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장문석은 자본주의가 17세기 유럽에서 태동할 때부터 지금까지 가족·국가·종교 등 ‘자본 아닌 것’을 보호하며 자신의 효율성과 정당성을 갖춰왔다고 주장한다. 특히 산업화 유럽의 후발주자였던 이딸리아의 기업가들은 선발국의 산업발전을 따라잡고 싶어하면서도 기존의 사회적 갈등과 계급투쟁을 회피하거나 우회하고자 했다. 말하자면 자본주의 ‘따라잡기’(경제발전)와 ‘길들이기’(사회통제)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고자 한 것이다. 이를 위해 그들은 가족·공동체·국가 같은 비자본주의적 요소와 온정주의·왕조주의 같은 구시대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포용했다.
이 책은 이딸리아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자본주의가 아닌 요소들이 동원되고 활용된 사례를 다양하게 제시하면서 경제는 경제가 아닌 것과 공존하고, 자본주의는 자본주의가 아닌 것과 공존하며 서로 복잡하게 얽혀 발전해왔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이 책의 서장은 하나의 물음으로 시작한다.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자본주의는 무한경쟁의 시장경제 속에서 기업가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혁신을 주도하고 이윤을 획득하는 사회경제체제”(26~27면)다. “자본주의라는 드라마의 주인공”은 자본가가 아니라 ‘기업가’이며 기업가는 그 드라마의 “연출자”(35면)이기도 하다. 기업가는 주인공으로서 자본주의를 따라잡으려 하고 연출자로서 자본주의를 길들이려 하는 속성을 지녔다. 따라서 이 책의 역사적 사례들은 두가지 프레임, 즉 ‘자본주의 따라잡기’와 ‘자본주의 길들이기’라는 틀로 직조된다.
본론에서는 자본주의가 과거로부터 전수한 비자본주의적인 다양한 제도 및 가치와 복잡하게 뒤섞이며 발전해온 과정을 시대별로 다룬다. 제1장은 이딸리아 산업화 당시의 논쟁을 다수파의 견해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로마뇨시(G. D. Romagnosi)로 대표되는 다수파 지식인들은 계급적 탐욕과 증오를 유포하는 영국식 경제발전이 문명국의 본보기가 아니므로, 빈민들을 대도시에 집중시키지 않으면서 농업과 산업의 병행발전에 기초한 새로운 산업화 모델을 개발하고 추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들은 도시의 계급투쟁을 우회하면서 산업의 발전과 통제를 나란히 이끌어내는 또다른 자본주의를 꿈꾸었다.
제2장에서는 ‘산업봉건제’로 표현되는 ‘산업 온정주의’에 대한 담론과 실천을 다룬다. 산업 온정주의란 기업가와 노동자의 관계를 계약에 따른 착취관계가 아니라 온정에 기초한 부모와 자식 관계로 보면서 자본의 발전과 노동자 복지를 동시에 추구하려는 이념이다. 로시(A. Rossi)는 19세기 이딸리아에서 가장 큰 모직물기업을 세운 기업가로, 산업 온정주의의 이념을 원대하고도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이를 몸소 실천한 드문 사례다. 로시를 비롯한 기업가들은 이러한 산업 온정주의에 기초한 이상적 공동체를 야심차게 구상했다.
‘가족기업’은 이딸리아의 산업 온정주의를 대표하는 키워드다. 제3장은 ‘산업왕조’로 대표되는 가족기업에 대한 담론과 실천을 살핀다. 이딸리아 자본주의에서 가족기업이 차지하는 위상은 어느 나라보다 각별하다(20세기 유럽 각국의 가족기업 비율은 이딸리아 75~95%로 영국 75%, 스웨덴 90% 이상, 독일 80%에 비해 월등하다). 다만 가족기업 모델은 미국 식의 효율적 경영자본주의 모델을 배제함으로써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는 후진적 산물로 간주되어왔다. 여기서 저자는 가족기업이 경영기업에 비해 열등하다는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각종 통계수치를 통해 가족기업이 경영기업 못지않
게 생존력과 지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군의 역사가들은 여기에 더해, 가족기업이 거래비용과 정보비용을 절감하고 급속하게 변화하는 시장에 기민하고도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기업 형태일 수 있고, 기업이 실제 어떠한 형태로 발전하는가의 여부는 기업이 처한 사회의 제도적·문화적 환경에 의해 규정된다고 주장한다. 즉 어떤 사회에서는 경영기업이 유리할 수 있지만, 다른 사회에서는 가족기업이 경영기업보다 더 우월한 기업 형태일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딸리아의 경우 산업봉건제로 표현되는 산업 온정주의와 산업왕조로 대표되는 가족기업은 잘 어울리는 한쌍이다. 다만 이것이 한국을 비롯한 후발자본주의 국가들이 참조할 모델일까. 실제 이딸리아의 가족기업 대다수가 3대를 넘기지 못하고 명멸해갔으며, 또한 주주가치 상승이라는 단기성과만을 추구하게 되는 근래의 기업 현실에 비춰 기업과 국가의 장기성장 전략의 체계화가 주요 과제로 남는다.
