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끝작렬]'국민안전' 약속해놓고 사과요구에는 딴청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대응 못한 가습기 살균제 사건, 사과 요구에도 환경장관 "..."

노컷뉴스의 '뒤끝작렬'은 CBS 기자들의 취재 뒷 얘기를 가감없이 풀어내는 공간입니다. 전방위적 사회감시와 성역없는 취재보도라는 '노컷뉴스'의 이름에 걸맞은 기사입니다. 때로는 방송에서는 다 담아내지 못한 따스한 감동이 '작렬'하는 기사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편집자 주]

가습기 살균제 사태를 지켜보면서, 구태의연한 감이 있지만, 다시 한 번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사를 찾아보게 된다.

2013년 2월 25일. 지금으로부터 3년 4개월 전 박 대통령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은 국민 행복의 필수적인 요건”이라며 “대한민국 어느 곳에서도, 여성이나 장애인 또는 그 누구라도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데 정부 역량을 집중할 것”이라고 말했다.

말마따나 국민이 행복한 시대를 위해서는 ‘국민 안전’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야말로 어찌 보면 박근혜 정부가 ‘국민 안전을 지키는 정부’로 부상하기 위한 ‘골든 찬스’였다. 이미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기 전에 발생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가습기 살균제는 1994년부터 시판되기 시작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나중에 가습기 살균제가 원인으로 밝혀지는 원인불명의 폐질환 사망자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도 2008년, 이명박 정부 때였다.


이후 가습기 살균제와 폐 손상 간의 인과관계가 규명되고, 질병관리본부의 1차 피해조사와 검찰의 수사가 시작된 시기도 2012년, 즉 이명박 정부 말기였다.

바통을 이어받은 박근혜 정부는 ‘국민 안전’을 위해 피해 조사와 검찰 수사에 가속도를 붙이면서, 이런 사태가 발생한 원인은 무엇인지 또 재발방지를 위한 대책이 무엇인지 찾으면 되는 일이었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발생한 원인은 복잡하지만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렇다. 당시 화학물질에 대한 유해성 심사는 있었지만, 해당 화학물질을 다른 용도로 사용할 경우 안전성을 검증할 시스템에 구멍이 나있었던 것이다.

환경부와 산업부, 복지부가 서로 권한을 나눠갖고 있다보니 안전성을 검증할 사각지대가 발생했고, 이런 사각지대를 악용해 옥시나 애경 등의 기업들이 가습기 살균제를 생산해 시장에 내놨다. 심지어 “아기에게도 안심”이라는 딱지까지 붙인 채...

이제 박근혜 정부는 과거 정부 시스템의 미비로 얼마나 피해가 발생했는지 신속히 조사하고, 검찰 수사를 통해 관련자들에게는 철저히 책임을 묻고, 사각지대를 빨리 메꾸기만 하면 되었다.

국민 안전을 최우선 과제로 내건 정부로서 당연히 해야 할 조치였고, 그렇게 했다면 비극적인 사건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큰 박수를 받을 수 있는 ‘골든 찬스’였다.

그러나 정부는 중요한 기회를 스스로 놓아버렸다. 지난 3년간 보여준 모습은 그렇게 ‘국민 안전’을 외친 모습치고는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사망자가 점점 불어나는데도 피해조사는 더디기만 했고, 피해 신청을 받는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홍보도 소극적이었다.

민주당과 정의당 등 야당 주도로 국회 환경노동위원회가 2013년 5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대책 예산 50억원을 의결해 당시 추경예산에 반영하기로 했지만, 기획재정부와 새누리당이 합세해 이를 전액 삭감하는 일도 있었다.

또 당시 민주당 장하나 의원이 발의한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법도 환노위까지 법안이 상정됐지만, 기획재정부의 반대 입장을 빌미삼아 새누리당이 법안을 차일피일 지연시켰다. 당시 새누리당은 박근혜 대통령의 복심이라는 ‘친박’들이 이끌고 있었다.

피해자 구제 뿐 아니라 사고를 낸 책임자를 찾아 응분의 처벌을 받게 해야 할 검찰도 미적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2012년 8월 피해자들의 형사고발을 받은 검찰은 4년 동안 수사를 끌어왔다. 본격적인 전담수사팀이 꾸려진 것은 불과 지난 1월이었다.

가습기 살균제와 같은 화학물질 사고를 막기 위한 대책은 어떤가. 화학사고로부터 국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발의된 '화학물질의 등록과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과 '유해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은 2014년 9월 무역투자진흥회의에서 “기업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유념해 달라”고 발언한다.

지난 3년간 ‘피해자 구제’와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 대책 마련’이라는 재난대응 3원칙 가운데 어느 하나 속시원히 진행된 것이 없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피해자들이 제대로 구제를 받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는 한편, 재발방지에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한 것은 불과 지난달 28일이었다. 취임사에서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데 정부역량을 집중할 것”이라고 말한지 1159일이 지난 뒤였다.

그러나 지난 11일 국회 환노위에 출석한 환경부 윤성규 장관은 가습기 살균제 사고에 대해 "장삿속만 챙기는 상혼과 제품 안전관리 법제 미비가 중첩돼 빚어진 대규모 인명살상행위"라고 평가했지만, 공식 사과는 하지 않았다.

더민주 장하나 의원 등이 사과할 의향이 없느냐고 재차 다그쳤지만 윤 장관은 “법제 미비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면서도 끝까지 사과는 없었다. 과연 작금의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건이 과거 정부의 책임이기만 한 것일까.

가습기 살균제를 자기 손으로 사서 틀어주었다가 아내와 뱃속 태아까지 잃어버린 한 아버지는 직장도 내팽개친 채 지금도 거리에서 “내 아내와 아이를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다.

천식 증세로 고생하고 있는 한 여성은 피해조사를 신청하고도 2018년에나 조사를 받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기약없는 대기 중이다. 수 많은 국민들은 혹시 다른 제품에도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지 불안에 떨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19대 국회의 마지막 환경노동위원회에서 가습기 살균제 관련 특별법안은 끝내 상정되지 못하고 자동폐기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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