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11월 19일 전국대학의 휴교령이 해제되면서 학생들과 시민들의 시위가 연이어 벌어졌다.
당시는 10.26 사태가 일어나기 며칠 전인 10월 18일에 이미 마산 민주항쟁 학생시위와 관련해서 부산에 비상계엄령이 발동되었던 때였다.
이처럼 어수선한 가운데 그 해 12월 12일에 군사반란이 발생하면서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강제 연행되었는가 하면, 해가 바뀐 1980년 5월 14일에는 광주 지역 대학생 등 1만여 명이 가두진출을 하면서 전남 도청광장에서는 민주화 성회가 열렸다.
이 소식이 언론을 통해 전국에 알려지자, 5월 15일에는 서울역 광장에 학생과 시민 20여만 명이 운집해 계엄철폐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등 시위가 절정에 이르렀다.
그렇게 되자 1980년 5월 17일 오후 9시 40분 비상국무회의가 열렸고, 곧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됐다.
일요일이었던 5월 18일 오전 계엄군에 의해 전남대생 50여 명이 교문 앞에서 등교를 저지당하자, 이에 항의하는 학생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 "계엄령 해제하라", "휴교령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는 항의 시위대와 계엄군이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윽고 그날 오전 10시 15분, 곤봉을 휘두르는 공수부대원들의 진압으로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 광경을 목도한 시위대는 "금남로로 가자"라는 구호와 함께 금남로로 이동했고, 오후 3시 40분에는 유동 3거리에 공수부대가 등장하면서 학생시위에 대한 진압작전이 감행됐다.
이 때 광주 금남로 카톨릭 회관에 연주소가 있었던 CBS광주방송은 이러한 사태를 예의 주시하고, 홍영표 국장의 지시에 따라 그보다 하루 먼저인 5월 17일 오후 2시에 송신소와 기술부 직원들인 연주소에 모여 각 기기를 보수하고, 비상사태에 따른 방송 거부 계획에 대해 논의를 했다.
5월 19일 월요일이 되자, 증원된 11여단 병력이 광주에 도착해 시내 곳곳에서 시위군중와 대치하더니 이윽고 무자비한 진압작전이 시작됐다.
그 이후 CBS광주방송은 계엄사의 일방적 지시에 의한 보도방송을 거부하기 위해 지역방송을 전면 중단하고 서울의 중앙국 프로그램을 중계했다.
5월 20일 낮에는 광주KBS가, 21일 밤에는 광주MBC 사옥이 분노한 시위군중들의 방화에 불에 탔다.
시위군중이 방송국들을 불태운 것은 사실보도를 하지 않고 계엄군에 유리한 방송을 한다는 이유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