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민속문화재 제286호 영덕 무안박씨 무의공파 종택은 경북 영덕군 도곡마을(가마골) 뒤편 야산을 뒤로하고 앞의 뜰을 내려다보며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박의장(1555~1615)의 아들 박선(1596~1669)이 형인 박유(1576~1618)를 위해 1644년 건립하였다.
건물은 대문채, 본채, 내삼문, 사당으로 구성되며 ▲ 안마당의 확장과 사랑채의 돌출, 사당 공간의 높은 독립성 등 17세기 이후부터 나타나는 배치 유형 ▲ 지역의 토착성을 잘 반영한 안채와 사랑채의 공간구성 등에서 17세기 사대부 주거건축의 정체성과 지역적 특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안채 창문에 남아 있는 중간설주(中間舌柱) 흔적이나 사랑 대청의 파련대공(波蓮臺工) 등에서 조선 중기의 건축 기법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이 종택에는 집안과 관계된 문헌자료가 잘 보존되어 있고 민속적 제례행위가 지속적으로 행해지고 있으며, 문중의 대소사를 이곳에서 논의하고 친족 간 결속을 다지는 등 중요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중요민속문화재 제287호 안동 시은고택은 경북 안동의 풍산평야 동쪽에 위치하며, 동쪽에 주산을 두고 있다. 예산 이씨 7세손 이훈(1489~1552)이 기묘사화(1519)를 계기로 낙향하여 1525년에 지었다고 전해진다.
건물은 ㅁ자형의 본채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경북 안동지역 ㅁ자형 주거 평면의 안채 영역은 대청이 중앙에 놓이고 좌우에 상방(上房)과 안방이 대칭으로 배치되나, 시은고택은 안방이 중앙에 있고 그 좌측에 대청이 위치하며, 대청 앞에는 상방이 자리하는 것이 특징이다.
아울러 평면 기둥열이 가구 구성과 일치하지 않고 자유롭게 구성되며, 안채의 경우 평주(平柱)의 높이를 고주(高柱)와 같이 높게 하고, 대청과 방 부분의 가구법을 달리하는 등 가구 구성에 있어 다른 집과 차별성을 지닌다.
또한, 대대로 유학자를 지낸 조상들이 저술한 문집을 비롯한 고문서들이 상당수 소장되어 있고 문중회의가 이 고택에서 열리는 등 한 문중의 중심을 잡는 종가로서의 기본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다.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 예고된 안동 풍산류씨 금계재사는 서애 류성룡(1542~1607)의 부친인 입암 류중영(1515~73)의 묘소를 수호하고 묘제를 지내는 곳이다. 16세기 중반 이전에 사찰로 사용하던 건물(숭실재)을 인수하여 사용하다가, 18세기 초부터 영모루, 대문간채 등 여러 건물을 지으며 현재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금계재사는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 능골 안쪽에 위치한다. 금계재사 주변에는 '안동권씨 능동재사'(중요민속문화재 제183호), '권태사 신도비'(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3호), '권태사 권형 묘사' 등 재사와 묘소가 있어 이 골짜기를 큰 무덤이 있는 골짜기라는 뜻의 '능골'로 부른다.
앞에서 뒤로 갈수록 높아지는 전저후고형 대지의 전면에 중층의 두 누각(영모루, 소루)이 높고 길게 자리하며, 그 뒤로 숭실재와 동부속채가 누각과 마주 보며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사이의 앞쪽 마당 좌·우측에는 각각 대문간채와 동재가 배치되어 전체적으로 튼ㅁ자형을 이룬다.
금계재사에는 사찰에서 재실로 변화‧증축 되어가는 과정 등이 잘 남아있다. 특히, 숭실재는 기둥 위에만 공포를 올린 주심포(柱心包) 양식과 인방(引枋)을 은폐한 벽체 구성, 영쌍창(楹雙窓) 등은 17세기 이전 건물에서 주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건축사적 가치가 있다.
아울러 풍산류씨 문중은 문중 재사를 담당하는 족회소(族會所)를 두어 조상의 묘소를 관리하고 조상을 숭배하는 것을 문중 내부적으로 전승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족중입의(族中立議) 등의 문서를 통해 후손들이 조상을 모시는 법을 기록으로 남기는 등 유교적 이념 확립과 조상숭배 의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현재도 후손에게 거의 그대로 전승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