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역사, '신은 사랑이다'→ '사랑은 신이다'

신간 '사랑의 탄생:혼란과 매혹의 역사'

'사랑의 탄생'의 저자 사이먼 메이는 지적인 통찰과 재치 있는 문장으로 사랑에 관한 통념을 깨뜨린다.

철학자인 저자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아퀴나스와 몽테뉴, 니체와 프로이트까지 고대와 중세, 근대 철학자들이 통찰한 사랑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성실하게 탐색한다.

이 책은 사랑이 수세기에 걸쳐 어떻게 해석되어 왔는가에 관해 의미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이먼 메이는 서양 사랑의 뿌리를 구약성경과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찾는다.구약성경의 하느님은 인간에게 명령한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여러 가지 계율을 말한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아껴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주어라." 창세기에 적혀 있듯, 신은 그 자신의 모습대로 인간을 만들었기에 우리는 신을 흉내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방식은 인간 사랑의 척도가 됩니다"라고 말했듯, 사랑의 목표는 곧잘 신격화된다.

그런가 하면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은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플라톤적 사랑'을 창조하며, 육체적 욕구에서 시작되는 사랑이 영적인 이해로, 유한에서 무한으로, 조건적인 것에서 절대적인 것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와 다르게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랑을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절대적 아름다움의 실재를 보는 방식으로 여기지 않고 개인의 번영을 위한 사람들 사이의 유대라고 보았다.

로마의 실용주의자인 오비디우스는 연애와 섹스, 관능적인 쾌락을 즐기되 너무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고 사랑의 더 높은 이상에 혹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긴 중세를 거쳐 마침내 탄생한 천재 스피노자는 신과 자연의 구분을 거부함으로써 하늘로 치솟은 사랑을 땅 위로 끌어내린다.


이후 루소, 슐레겔과 노발리스, 쇼펜하우어와 니체로 이어지는 사랑의 역사는 다채로운 모습으로 내내 인간을 지배한다. 마침내 프로이트와 프루스트에 이르러서는, '신은 사랑이다'라는 명제가 '사랑은 신이다'라는 명제로 탈바꿈하기에 이른다.

서양 세계가 신에 대한 믿음을 잃기 시작한 17~18세기 이후로, 신의 대용품으로 사용된 모든 대상들은 차례차례 결함을 드러냈다. 이성, 진보, 민족, 국가, 공산주의를 비롯한 모든 가치와 이상은 모두 인간이 기대했던 궁극의 만족이나 무한한 약속을 실현하지 못했다. 시인 필립 라킨은 「어런들 무덤An Arundel Tomb」의 마지막 행에서 문명 전체를 대표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 중 살아남을 것은 사랑이다."

사랑에 대한 인간의 생각은 늘 변해왔지만, 이 오랜 문화적 유산은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중이다. 이쯤에서 메이는 사랑이 무너뜨릴 수 없는 삶의 기반에 대한 희망을 우리 안에 일깨우는 사람과 사물들에게 느끼는 황홀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사랑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향에 온 듯한 기분을 느끼고 싶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금-여기에서 삶을 뿌리내리려는 욕망. 그는 이 욕망을 '존재론적 정착'라고 부른다.

신이 사랑이라고 믿든 사랑이 신이라고 믿든, 이러한 구분은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사랑하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기 위해 노력하고, 그럼에도 그를 '그의 내면 그대로' 이해했다고 단정짓지 않는 것. 필요, 불안, 습관, 역사에 의해 왜곡된 우리의 불완전한 시각 안에 가두지 않는 것. 신이 우리를 사랑한다고 하는, 과연 그럴까 싶은 방식의 사랑을 전범으로 삼는 교만을 버리고 스스로의 의지로 사랑하는 것. 전통의 무게에 눌려 굳어버린 사랑의 관념을 생생히 되살린 메이의 자유로운 사랑관이다.

본문 중에서

사랑은 왜 존재하는가, 사랑은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 잘 산 삶에서 사랑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사랑은 어떻게 함양되어야 하는가, 사랑은 어떤 조건하에서 아름답거나 추하며 선하거나 악한가 하는 것들은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내가 제시하는 사랑의 역사는, 이 보편적 욕망과 헌신의 힘이 우리가 '서양'이라고 부르는 특정 문화집단에서 수세기에 걸쳐 어떻게 해석되어왔는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35~36쪽)

사랑이 어떻게 하면 그토록 오랫동안 그것을 가두고 있던 헛되고 비현실적인 기대로부터 풀려날 수 있느냐는 물음의 핵심은, 사랑을 다정한 보살핌이나 자애로운 연민 같은 뜨뜻미지근한 무언가로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이 최고의 감정을, 그리고 잘 산 삶에서 그것의 위치를 좀더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특히 세속적인 시대에 내가 제시하는 전반적인 주제는, 우리는 신이 우리를 사랑하는 방식이라고 알려진 것이 아닌, 우리에게 부여된 신을 사랑하는 방식을 인간 사랑의 모델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39쪽)

후기 18세기 낭만주의, 그리고 특히 루소는 서구의 사랑에서 일어난 세번째 위대한 혁명의 정점에 있다. 11세기 시작된 이 혁명 덕분에 한 사람의 개인, 또는 사실상 일반적 자연은, 최고의 좋음을 체현하는 존재로서 이전에는 하느님에게만 속했던 종류의 사랑을 받을 가치를 지닌 대상이 된다.

