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곳 잃은 하은이는 스마트폰 채팅 애플리케이션(앱)에서 '재워주실 분 구한다'는 방을 만들었고, 방에 들어온 양모(25)씨를 따라 서울 송파구의 한 모텔로 갔다. 양씨는 어두운 방안에서 두려움에 떨던 하은이에게 유사성교를 한 뒤 달아났다.
그러자 이번에는 또다른 20대 남성 김모씨가 같은 방법으로 하은이를 만나 전북 전주의 한 모텔로 데려간 뒤 성관계를 갖고 사라졌다. 버려진 아이는 이때부터 닷새 동안 남성 7명과 차례로 성관계를 갖게 됐다.
결국 하은이는 인천의 한 공원에서 악취가 진동하고 두 눈이 풀린 상태로 발견됐다. 집으로 돌아가서는 난데없이 사투리를 쓰거나 환청이 들린다고 했고, 심한 경우 흉기로 자해를 시도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는 돌아온 지 이틀 만에 집 근처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됐다. 병원에서는 심지어 50대 남성 직원에게 잇달아 성추행까지 당했다.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하은이와 함께 경기 고양시의 한 종합병원 정신병동에 4개월 동안 입원해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치료를 받았다. 다니던 직장도 그만둬야 했다.
하은 어머니는 CBS노컷뉴스 취재진과 만나 "말이 어눌한 아이가 친구를 사귀었으면 하는 마음에 채팅앱을 가르쳐줬는데, 그게 가장 후회된다"며 "다들 어른인데 어떻게 단 한 사람도 애를 집으로 보내준 사람이 없었냐"고 성토했다.
◇ 법원 "자발적 매춘…치료비 받을 수 없다"
하은 모녀는 서울시복지재단 공익법센터의 도움을 받아 양씨를 상대로 치료비와 정신적 피해보상을 요구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서울서부지법 민사21단독(신헌석 부장판사)은 해당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기각했다.
앞서 선고된 형사소송 판결에서 하은이가 '스마트폰 앱 채팅방을 직접 개설'하고 '숙박이라는 대가'를 받았기 때문에, 의사결정 능력을 가진 자발적 매춘녀로 봐야 한다는 이유였다.
재판부는 "하은이가 정신적인 장애로 인해 사물을 변별하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미약한 상태에 있다고 인정할 수 없다"며 "양씨가 하은이와 유사성교 행위를 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뿐"이라고 선고 이유를 밝혔다.
이어 "현행 아동·청소년의성보호에관한법률(아청법)에서 대상 청소년은 성매수자에 대한 관계에서 피해자로 평가될 수 없다"며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한 후 성매수자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은 허용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그동안 하은이를 유린한 양씨는 벌금 400만원, 김씨는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받았을 뿐이다.
◇ IQ 70 하은이, 의사결정 가능한가?…같은 법원 다른 판결
하지만 앞서 같은 법원에서는 이미 "하은이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능력이 없다"고 판시했다. 서울서부지법 민사7단독(하상제 판사)은 하은이 측이 김씨를 상대로 같은 요구를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하 판사는 판결문에서 "하은이 IQ가 70정도였다는 점 등에 비춰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능력이 부족하다"면서 "더욱이 성적 가치관이 충분히 형성되지 않은 상태"였다고 밝혔다.
같은 법원에서 내려진 두 판결이 서로 엇갈리면서 하은이는 한달 사이 의사 결정능력이 없는 사람이 되기도, 있는 사람이 되기도 한 것.
법원 관계자는 "하은이의 경우 장애 등급이 모호한 '경계성 지능' 수준이어서 검찰이 '장애인'으로 보지 않고 기소한 것 같다"며 "이럴 경우 현행 아청법에서는 배상판결을 내릴 수 있는 명확한 판례나 기준이 설정되지 않은 상태"라고 설명했다.
이어 "김씨의 경우 아이를 승용차에 태워 직접 전주까지 이동시켰기 때문에 죄질이 더 나쁘다고 판단했다"며 "하급심에서는 재판부마다 판단이 다를 수 있으나 대법원까지 올라가면 맞춰지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앞서 경찰과 검찰도 하은이를 모텔로 데려간 7명의 남성을 성폭행이나 의제강간이 아니라 성매매 혐의로 송치하고, 기소한 것으로 전해졌다.
◇ "이런 사례에 적용할 법 조항이 없다"
13세 미만 아동의 경우 성적 자기결정권이 없는 것으로 보고 적극적 반항이 없더라도 피고인에게 '의제강간' 혐의를 적용해 처벌하고, 아이를 피해자로 규정할 수 있다.
하지만 하은이는 사건 당시 만 13세 2개월에 해당해 아청법상 성매매로 분류됐고, 결국 불리한 법 적용을 받게 된 것.
최근 의제강간 연령기준이 불합리하다는 지적이 제기돼, 13세에서 16세로 올리는 내용을 담은 입법안 국회에 발의되기도 했다. 하지만 기준을 상향조정하면 청소년들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과도하게 제약할 수 있다는 반론이 나오면서 해당 법안은 국회에 계류된 상태다.
경기대 경찰행정학과 황태정 교수는 "아직 우리나라에는 이런 사례를 커버할 수 있는 법 조항이 없다"며 "부모입장에서는 억울하겠지만 현재로써는 민사에서 손해배상을 받아내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십대여성인권센터 조진경 대표는 "아동·청소년 성매매는 성 착취일 뿐"이라며 "법이 청소년의 성을 보호하는 데는 소홀히 하면서 성매수자 남성들의 개인적 일탈을 처벌하는 것으로만 사회적 성 풍속을 확립시키겠다 하고 있다"고 밝혔다.
십대여성인권센터와 장애인 기관 및 학부모단체 등은 최근 이 사건의 1심 판결을 규탄하고 재수사를 촉구하는 서명운동과 1인시위 등을 검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