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곳, 즉 과거로 도피한다"

신간 '추억에 관한 모든 것: 향수의 심리적 효능과 경제적 가치에 대하여'

내일 일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미래는 꿰뚫어볼 수 없는, 기분 나쁜 성질을 갖고 있다. 인간은 이런 불확실성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곳, 즉 과거로 도피한다. 우리는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디에서 왔는지는 알고 있다고 믿는다. 프레드 데이비스와 하비 캐플런, 팀 와일드슈트는 우리가 더 좋은 기분을 갖기 위해 향수에 빠져든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130쪽

신간 '추억에 관한 모든 것'은 기억과 향수의 흥미로운 세계를 역사, 과학, 의학, 경제학의 맥락에서 탐사하는 여행기이다. 독일 경제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다니엘 레티히는 우리가 추억에 빠지는 이유와 향수의 심리적 기능, 기억이 현재와 미래에 행사하는 위력에 이르기까지 해박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사실을 말하자면, 노스탤지어는 치명적인 질병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젊은 군인을 주저앉히고 순박한 소녀를 살인과 방화범으로 몰고 가는 마음의 병. 이렇듯 불가해한 골칫거리이던 노스탤지어는 어떤 연구와 발견을 거쳐 영혼을 위한 비타민이 되고, 사람들을 위로하며 육체적 건강을 증진시키는 묘약으로 거듭났을까? 뇌과학자들은 기억이 자리잡고 새로이 일깨워질 때 우리 뇌에서 벌어지는 놀라운 현상을 추적해냈다.

신경학자들은 기억이 향수로 변하는 토대를 발견했으며 의학자들은 냄새와 맛, 소리로도 되살아나는 추억의 효능을 이용해 나이든 노인과 우울증 환자, 현대인의 여러 병증을 치료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인 것은 시장이었다. 경제학자와 마케팅 연구자들이 향수가 구매 결정에 미치는 위력을 확인하자마자 기업과 미디어는 관련 제품과 노래와 광고를 발 빠르게 만들어 이익을 챙기기 시작했다.

‘지나간 삶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두 번 사는 것과 같다.’ 로마 시인 마르티알리스는 말했다. 추억의 가치를 일찌감치 간파한 것이다. 이 책 '추억에 관한 모든 것'은 우리가 왜 그리도 ‘좋았던 지난 시절’을 즐겨 반추하는지, 그때 그 시절의 노래와 영화와 이야기를 소환하는 게 지금 내 삶에 끼치는 실질적 영향은 무엇인지, 문득문득 떠오르는 기억들은 우리의 미래에 어떤 메시지를 주는 것인지를 재미있게 분석한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향수병, 즉 ‘노스탤지어’라는 단어를 처음 고안한 사람은 스위스 의학자 요하네스 호퍼였다. 1688년, 박사 논문을 준비하던 호퍼는 ‘믿을 만한 사람’으로부터 세 가지의 특이한 질병 사례를 들었다. 바젤에서 공부하던 대학생과 파리에서 하인으로 일하던 스위스 청년, 그리고 낯선 타지 병원에서 치료받던 여성이 공통적으로 앓던 병. 의욕 저하에 시달리다 몸까지 쇠약해진 셋의 공통점은 고향을 몹시 그리워한다는 점이었다. 다행히 의사를 잘 만나 귀향한 덕에 세 환자는 모두 치료되었다. 호퍼는 이 이야기에 매혹되었고, 명명되지 않은 이 질병에 대해 그럴듯한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 궁리 끝에 찾아낸 단어가 ‘nostalgia.’ 그리스어로 ‘nostos’는 ‘귀환’을 의미하며 ‘algos’는 ‘고통’이다. 그러니까 노스탤지어는 ‘귀환의 고통’을 뜻한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이후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향수병은 용맹하던 스위스 용병과 나폴레옹 군사, 미국 남북전쟁 당시 북부 군인을 괴롭힌 골칫거리이자 선량한 소녀들을 살인범으로 몰아가는 정신병이란 오명에 시달렸다.