자본주의에 대한 파시스트들의 태도는 어땠을까. 파시즘의 성격 규명을 둘러싸고 연구자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동의 논쟁’ ‘근대성 논쟁’)이 벌어질 정도로 파시스트가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관점은 복잡하고 이율배반적이다. 제4장은 ‘파시즘과 자본주의’의 관계를 둘러싼 연구사를 본격적으로 파헤친다. 파시스트 체제가 이중적(물질적·도덕적) 의미에서 대중의 동의를 획득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그간 강력한 반론들이 제기되어왔다. 하지만 저자는 파시즘에 대해 실제로 어느정도 동의가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는 점, 또한 파시즘을 근대성의 정반대인 후진성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 등을 소개하며 공정한 진단을 요청한다. 여기서 핵심 쟁점은 근대성과 후진성 사이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근대적인 것과 후진적인 것 사이의 정확한 융합양식’을 가려내는 일이다. 즉 낡은 사회체제와 새로운 권력체제가 혼합되어 근대성과 후진성이 공존하고 늘 타협과 절충을 통해 문제가 해결되어온 당대 이딸리아 정치문화에 비춰 그 독특한 양상과 자본주의의 연계를 주목해야 한다.
무솔리니와 파시스트들은 대공황 이후 자본주의적 물질문명에 대해 정서적 거부감을 느끼며 다양한 방식으로 자본주의를 길들이려 했다. 제5장에서는 파시즘을 통한 자본주의 길들이기가 과연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그 담론과 실천을 따라가며 살펴본다. 무솔리니는 기업가들에게 체제에 반항할 경우 하루아침에 몰락할 수 있음을 본보기로 보여주기도 했다. 한편 기술과 전통을 동시에 추구한 자동차기업 알파 로메오는 파시즘에 의해 가장 이딸리아적인 기업으로 간주되었다. 당시 거대 기업 피아트와 경쟁했던 알파 로메오는 피아트처럼 대규모 노동자를 한 공장에 집중하지 않고 소수의 숙련공으로 작업하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근대기술을 열렬히 찬양하면서도 기계문명을 완강히 거부하는 파시즘에 이상적인 기업이었다. 무솔리니가 실제로 알파 로메오 자동차를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일화도 소개된다(150~52면).
제6장에서는 기업가들이 ‘가족’이나 ‘복지’를 통해 자본주의를 길들이는 다양한 방식을 논한다. 기업가들은 파시즘의 간섭을 물리치면서 경영의 자율성을 견지하고 노동자의 충성을 이끌어내기 위해 여러 복지정책을 펼쳐나갔다. 예컨대 피아트의 경우 보육시설, 동계 휴양지, 전문학교 등의 복지시설을 통해 거대한 공동체 ‘피아트 가족’을 만들어냈다. 이와 같이 20세기 초반 이딸리아 자본주의는 전통적인 산업 온정주의를 새로운 차원에서 확대 심화하면서 독특한 가족주의적 기업문화를 형성했다. 즉 기업가들은 ‘가족’을 통해 자본주의를 길들이고자 했다. 또한 ‘박애’의 개념이 자본주의와 결합되면서 ‘박애 자본주의’라 부르는 독특한 형태가 나타났다. ‘이딸리아의 록펠러’로 불리는 기업가 가슬리니(G. Gaslini)의 경우가 그런 흥미로운 사례를 제공한다.
