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네 살, 매트 헤이그의 세계는 무너졌다. 그는 어떻게 계속 살아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스페인의 한적하고 아름다운 이비사 섬에서 여자 친구와 함께 살고 있던 그에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정신적 위기였다. (혹은 우울과 공황장애라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그는 우울증이나 공황장애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잠도 자지 못한 채 누워 있던 그는 3일째 되던 날 자리에서 일어나 절벽으로 향했다. 자살을 하기 위해서였다. 절벽 끝. 고통을 끝내기 위해 남은 건 단 한 발자국뿐이었다. 죽느냐 사느냐…… 한참을 절벽 끝에 서 있던 그는 자신을 사랑하는 가족과 여자 친구를 떠올렸고, 간신히 발길을 돌려 ‘삶’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우울과의 긴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 후 절반이라도 정상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1년도 더 지나서였다. 그는 대화, 여행, 요가, 명상, 달리기 등 우울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들을 하나씩 찾아가기 시작했다. 가장 강력한 무기는 지금은 아내가 된 여자 친구 안드레아의 사랑, 그리고 독서와 글쓰기였다.
그는 독서와 글쓰기가 "어둠 속에서 발견한 일종의 구원"이었다고 말한다. "삶의 플롯"과 "선형적 서사"를 잃어버렸다고 느꼈던 그는 외부의 서사가 필요했고 필사적으로 책을 읽었다. 또 무언가에 집중하기 위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자신이 느끼는 바를 글로 쓰는 일은 생각과 감정을 객관화하는 방법이었고 좋은 치료법이 되었다고 그는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렇게 쓴 글들이 책으로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몇몇은 영화로도 제작 중이다.
소설 '휴먼'의 말미에 자신이 겪은 우울의 경험에 대해 고백했을 때, 뜻밖에도 따뜻한 반응이 쏟아졌다. 용기를 얻은 그는 온라인에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씩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처음 우울이 찾아왔던 14년 전에는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책 '살아야 할 이유'를 썼다.
책의 앞부분에서 매트 헤이그는 "사람마다 우울을 다 다르게 경험한다"고 강조한다. 고통을 느끼는 방식이나 강도도 다르기에 대처하는 방식도 다르다. 누구도 당사자가 겪고 있는 것을 똑같이 겪을 수 없기에 외롭고, 겉으로는 증상이 눈에 띄지 않기에 이해받기도 어렵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라는 공감이 큰 위로가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나아질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그의 생생하고 솔직한 이야기는 그래서 무엇보다도 큰 위안과 희망을 전해준다.
"나는 우울증을 증오한다. 두렵고 무섭다. 하지만 지금의 나를 만든 것도 그 녀석이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삶을 느낀 데 대한 대가라면, 녀석과 보낸 시간은 아깝지 않다." _본문 235쪽
그의 몸과 마음을 거의 파괴하다시피 한 우울은, 그러나 그를 둘러싸고 있던 껍데기를 깨부수기도 했다. 고통으로부터 그를 보호하기도 했지만 삶의 기쁨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게도 했던 것이 바로 그 '껍데기'였다고 그는 말한다. 역설적이게도 그는 우울을 겪으며 비로소 삶에 눈을 떴다. 그리고 우울을 이겨내면서 삶을 더 깊이 이해하고 진정한 자신을 찾게 되었다. 그는 "가장 오래되고 상투적인 말들이 가장 참된 진리를 담고 있다"며 지금 어두운 터널 속을 통과하고 있는 이들에게 말한다. "터널의 끝에는 빛이 있다"고. 지금은 비록 갇혀 있어서 그 빛이 보이지 않지만, 삶은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우울의 과학을 연구하면 할수록, 우리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을 근거로 우울을 규정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울은 90퍼센트가 미지의 세계이다." _본문 83쪽
매트 헤이그는 우울을 단순히 '호르몬 불균형 문제'로 바라보는 과학 이론에 대해 회의적이다. 이른바 '세로토닌 가설'은 근거가 너무나 취약할뿐더러 과학자들 간에도 의견이 제각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확실한 치료법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각자의 경험에 따른 처방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당장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일은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아픈 사람에게는 효과가 있는 게 바로 진리다." 약이 효과가 있다면 약을 먹고 요가가 도움이 된다면 요가를 하라는 얘기다. (그 자신은 약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역위약 효과가 생겨서 약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았다.)
요가·달리기·명상·여행 등의 방법 외에도 "언어"를 강조하는 점이 인상적이다. 매트 헤이그는 "언어가 우리를 해방시킨다"며 말하기와 글쓰기, 책 읽기를 중요한 처방전으로 제시한다. 우울에 대해 말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멀리할까 두려워 입을 다물어버리는 경우가 많다며 안타까워한다. "말이든 글이든 언어는 우리를 세상과 소통하게 하므로, 우울에 대해 사람들에게 말하고 글을 쓰면 타인은 물론 진정한 자신과도 소통할 수 있다." 우울을 겪으며 글을 쓰기 시작하고 작가가 된 그 자신이 바로 살아 있는 증거이기에 이 말은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책의 구성은 다소 독특하다. 짤막한 글들이 이어지며 일화와 조언을 넘나든다. 한 사람의 가장 힘겨운 시간에 관한 회고록인 동시에, 지금 힘겨운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이들에게 유용한 처방전을 전하는 치유서이기도 하다. 궁극적으로는 진정으로 살아 있음을 느끼고, 살아 있는 시간을 더 잘 보내는 방법에 관한 책이다.