돌이켜보면 최초의 혁명은 사랑의 가치에 관한 것이었다. 신명기에서 아우구스티누에 이르는 동안, 사랑은 최상의 미덕이 되었다. 그리고 이는 15세기 중반까지 지속된다.

4세기에서 16세기까지 걸친 2차 혁명, 즉 아우수구스티누스에서 베르나르 드 클레르보를 거쳐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를 넘어 루터에 이르는 동안 인간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 전례없는, 말 그대로 신적인 사랑을 할 힘을 얻었다. 그렇지만 동료 인간들은, 물론 여전히 하나님을 위한 사랑을 받아야 했다.

3차 혁명, 즉 이제는 한 인간이 그 내면의 좋음에 따라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랑의 대상에 관한 혁명이 완성됨으로써, 낭만주의의 적자인, 그리고 루소를 그 지도정신으로 삼는 4차 혁명의 터전이 마련된다.

아직도 우리 곁에 머무르고 있는 이 혁명은, 사랑을 통해 참됨으로 나아가는 자에게 관심을 쏟는다. 그는 사랑을 통해 자기를 잃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찾는다. 심지어 자연을 초월하려고 투쟁할 때조차 그는 자신의 본성을 따르기를,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을 실현하기를 추구한다. 진실과 좋음은 감정을 넘어선 어딘가가 아니라 감정의 탐험 그 자체에 놓여 있다.

사랑하는 이가 실로 그런 정도까지 사랑의 초점을 차지하다보니,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사랑받는 대상은 그림에서 밀려날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극단까지 가면 사랑은 자신과 사랑에 빠지고, 그리하여 궁국의 좋음이 되어, 예전에는 하느님에 앉아 있던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11장 계몽된 낭만주의로서의 사랑:루소, 303~304쪽)

슐레겔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처음으로 사랑을 시작할 때부터 실험이 필요하다. 우리는 다양한 종류의 관계들을 시험해보기 전에는 우리에게 가장 잘 맞는 파트너를 찾아내기 어렵다. 특히 남자들은 남성적 정체성이 자부심으로 너무 강력하게 굳어져 있어 여성적 특성들을 아울러 가지기가 어렵기에 더 그렇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성숙이 일어나기 전에 결혼을 한다. 그 결과 "거의 모든 결혼은 단순히 내연관계나 정사, 혹은 그보다 임시적 실험에 불과한, 참된 결혼과는 거리가 먼 아류작이다".(12장 종교로서의 사랑: 슐레겔과 노발리스,309쪽)

19세기와 20세기에는 인간의 신격화를 위한 많은 시도가 있었다. 자유, 이성, 공산주의, 제국주의, 정치, 예술, 기술, 그리고 다른 형태의 창조물들이 제각각 다른 시기에 인간의 격상을 위한 방편들로 등장했다. 그렇지만 그 무엇도 사랑만큼 정확히 그리고 대중적으로 기독교 하느님의 특색을 흉내내지는 못한다. 그리고 다소간 그 이유 때문에, 그 무엇도 사랑처럼 오래 남지 못했다. (12장 종교로서의 사랑: 슐레겔과 노발리스, 323~324쪽 )

그리하여 섹스를 열정적 사랑의 최고 이상이자 우리의 가장 강력한 욕구 뒤에 놓인 힘으로 보는 이 무신론의 철학자는, 우리가 구원을 얻으려면 육체를 폄하하며 의지란 자기모순이라고 여기는 그런 금욕주의자들, 성자들, 신비주의자들의 상태에 도달해야 한다고 본다. 그가 상정하는 이상은 '텅 빈 무無 ', 불교에서 열반이라고 부르는 계몽의 상태다.(13장 생식욕으로서의 사랑 :쇼펜하우어, 344쪽)

니체는 사랑이 아름다운 것 그 자체에 선택적으로 초점을 맞춘다는 플라톤의 주장을 거부한다. 그리고 그 대신 사랑은 또한 반드시 사물을 아름답게 만들어야만 한다고 시사한다. 사랑은, 다른 말로, 자신이 관심을 가진 어떤 대상을 그것이 전체로서 자신에게 아름답게 느껴지는 방식으로 창조하거나 해석하는 예술가와 같다. 그가 자신의 작품을 강력하게 긍정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것을, 그 사소한 마무리 하나까지도 필연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삶의 운명적인 산물로. 362쪽)

프루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사랑이 지닌 배덕의 위력과 풍부함에 눈을 뜨고, 고통이 얼마나 사랑을 구축하고 기만이 얼마나 사랑에 활력을 주며 지루함이 얼마나 사랑을 마비시키는지를 깨닫고, 질투, 잔인함, 무관심, 그리고 나르시시즘에 대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뛰어난 묘사들을 접한다는 것을 뜻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막대한, 어쩌면 극복할 수 없는 삶의 고통을 최고의 좋음으로 구원받고 싶은 서양의 갈망을 다시금 떠올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화자의 고통을 그려내고 정당화하느라 장장 3000쪽 가까이 소모하고 있지만, 반대로 그 고통이 없었다면 태어날 수 없었던 예술작품을 통해서 말이다.(392~393쪽)

사이먼 메이 지음/ 김지선 옮김/문학동네/520쪽/19,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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