전후 이딸리아는 정치적으로는 파시즘과 단절을 꾀하는 가운데, 파시즘의 유산이자 국가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산업재건기구(IRI)를 바탕으로 경제기적을 일구어낸다. 제7장은 전후 ‘국가 자본주의’에 대한 담론과 실천, 즉 전후 국가 자본주의가 이딸리아 경제를 어떻게 지배했는가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파시즘이 붕괴한 이후에도 선진 자본주의를 따라잡으면서도 자본주의를 길들이는 방식이 다양한 형태로 논의되고 제시되었다. 이처럼 사회통합을 유지하며 경제성장을 추구하기 위해 국가라는 제도를 동원하는 과정에서 후진 자본주의의 전형적 폐단인 정경유착과 비밀주의가 나타나기도 했다.
제8장은 대규모 기업의 실제 에피소드를 통해 ‘가족 자본주의’의 약점과 그 보완책을 살펴본다. 가족기업은 경영기업이 등장한 후에도 여전히 건재함으로써 그 생명력과 내구성을 몸소 보여주었다. 하지만 가족기업은 내부적으로 ‘가족 불화’라는 치명적인 요소도 지닌다. ‘구찌’의 역사는 가족기업의 성장판과 급소를 동시에 드러내주는 사례다. 경영권과 재산을 둘러싼 가족 간의 파국적 갈등은 구찌를 끊임없이 괴롭힌 아킬레스건이었다. 구찌의 경우처럼 후손들이 기업 활동에 대해 관심과 욕망이 너무 큰 것도 문제지만, 반대로 후손들의 능력이 없는 것도 가족기업을 위협하는 요소다. 결국 가족기업이 후대로 온전히 계승되는 것은 ‘운’에 좌우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러한 우연성은 가족기업과 가족 자본주의의 최대 약점이자 급소에 해당하며, 이러한 급소를 보호하면서 약점을 강점으로 전환하기 위해 전력을 다한 가족기업 분투의 역사는 ‘갑질’ ‘불공정’으로 대표되는 한국 대기업들에 날카로운 시사점을 던진다.
최근 대규모 대량생산이 아닌 소규모 유연생산 가족기업의 활력과 역동성을 주목하는 ‘제3의 이딸리아’ 담론이 활발하다. 제9장에서는 중소규모 ‘가족 자본주의’에 대한 담론과 실천을 살펴본다. 크기가 작은 가족기업들은 장인전통과 첨단기술, 공업과 농업의 연계, 그리고 무엇보다 지방의 사회자본과 문화를 결집하는 특출한 능력을 선보이면서 틈새시장을 공략해왔다. ‘제3의 이딸리아’ 담론에서 주목할 것은 고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중소규모 가족기업들이 ‘산업단지’를 이루어 지역사회와 동행하는 방식으로 발전을 꾀한다는 점이다.
역사가 불(A. Bull)과 코너(P. Corner)는, 북부 롬바르디아 농촌지역에서 발전한 가족기업들의 역동성을 세밀하게 관찰했다. 이 역사가들은 경험적인 미시사 연구를 통해 이딸리아 농촌의 빈민들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몇세대에 걸쳐 가족기업을 열고 이를 지키기 위해 고투한 과정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이며 이들을 ‘미시적 기업가 역량’으로 주목했다. 이는 자본주의와 자본주의 아닌 것이 어떻게 협력하고 갈등해왔는지를 보여주는 또다른 사례다.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주인공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자본주의적이지 않은 존재”(272면)였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본주의적인 것과 비자본주의적인 것의 관계에 대한 통찰은 2010년대 한국의 시장만능주의에 다음과 같은 교훈을 건넨다. 자본주의에 대한 다음과 같은 입장으로 귀결된다. 첫째, 자본주의 혁신을 근본적으로 완성하려면 우선 권위적 관료제 등 ‘충분히 자본주의적이지 못한 장애물’을 극소화해야 한다. 둘째, 이와 같은 발전만으로 쏠릴 때의 폐단, 즉 부의 불평등 같은 지나치게 자본주의적이어서 나타나는 문제에 빠지지 않도록 자본주의의 모순을 관리해야 한다. 요컨대 ‘자본주의의 결핍’과 ‘자본주의의 과잉’을 동시에 치유하면서 자본주의를 완성해나가는 이중 전략을 추구해나가야 한다.
장문석 지음/창비/ 356쪽/1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