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신의 언어'의 저자 마리야 김부타스(1921~1994)는 고대 여신 문명의 실증적 자료를 발굴하고 그 의미를 세상에 알린 독보적인 고고학자다. 구소련의 리투아니아 태생인 그녀는 미국으로 이주하여 하버드에서 고고학 연구자의 삶을 시작한다. 그녀는 당시의 조류대로 유물로 발굴된 각종 무기들을 분류하면서 인류의 전쟁 문화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다. 전쟁과 지배에 대한 연구에 지쳐가던 그녀는 점점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인류 역사에 전쟁은 정녕 불가피했을까? 또 그 역사 속에 여성들은 어디에 있는가? 인류 문명 내내 남자가 여자를 지배했을까? 유럽 문명의 진정한 뿌리는 무엇일까?"
김부타스는 1960년대 후반 UCLA에 자리 잡게 되면서 유물 발굴 작업에 더욱 매진한다. 남성 중심 문화가 지배하고 있는 고고학계에서 고군분투하며 자신의 주장을 실증적으로 입증하기 위해 더 큰 노력을 기울인다. 그리고 결국에는 공격적이고 호전적인 문명 이전에 돌봄과 배려의 평등한 사회를 가진 여신 전통의 문명이 존재했고, 그것이 유럽 문명의 진정한 뿌리였음을 발견한다.
역사학자 바흐오펜(1815~1887)은 일찍이 인류 초창기 모권 중심 사회에 대해 주장한 바 있다. 신화 연구를 통해 인류 초기 문화를 발굴하고 신화의 문법을 찾아낸 것이다. 하지만 김부타스의 관점은 그와 달랐다. 바흐오펜이 모권제 사회에서 가부장제 사회로의 전이가 인류의 진화라고 보았던 반면, 김부타스는 그 전이와 그 이후의 남성 중심 문명이 인류의 기나긴 시간 속에서 오히려 일시적인 것이며 거기서 파생한 전쟁과 지배의 문화는 병리적 현상일 뿐이라고 봤다. 유럽의 인류는 더 오랜 기간 전쟁 없이 평화롭게 살고 있었고, 이는 여신 전통의 흔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70년대에 들어서 여신 연구는 본격적으로 활기를 띤다. 특히 역사시대 여신 이미지들 역시 가부장제 영향 아래 있다는 문제의식과 함께 연구의 초점을 선사시대로 옮기려는 시도가 많았는데, 이 과정에서 1950년대부터 쌓아온 김부타스의 연구 성과가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그간 여신을 남신의 어머니나 남신의 딸로 호출하는 가부장적 시각에서 벗어나 스스로 온전한 여신의 이미지를 찾아가게 된 것은 김부타스의 업적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김부타스는 '여신의 언어'를 쓰는 이유를 "올드 유럽의 위대한 여신 종교를 그림을 곁들여 설명하는 사전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올드 유럽(Old Europe)이란 남성적이고 호전적인 인도-유럽(Indo-Europe) 문명 형성 이전의 유럽을 가리킨다. 김부타스의 가정 큰 학문적 업적으로 평가 받는 '쿠르간 가설'에 따르면, 인류 초창기 유럽 대륙에는 여성 중심의 평화로운 문명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기원전 3500년을 전후해서 쿠르간(봉분이 있는 무덤)과 말 그리고 호전적이면서 남성적인 유목문화를 가진 흑해 연안의 문화가 서쪽으로 그 세력을 뻗쳐 왔고 인도-유럽어족의 확산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이 책은 주로 기원전 7000년경부터 기원전 3500년경까지의 유물을 통해 '올드 유럽'의 여신 전통 문명을 보여주는 한편, 그 이후에도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여러 여신 전통의 흔적들을 설명하고 있다.
특히 방대한 그림 자료를 통해 선조들의 삶의 흔적을 직접 목격하게 돕는다. 책에는 1000여 컷의 이미지 자료와 그에 대한 설명이 담겨 있다. 발굴 자료의 사진이나 그것을 그림으로 복원한 것들이다. 물론 이 자료들을 단순히 나열하는 것은 아니다. 의미에 따라 상징군으로 나누어 독자들이 큰 틀에서 이해할 수 있게 소개하고 있다. '생명의 부여', '재생과 영원한 세계', '죽음과 재탄생', '에너지와 흐름'이라는 네 개의 큰 갈래 안에 V자 문양, 지그재그 문양에서부터 뱀, 양, 곰 등에 이르기까지 28개의 작은 갈래로 나누어 그 상징들을 설명하고 있다. 책의 뒷부분에는 상징 용어 해설, 여신과 남신의 유형과 그 역할, 연대표, 지도 등이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어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 세상을 상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김부타스가 재구성해낸 고대 여신의 전통은 전문가 동료들보다 여성주의자나 예술가, 영성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더 환영받고 널리 수용되었다. 고고신화학이라는 분야를 창안해낸 김부타스는 유물들을 꼼꼼하게 관찰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감정이입을 하고 상상력을 동원해 유추하고 분석한다. "만일 비전이 없다면, 시인이나 아티스트가 아니라면, 보이는 게 별로 없을 것이다." 그녀의 말이다. 바로 이런 태도가 동료학자들에게는 불편하게 다가가는 동시에, 새로운 영감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대환영을 받게 된 이유였을 것이다.
마리야 김부타스 지음/고혜경 옮김/한겨레출판/416쪽/5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