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이 보고 듣고 겪은 5·18 당시 정국은 그의 저서 '나의 한국현대사: 1959-2014, 55년의 기록'(돌베개·2014)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돼 있다.
유시민은 5·18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 대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목숨을 잃은 10·26사건에서부터 설명하고 있다.
"1979년 10월 27일 새벽이었다. 서클 공부방으로 쓰던 봉천동 꼭대기 달동네 자취방에서 '대통령 유고'와 '계엄령 선포'를 알리는 라디오 뉴스를 들었다. 박정희가 죽었다! 우리는 기쁨에 넘쳐 서로를 얼싸안았다. 처마 밑에 조기를 달던 집주인 아주머니가 싱글벙글하는 우리를 나무라셨다. '학생들 너무 좋아하진 마. 그래도 사람이 죽은 거잖아.' 그렇지 않아도 찜찜하던 참이었다. 독재자도 사람이 아닌가. 사람이 죽었다는데 기뻐하는 것은 왠지 인간적 도리에 어긋나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일그러진 시대였고 내 마음도 그렇게 일그러져 있었던 것이다." (222쪽)
그의 설명은 민주화에 대한 국민적 열망에 찬물을 끼얹은 12·12군사반란으로 이어진다.
"11월 하순 휴교령이 풀린 후 학생회 부활을 준비하는 과대표 회의에 갔다. 3학년 대표가 궐석이어서 2학년 대표였던 내가 경제학과 대표로 간 것이다. 학교에 상주하던 경찰 병력이 보이지 않았다. 회의를 한 강의실에 학생처 직원도 사복형사도 나타나지 않았다. 늦은 밤 회의를 마치고 비탈길을 내려오면서 크게 소리 질렀다. '자유다! 만세!' 곧 좋은 세상이 올 것 같았다. 하지만 섣부른 기대였다. 어느날 자취방에 모여 공부를 하기로 했던 서클 친구들이 자정이 다 되어서야 나타났다. 한강대교가 봉쇄되어 버스기사가 양화대교 쪽으로 돌았는데, 거기도 막혀 있어서 걸어왔다는 것이다. '쿠데타가 난 거야! 그렇지 않으면 한강 다리가 막힐 리 없지!' 1979년 12월 12일 밤이었다. 며칠 후 우리는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박희도, 장세동 등 소위 신군부가 반란을 일으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고 군권을 장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222, 223쪽)
유신독재체제에 맞서 싸우며 민주화를 갈구해 온 학생들이 가만히 넋놓고 있었을 리 없다. 유시민은 이듬해인 1980년 5월의 어느 날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980년 5월 15일 오후, 나는 서울역 광장에 있었다. 몇만 명인지 모를 대학생들이 대오를 맞추고 앉아 있었다. 광장 가장자리와 인근 고가도로는 구경하는 시민들로 빼곡했다. 그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그저 구경만 했다. 내가 느끼기엔 그랬다. 경찰은 남대문 근처 도로를 차단했다. 해가 기울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광장에서 자유와 정의,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대한민국을 상상했다. 마음이 아찔하게 설레었지만 한편으로는 겁이 났다. 이 혼돈에서 도대체 무엇이 나올까? 피가 강물처럼 흐르고 주검이 산더미를 이루는 끔찍한 비극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223쪽)
◇ "막 내린 '서울의 봄'…광주에서만 시민이 참여하는 도시봉기가 일어났다"
"전두환 보완사령관 겸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이 중앙정보부장까지 겸직한 것을 대학생들은 정치군인들의 정권장악 의사표시로 간주했다. 대학가에서 전면투쟁론이 고개를 들었다. 5월 초부터 전국 주요 대학 학생회는 신입생들의 병영집체훈련 거부투쟁을 접고 비상계엄 해저를 요구하는 정치투쟁을 시작했다. 그리고 5월 14일과 15일 전국에서 동시다발적 거리시위를 벌였다. 이것은 사실상 대학생들만의 투쟁이었다. 시민들이 적극 참여하지 않았다. 본대 없이 선봉대 혼자 싸운 것이다." (232쪽)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감행한 일보후퇴로서 서울역 회군은 예상치 못했던, 아니 어쩌면 이미 예정돼 있었을지 모를 결과를 낳게 된다. 5월 17일 밤 신군부가 전국 주요 대학에 계엄군을 투입함으로써 학생시위가 막을 내린 것이다. 유시민은 당시 자신이 붙잡혀 가던 광경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건장한 남자들이 쇠사슬로 묶어둔 학생회관 4층 복도 현관문을 뜯어내고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공주사대 총학생회에서 온 전화였다. '여기에도 계엄군이 진입했으니 빨리 피하세요!' 그렇게 외치고 돌아서는데 이단옆차기가 날아왔다. 허벅지를 밟혔다. 이마에 닿는 권총 총구가 서늘했다. 나는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에 편입되어 있던 경찰청 특수수사대로 끌려갔다. 계엄군은 교정과 기숙사에 남아 있던 모든 사람을 소총과 몽둥이, 군홧발로 짓밟았다. 모든 대학 교정에서 비슷한 상황이 펼쳐졌고 '서울의 봄'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229쪽)
그렇게 "휴교령이 내릴 경우 연속적·동시다발적·전국적 시위를 벌이기로 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고 유시민은 전하고 있다. "유일하게 약속을 지킨 곳이 광주였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그곳에서만 시민이 참여하는 도시봉기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광주민중항쟁의 시작은 1979년 10월의 부마항쟁과 비슷했다. 김영삼 총재에 대한 정치적 박해가 부마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것처럼 신군부가 김대중 씨를 체포한 것이 광주 시민들의 격분을 불러일으켰다. 5월 18일 오전부터 전남대 앞에서 학생과 계엄군의 충돌이 시작되었다. 계엄군이 학교 밖으로 나와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것을 본 시민들이 시위에 합세하면서 도시 전체가 궐기했다. (중략) 공수부대는 시내 곳곳에서 대검을 장착한 소총과 '충정봉'이라는 박달나무 몽둥이로 마구잡이 폭력을 휘둘렀다.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하자 시위는 더 확산되었다. 계엄사는 더 많은 특전사 병력을 광주로 보냈다." (232쪽)
