인민을 해방하여 자유롭게 만들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억제되고, 인민을 부패하게 만드는 것은 도리어 장려된다. 가령 종교적 및 애국적 미신 같은 야만주의에 그들을 묶어두는 것은 문학 작품, 모든 종류의 감각적 오락, 구경거리, 서커스, 극장, 그리고 심지어 중독을 초래하는 담배나 술 같은 육체적 수단 같은 것인데, 이것들은 대개 국가의 주된 수입원이다. 심지어 매춘도 인정되고 장려될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국가가 앞장서 조직하기도 한다._8장 [폭력을 사용하는 네 가지 방법_협박, 매수, 최면, 군사적 강압] 중에서

국가 권력을 옹호하는 자들은 “국가의 권력이 폐지된다면, 더욱 악한 자들이 덜 악한 자들을 억압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집트인이 유대인을 정복했을 때, 페르시아인이 이집트인을 정복했을 때, 마케도니아인이 페르시아인을 정복했을 때, 로마인이 그리스인을 정복했을 때, 바바리아가 로마인을 정복했을 때를 떠올려보라. 그 모든 정복자들이 언제나 피정복자들보다 선량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나의 국가 안에서 어떤 한 개인으로부터 다른 개인으로 권력이 전환될 때도 마찬가지다. 권력이 언제나 더 나쁜 사람에게서 더 좋은 사람에게로 옮겨졌는가? 루이 14세가 제거되고 로베스피에르가, 그리고 그 뒤 나폴레옹이 권력에 올랐을 때 과연 어떤 자가 통치했는가? 더 선량한 사람이었는가, 아니면 더 나쁜 사람이었는가? 그리고 과연 언제 선량한 자가 권력을 쥐고 있었던가? 베르사이유 당인가 아니면 파리코뮌이 권력을 차지했을 때인가? 아니면 찰스 1세가 통치자일 때인가, 아니면 크롬웰이 정부 수반이었을 때인가? 표트르 3세가 차르였던 때인가, 아니면 그가 살해되고 예카테리나 2세가 러시아의 절반을 통치하고 푸가초프가 나머지를 통치할 때인가?
그렇다면 어느 쪽이 악랄한 쪽이고 어느 쪽이 선량한 쪽인가? 권력을 차지하게 되는 모든 자들은 그들의 권력이 악한 자들이 선한 자들을 억압하는 것을 막는 데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은 월등히 선한 자로서 다른 선한 사람들을 악한 자들로부터 보호한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통치는 결국 폭력을 가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자기보다 약한 사람 위에 군림하겠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힘을 사용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자신에게는 그런 힘이 행해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결국 통치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행하는 것을 우리가 원치 않는 것, 즉 악한 일을 다른 이들에게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_10장 [가장 악한 자는 권력자다] 중에서

어린이의 의식이 가장 먼저 일깨워질 때부터 교회는 그를 속인다. 그들 스스로도 믿지 않는 것을 최고의 엄숙함으로 포장하여 어린이들에게 주입시키고, 이것이 어린이의 본성 안에 습관으로 고착될 때까지 계속해서 주입하고 또 주입한다. 즉 그들은 매우 교묘하게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에 대하여 어린이를 기만하고, 그 기만이 어린이와 함께 자라게 하여 그것을 뿌리 뽑기조차 어렵게 만든다. 물론 그런 다음 그들에게 전체 세상의 학문과 현실을 보여주지만, 이것은 결코 어린 시절 이미 주입된 믿음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교회는 이제 인민들 각자가 이러한 모순으로부터 최선을 다해 자기 길을 찾아가도록 책임을 돌려버린다.
만일 우리가 어떤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들려면, 특히 어린 시절부터 그에게 주입한 두 가지 반대되는 이론 때문에 영혼이 혼미하여 명확하게 판단하지 못하게 만들거나 생각 자체를 할 수 없게 만들려면, 어린 시절부터 기독교 사회에서 교육받도록 권유하면 된다. 아마 이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을 것이다._3장 [교회의 최면술과 기만술] 중에서

압제자의 입장도 다르지 않다. 비록 스스로는 원한다 할지라도 압제자들은 압제를 끝낼 수 없다. 그들이 압제의 강도를 늦추는 그 순간에 바로 그들 스스로가 멸망하리라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노동 계급의 복지, 8시간 노동제, 연소자와 여성의 노동, 저축은행과 연금에 대해 배려해주는 척하면서 한편으로 압제를 늦추지 않는다. 이 모든 기만은 그저 사탕발림이거나, 노예들이 그들의 일을 무리 없이 해낼 수 있도록 제자리에 잘 묶어두려는 제스처일 뿐이다. 그러나 노예는 여전히 노예이고, 노예 없이 살 수 없는 주인은 이전보다 더욱 단단하게 그를 얽매고자 한다. 노예를 자유롭게 풀어줄 마음을 가진 주인은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노동자에 대한 지배 계급의 태도는 적을 땅에 넘어뜨린 뒤 꽉 붙잡고 있는 사람의 태도와 같다. 그러나 이는 그에게 적을 붙잡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다. 단 1초라도 적에게 자유를 허용할 경우, 손에 칼을 든 채 성이 잔뜩 난 적이 자신을 찔러 죽일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_5장 [빈부 갈등의 경제적 모순] 중에서

톨스토이 지음/박홍규 옮김/들녘/504쪽/1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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