책 속에서
우울증의 주요 증상 중 하나는 희망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미래도 그릴 수 없다. 터널의 끝에 빛이 있기는커녕, 양 끝이 막힌 터널 속에 갇힌 것처럼 느낀다. 적어도 미래가, 그것도 내가 이제껏 경험한 것보다 훨씬 더 밝은 미래가 있다는 걸 알았더라면, 막힌 터널의 한쪽 끝을 허물고 빛을 마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울증이 거짓말을 한다는 증거이다. 우울증은 잘못된 생각을 하게 만든다. _7쪽, '들어가는 말' 중에서
마음의 가장 이상한 점은 가장 격렬한 일들이 벌어지지만 남들은 볼 수 없다는 것이다. _20쪽, '내가 죽은 날' 중에서
언젠가는 이 고통과 맞먹는 기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비치 보이스를 듣고 기쁨의 눈물을 흘릴 것이다. 내 무릎에 잠든 아기의 얼굴을 내려다보게 될 것이다. 좋은 친구들을 사귀고, 지금까지 먹어보지 못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높은 곳에 올라도 떨어져 죽을 생각을 하지 않고 풍경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을 풍요롭게 해줄 책도 읽고, 특대 사이즈 팝콘을 먹으며 영화도 보고, 춤추고 웃고 섹스를 하고 강변을 달릴 것이다. 밤늦게까지 수다를 떨고 배가 아플 때까지 웃을 것이다.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잠시 여기에 갇혀 있겠지만 세상은 어디 가지 않는다. 가능한 한 참고 견뎌라. 삶은 언제나 그럴 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_123~124쪽, '살아야 할 이유' 중에서
그런데 사람들은 왜 그렇게 사랑에 열광할까? 아무리 누군가를 사랑해도 그들을, 아니 우리 자신조차도 고통에서 해방시키지 못하는데?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진부하고 감상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나는 사랑의 가치를 전적으로 믿고 있노라고. 사랑은 나를 구원했노라고. 안드레아가 나를 구했다. 나에 대한 그녀의 사랑 그리고 그녀에 대한 나의 사랑이. _125쪽 '사랑' 중에서
'마음에서 벗어날 길이 있을까?'라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는 물었다. (……) 죽음 말고 벗어날 길이 있다면, 그 출구는 언어를 통한 길이다. 그러나 마음을 완전히 떠나는 대신, 언어는 하나의 마음을 떠나서 그 곁에 비슷하지만 더 탄탄한 기반과 더 멋진 전망을 가진 또 다른 생각의 집을 지을 수 있는 벽돌을 제공한다. _142쪽, '삶의 플롯' 중에서
사실 우울증은 객관적인 조건들이 멀쩡할수록 더 나빠진다. 왜냐하면 느끼는 것과 느껴야 하는 것 사이의 괴리가 더 커지기 때문이다. 수용소에 수감된 전쟁 포로가 느끼는 것과 똑같은 정도의 우울증을 느끼지만 현재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니고 자유로운 세상의 근사하고 큰 집에 살고 있다면 당연히 '이런 망할! 내가 원하는 건 모두 가졌는데 왜 안 행복한 거야?'라는 생각이 든다. _177쪽, '우울증을 겪은 유명인들' 중에서
천재의 역작에 영감을 준 우울증의 사례를 굳이 들지 않아도, 우울을 이겨낸 명사들의 숫자는 너무나 많다. 플라스와 헤밍웨이, 울프처럼 실제로 자살한 유명인은 차치하고라도, 우울증을 겪은 유명인은 헤아리기 힘들만큼 많다. 그리고 우울과 그들의 업적 간에는 연관이 있는 경우가 많다. _182쪽, '두려운 자질' 중에서
우울은 (……) 항상 나보다 작다. 아무리 거대하게 느껴져도 내가 있고 우울이 있지, 우울이 있고 내가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우울을 먹구름에 비유한다면 나는 하늘이다. (……) 먹구름은 하늘 없이 존재할 수 없지만 하늘은 먹구름이 없어도 존재한다. _189쪽, '먹구름은 하늘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중에서
커트 보니것의 말이 옳았다. "책 읽기와 글쓰기는 인류가 찾은 가장 풍부한 명상의 방법이다." _255쪽, '옳다고 믿기는 하지만 항상 지키지는 못하는 40가지 조언' 중에서
매트 헤이그 지음/ 강수희 옮김/책읽는 수요일/1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