◇ "곧바로 사람을 향해 총을 쏘았다…거리는 순식간에 피바다로 변했다"
"5월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정문 앞에 진 치고 있던 제11공수여단 병력이 갑자기 흘러나온 애국가 연주에 맞추어 일제히 M16소총과 M60기관총을 공중으로 발포했다. 그래도 시위대가 흩어지지 않자 곧바로 사람을 향해 총을 쏘았다. 전일빌딩, 상무관, 수협 전남지부 건물 옥상에서는 저격수들이 조준사격을 가했다. 그것은 명령에 따른 조직적·계획적 집단발포였다. 5월 19일과 20일에도 제11공수여단과 제3공수여단 병력이 권총과 M16을 발포해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나왔지만 그것은 산발적·돌발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도청 앞 발포는 달랐다. 거리는 순식간에 피바다로 변했다. 분개한 시민들은 광주 시내뿐만 아니라 나주, 화순, 장성, 영광, 담양 등 인근지역 파출소와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해 카빈소총과 M1소총을 확보했고 화순탄광의 다이너마이트를 반입했다." (233쪽)
"시민들이 먼저 총을 쏘았기 때문에 자위권 차원에서 발포했다는 신군부의 주장은 거짓이었다"고 유시민은 강조하고 있다.
"군의 모든 기록 가운데 최초로 등장하는 무기탈취 사례는 광주 전투교육사령부 '작전상황일지'에 기록된 5월 21일 오후 1시 35분 전남 '화순파출소 무기 피탈'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특전사가 전남도청 앞에서 발포를 할 때에는 시민들에게 총이 없었다. 시민들이 무장항쟁을 시작하자 경찰관들이 사복으로 갈아입고 광주를 빠져나갔고 특전사 병력은 외곽으로 이동해 광주의 교통과 통신을 차단했다. 그들은 인근 도시로 가는 국도에서 광주를 빠져나가는 민간차량을 저격하고 주둔지 인근의 민가에 총을 쏘았다.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해 많은 시민이 죽었다. 다른 도시에서는 대중투쟁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신군부는 모든 화력을 광주에 집중했다. 특전사 3개 여단 3,500명, 보병 20사단 5,000명, 광주 전투교육사령부 소속 병력 1만 2,000명 등 무려 2만이 넘는 병력을 광주시 일원에 투입한 것이다."
당시 '해방구'로서 광주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유시민의 기록을 따라가보자.
"도청을 점령한 시민군은 부대를 편성하고 치안질서를 유지했으며 시민들은 그들에게 음식과 물을 제공했다. 시민자치에 들어간 광주시내는 평온했으며 범죄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병원에는 헌혈 신청자들이 줄을 섰고 도청 공무원들이 다시 출근했다. 지역사회 원로들이 수습대책위원회를 만들어 광주 상무대에 있던 전남북 계엄분소를 방문했다. 그러나 계엄사는 협상자체를 거부했다. 광주항쟁에 대한 소식은 닷새째인 5월 22일에 가서야 석간 '동아일보'가 처음으로 보도했다. 그 닷새 동안 광주는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으며 국민들은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234, 235쪽)
◇ "1987년 6월 민중항쟁은 사실상 광주민중항쟁의 전국적 확대판이었다"
"신군부는 광주 시민을 폭도로 규정했고 계엄군은 광주시를 포위했다. 5월 27일 새벽 계엄사는 6,000여 명의 병력을 투입해 광주를 탈환하는 '상무충정작전'을 전개했다. 도청을 중심으로 최후의 항전을 준비한 시민군은 카빈총과 M1소총을 든 157명뿐이었다. 계엄군은 전남도청에서 윤상원 씨를 비롯한 열세 명을 사살하고 100여 명을 체포했다. 또 다른 거점이었던 광주공원과 전일빌딩도 손쉽게 점령했다. 그들은 도청 앞 상무관에 있던 광주 희생자들의 시신 129구를 덤프트럭에 싣고 가서 망월동 산비탈에 묻었다. 5·18유족회의 집계에 따르면 항쟁 당시 사망자는 166명, 행방불명 65명이었다. 부상 후 사망자는 400명이 넘는다. 군경 사망자는 27명이었는데 군인들끼리 벌인 오인전투 사망자가 많았다. 계엄사는 광주항쟁과 관련하여 무려 2,500명이 넘는 시민과 대학생을 체포해 600명 이상을 검찰에 송치했다." (235쪽)
유시민은 "광주민중항쟁은 민주주의 정치혁명의 가능성과 당시 민주화운동의 현주소를 명료하게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전제정치를 타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연속적·동시다발적·전국적 도시봉기라는 것, 그리고 아직 대한민국 국민은 그 과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라는 게 그 이유다.
"참혹한 패배로 막을 내린 광주민중항쟁은 많은 국민의 가슴에 깊은 죄책감을 남겼다. 신군부가 광주에서 무자비한 살상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지역 시민들이 계엄군의 폭력에 굴복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1987년 6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어느 지역도 고립되지 않는 전국적 도시봉기를 정밀하게 기획하고 준비했다. 광주 시민들만 고립의 아픔을 겪게 만든 1980년 5월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6월 민중항쟁은 사실상 광주민중항쟁의 전국적 확대판이었다." (235, 2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