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집에서…日강제동원 희생자 유족 '서러운 한평생'

최근 대만 추도순례 마쳐…"우리 세상 떠나면 이 문제 잊힐까 우려"

"네 아버지는 한국군이 아니고 일본군이었는데 무슨 국가유공자야? 학비 면제 같은 소리 하지 말고 돌아가!"

일제 강제동원 희생자 유족 전생이(71·여)씨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자마자 교감 선생님이 자신에게 내뱉은 날카로운 말을 평생 가슴에 꽂은 채 살았다.

그의 아버지 전석봉씨는 전씨가 어머니 뱃속에 자리 잡은 지 4개월도 채 안 된 1945년 1월 일제에 강제 징집됐다가 대만 어딘가에서 목숨을 잃었다.

전씨는 "유복녀로 살면서 온갖 설움을 겪었지만, 교감 선생님에게서 들은 그 말은 정말 한이 됐다"면서 "국가유공자가 아닌 극빈자로 서류를 바꿔 제출해 공납금은 면제받았지만, 사춘기에 입은 큰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태어났을 때 이미 아버지가 없었으니 친구들이 '아버지' 하고 부르는 것이 남세스러워 보이기도 했다"면서 "아버지가 잠드셨다는 대만 해안에서 '아버지' 하고 목놓아 불러 보니 응어리가 조금 풀렸다"고 말했다.

4월29일 대만 추도순례를 마친 일제 강제동원 대만 지역 희생자 유족들은 남에게 쉽게 말하지 못한 인생사를 서로 털어놓고 공감하며 귀국길에 올랐다.

역시 유복녀였던 이윤재(73·여)씨는 "헌화 추모식하러 대만 바닷가에 갔더니 멀찍이 떠 있는 무역선들이 마치 우리 아버지가 타다 돌아가신 일본 군함 같았다"면서 "아버지가 보이는 듯해서 눈물을 펑펑 쏟고 말았다"며 울먹였다.

이씨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엄마 친정에서 '아들도 아니고 딸 낳았는데 혼자 지낼 필요 있나'라고 해서 엄마가 재가했다"면서 "의붓아버지는 처음에는 잘 해주더니 초등학교 졸업장을 찢으며 '여자가 공부해 뭐하냐'며 돌변해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이씨는 자신처럼 아픈 삶을 살아온 강제동원 희생자 유족들에게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가 또 다른 상처를 안겨주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2009년 '강제징용 희생자 미수금을 부당하게 지급한 근거가 된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은 위헌'이라는 취지로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냈다.

이후 헌재는 무려 6년 만인 지난해 12월 "한일청구권협정은 헌재에서 심판할 대상이 아니다"라며 각하 결정을 내렸다.

미수금을 1엔당 2천원으로 계산해 지급하도록 한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은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면서 재판관 6대 3 의견으로 합헌 결정했다.

이씨는 "당시 박한철 헌재 소장도 '1953년 대비 2007년의 1인당 명목 국내총생산(GDP) 상승률이 약 1만배'라며 미수금 산정 방식이 위헌이라는 의견을 내신 3분 중 1분이셨는데 다수결에 밀렸다"면서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는 "일본 정부가 일제 강점기 희생자를 위해 공탁금 걸어놓은 것도 우리 정부는 못 찾아오고 있지 않느냐"며 정부가 적극적으로 피해 회복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유족 김명수(76)씨도 "대만 위안부 피해자들은 1970년대에 일본 정부가 개인별로 200만엔씩 보상해줬다더라"면서 "한국 정부는 한일청구권협정 때 수억원 받아서 써먹었으면 피해 회복을 제대로 해줘야 하지 않나"라고 거들었다.

유족 정상환(77)씨는 "우리 유족들이 나이도 먹은 마당에 돈을 바라고 보상금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다 세상을 떠나고 세대가 바뀌면 이 문제가 영영 잊혀질까 두려운 것"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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