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스승에게서 전화가 왔다. 대표팀에 합류하라는 통보였다. 어느덧 마흔을 훌쩍 넘은 마흔넷의 나이. 아직 현역으로 뛰고 있다지만, 두 아이의 엄마에게는 다소 당혹스러웠던 전화였다. "거짓말하지 마세요"라고 손사래를 쳤지만, 스승의 설득에 결국 태극마크를 다시 달고 2016년 리우 올림픽 금메달에 도전하게 됐다.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으로 만들어진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여자 핸드볼 대표팀의 골키퍼 오영란(인천시청)이 그 주인공이다.
오영란이 처음 올림픽에 나선 것은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이후 2000년 시드니 올림픽과 '우생순'으로 만들어진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그리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까지. 총 4번의 올림픽에 출전한 뒤 대표팀을 떠났다.
대표팀은 떠났지만, 기량은 여전했다. 올해 핸드볼코리아리그에서도 방어율 38.87%, 세입 152개로 3위다.
임영철 감독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면서 "국내 골키퍼 랭킹 1, 2위를 다투고 있고 많은 국제대회 경험을 통한 노련함이 있는 만큼 젊은 선수의 패기가 합쳐지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흔넷의 나이에 진짜 '우생순'을 찍고 싶다는 오영란을 19일 동아시아클럽핸드볼선수권대회가 끝난 뒤 만났다.
대표팀에서 은퇴한 지도 벌써 8년째. 올림픽에 대한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물론 올림픽에 대한 아쉬움은 가슴 한 켠에 남아있었다. 4번의 올림픽에서 은메달 2개, 동메달 1개를 땄지만, 금메달이 없었던 탓.
“사실 불꽃을 태울 생각은 없었는데 임영철 선생님께서 불러주셔서 태우게 됐어요. 아직 3개월이 남았는데 만약 가게 된다면 그 과정 동안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것 같아요. 금메달 한 번 따보고 싶죠. 네 번 올림픽에 나가서 아직 금메달이 없어요. 마지막으로 올림픽에 나간다면 금메달을 따보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우생순'의 아픔도 오영란을 흔들었다. 영화 제목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지만, 실제 선수들은 그렇지 않았다. 특히 승부 던지기에서 2-4로 패한 터라 골키퍼 오영란의 아픔은 더 컸다.
“(승부 던지기에서) 하나만 더 막았으면 하는 것보다 그 전에 (경기에서)하나만 더 막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어요. 골키퍼로서 내가 마지막 수비수인데 못해줘서 아쉬움이 많았죠. 메달은 땄지만, 금메달을 못 딴 아쉬움이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그걸 풀라고 불러주신 것 같아요.”
물론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대표팀 합류를 위해 태릉선수촌에 들어가기 전까지도 임영철 감독에게 "안 들어가면 안 될까요"라고 물었을 정도. 하지만 대표팀과 인천시청 등에서 스승으로 모셨던 임영철 감독이 부탁을 뿌리치기도 어려웠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선생님께 못 들어가겠다고 몇 번 전화도 드렸죠. 그랬더니 ‘말 같지 않은 소리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오랜 스승이라 선생님을 이기지 못했죠. 고심 끝에 부르셨겠구나 생각하니 들어가게 됐어요. 지금도 들어가면 힘들어요. 들어가는 날까지도 ‘안 들어가면 안 됩니까’라고 물었어요. ‘너 아픈 데 다 안다. 조절해줄게’라고 하셨죠. 그런데 조절은 없습니다.”
임영철 감독이 오영란을 다시 부른 것은 단순히 기량 때문은 아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노메달 아픔을 이겨내고, 대표팀을 하나로 묶어줄 '맏언니'가 필요했다. 오영란 역시 자신의 역할을 100% 이해하고 있었다.
“열심히 해야죠. 어린 선수들을 다 따라하진 못하겠지만, 리우에서도 지금처럼 소리 지르고 끝까지 해서 금메달을 따보겠습니다.”
오영란은 19일 끝난 동아시아클럽핸드볼선수권대회에서 인천시청 소속으로 출전해 베스트 7 골키퍼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후배들을 향해 소리를 지르자 마흔넷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쩌렁쩌렁 울렸다. 리우 올림픽에서 해피 엔딩 버전의 '우생순'을 만들기 위해 뛰고, 또 뛰는 오영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