칸트와 야스퍼스 같은 철학자들까지 달려들면서 이 증상에 관한 연구는 진전을 거듭했고 사회학과 심리학, 과학과 의학이 가세하며 획기적인 시각 전환이 이루어졌다. 무엇보다 향수는 병이 아니라 약이라는 사실, 슬픔과 우울이 아니라 기쁨과 위로를 선물한다는 점이 학문적으로 규명되었다. 인간은 언젠가 늙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우리 삶이 마주한 이 본질적 무상함을 향수가 어떻게 상쇄해주는지, 실수와 실패에 대한 기억이 인류를 어떻게 단련시켰는지, 맛과 냄새와 소리를 통해 일깨워지는 기억이 진화론적으로 얼마나 유의미한지가 드러났다. 뇌과학자와 신경학자들은 첨단 과학기술의 도움을 받아 사실이 기억의 서랍으로 들어갔다가 추억으로 인출되는 과정, 그것이 향수를 유발할 때 우리 뇌의 어느 부위가 활성화되고 어떤 호르몬이 뿜어져 나오지를 확인했다. 잘못된 기억이 생기는 이유, 온갖 첫 경험이 왜 그리도 강력하고 즉각적인 방식으로 추억을 일깨우는지도 과학적으로 규명되었다. 심지어 데이비드 스노든 같은 의학자는 장기간의 추적조사를 기반으로 삶에 대한 긍정적 회상이 우리 수명을 연장시킨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그리하여 2007년 스위스 작가 페터 폰 마트는 이렇게 단언했다. “기억을 잃은 사람은 정신적으로 죽은 것이다. 그 사람은 더 이상 미래를 도모할 수 없다. 미래를 창조한다는 것은 과거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추억의 위력은 이제 우리의 의식주를 구성하는 상품에도 영향력을 행사한다. 고향과 근원, 순수와 신뢰에 대한 대중의 욕구를 건드린 TV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부모세대에 유행했던 노래가 리바이벌된다. 자동차 회사는 첨단기능을 장착한 신제품 외양을 초기 모델을 연상키는 곡선으로 마무리하고, 광고는 20년 전 히트했던 CM송을 세련되게 재가공한다. 기업의 ‘추억 만들기’가 늘 옳은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안하고 변덕스런 이 시대에 가장 강력한 무기임에는 틀림없다고 연구자들은 입을 모은다.

이렇듯 추억은 우리 삶 도처에 존재하고, 우리 생각과 대화를 형성하며, 결정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게다가 지금 나의 현실이 좋든 싫든, 그 모든 것은 미래 우리 기억과 추억의 일부로 남는다. 현재가 어떤 기억으로 남든, 그건 전적으로 우리 몫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마르케스만큼 그것을 적절하게 표현한 사람도 없다. “지나갔다고 울지 마라. 경험했으니 미소를 지어라.”

책 속으로

하비 캐플런의 견해에 따르면, 향수병은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처음으로 깊이 자각하는 젊은 시절에 시작된다. 기억은 적어도 청춘의 일부를 성인이 된 후에도 보존시켜 준다. 여기서는 향수가 설명이고 증상이며 동시에 약이다. 향수는 우리가 특정한 감정을 느끼고, 제품을 구매하며 방송을 보고, 옷을 입으며 대화를 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97쪽

나이가 들어갈수록 아름다운 것이 있다. 몸은 더 이상 예전처럼 말을 듣지 않고 정신도 점점 희미해진다. 알츠하이머나 치매 같은 병이 오고 기억은 사라진다. 생명의 불빛이 희미해지면 더욱 그렇다. 로사토 베넷의 영화와 자나타의 실험은 우리의 기억력이 아무리 약해지더라도 음악이 언제든 우리를 과거로 보내준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물론 향수가 얼굴, 대화, 장소, 물건, 냄새, 소리 가운데 어떤 것에 의해 유발되든 아름다운 기억이라고 해서 꼭 완벽한 것은 아니다. 그 기억이 사실인지도 확신할 수 없다. 우리 기억력은 때로 원하는 대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것도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 -247쪽

향수는 그만큼 강력하다. 우리는 입증된 것과 알고 있는 것에 기대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복잡함을 줄이고 불확실성을 감소시키며 정신적인 긴장을 누그러뜨리고 실망의 위험성을 낮추기 때문이다. 사실 현재를 살아가는 것 자체도 충분히 부담이 되지 않는가. 그런 우리에게 이미 알고 있는 상표와 제품은 신뢰와 안정감, 방향성을 제공하는데, 그것들이 감정 또는 아름다운 기억과 연결되어 있으면 특히 더 그렇다. 심지어 향수의 치료효과는 정량화할 수도 있다. -308쪽

“사람들은 과거를 찾아가고 싶어하지만 그곳에서 살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복고는 최상의 과거와 최상의 현재를 결합해 이를 하나의 매력적인 마케팅 패키지로 묶는다.” 브라운의 결론이다. 미국 마케팅 교수 필립 코틀러도 향수를 연구했다. “재유행과 복고 제품은 모든 것이 더 평온했다고 생각되는 시대에 대한 동경을 구체화한다.”고 그는 말한다. -336쪽

다니엘 레티히 지음/ 김종인 옮김/ 황소자리/ 372쪽/ 1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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