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이 우리에게 던지는 여덟가지 질문

신간 <현대 페미니즘의 테제들>

페미니즘은 양성평등이라는 당면 과제를 넘어 우리가 고민해야 할 무수한 정치적, 문화적 과제들을 제기한다. <현대 페미니즘의 테제들>은 이런 과제들을 정면으로 다루어온 현대 페미니즘 사상가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8가지 현대 페미니즘 사상은 페미니즘을 단순한 양성평등으로 환원하는 것에 반대한다. 나아가 페미니즘이 생물학적 성(sex)과 사회적 성(gender)의 구분을 넘어 모든 차별에 저항하고 다양한 성적 차이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려는 태도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다문화, 다인종, 다젠더 사회를 눈앞에 두고 있는 우리에게 페미니즘은 차이와 인정, 정체성의 개방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다.

<현대 페미니즘의 테제들>은 페미니즘 철학의 길을 연 시몬 드 보부아르부터 젠더 정체성의 전복을 시도한 주디스 버틀러에 이르는 다양한 현대 페미니즘 사상을 국내 학자들의 눈으로 소개한다.

1. 여자는 태어나는 것인가, 만들어지는 것인가? - 시몬 드 보부아르
시몬 드 보부아르는 현대 페미니즘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제2의 성』의 저자이자 실존주의 철학자이며 페미니스트 운동가였다. 그녀는 여성이 장구한 역사 동안 주체가 되지 못하고 절대적 타자에 머물러 있었지만, 그것은 결코 불변하는 필연성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산물일 뿐임을 명확히 선언했다.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존적 페미니즘 사상은 남녀평등의 틀에 갇혀 있던 페미니즘을 혁신하고, 여성을 자유로운 실존적 존재로 재해석했다. 보부아르의 한계에 대한 이후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정체성을 고정시키려는 본질주의에 대한 그녀의 날카로운 지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2. 성적 차이는 망각되어야 하는가, 회복되어야 하는가? - 뤼스 이리가레
뤼스 이리가레는 여성이 남성이 되고자 하는 평등주의 페미니즘을 비판하고, 동등한 권리 쟁취를 넘어 남녀의 서로 다른 성적 차이를 옹호한 독특한 페미니즘 철학자이다. 그녀는 여성이 타자적 지위를 벗어나는 것만큼이나 진정한 의미의 타자로서 자신의 여성성을 옹호하고 가꾸어가는 것이 페미니즘의 중대한 과제라고 보았다. 한편으로는 주체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타자로서 남성과 나란히 함께 살아갈 수 있어야 진정으로 남녀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녀는 성적 차이의 망각이 아니라 성적 차이의 회복을 요구하며, 이러한 주장은 여전히 급진적인 ‘성차의 철학’으로 남아 있다.

3. 과학은 여성에게도 과연 보편적이고 객관적인가? - 샌드라 하딩
샌드라 하딩은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자이다. 그녀는 사회과학과 자연과학 전반에 걸쳐 어떤 ‘입장’에서 연구를 하는 것이 올바른 연구 결과를 산출하는 데 도움을 주는지에 대해 깊이 연구해왔다. 하딩은 기존 과학이 지나치게 서구, 백인, 엘리트, 남성 중심의 시각에서 행해져 왔으며, 그로 인해 많은 왜곡된 결과를 낳았다고 비판한다. 그녀는 ‘중립적’ 입장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자신의 입장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통해 더욱 객관적인 연구가 가능함을 지적한다. 이 점에서 페미니즘적 시각은 “우리 자신을 타자로 재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것이다.

4. 정의는 보편적인 윤리인가? 돌봄 윤리의 자리는 어디인가? - 캐롤 길리건
캐롤 길리건은 페미니즘적 도덕심리 이론을 주창한 도덕심리학자이다. 그녀는 기존 심리 이론들이 인간의 도덕발달을 지나치게 남성 중심적인 시각에서만 연구하였음을 폭로하고, 여성의 독특한 도덕발달 과정을 경험적 연구를 통해 명확히 밝혔다. 나아가 남성의 정의 윤리에만 집중하였던 연구의 편향을 벗어나, 인간의 도덕발달을 ‘돌봄 윤리’라는 새로운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이를 통해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돌봄이 아니라, ‘페미니즘적 윤리’로서의 돌봄을 주장하고 이를 인간의 또 다른 보편적 윤리로 여길 수 있게 하는 통로를 제공한 것이다.

5. 우리는 ‘여성적 글쓰기’를 수용하고 있는가? - 엘렌 식수
엘렌 식수는 탈구조주의 페미니즘의 대표자이다. 그녀는 여성성의 문제를 ‘여성적 글쓰기’라는 차원에서 제기한 최초의 페미니스트로서, 여성의 자기 표현의 가능성을 비평, 문학, 희곡 등 여러 방면에서 탐구해왔다. 식수는 지금까지의 글쓰기의 역사를 남성에 의한 남성적 글쓰기의 역사로 해석하면서, 여성에 대해 쓰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밝혀내고, 여성적 글쓰기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보여주었다. 글쓰기의 중립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 정치성을 환기시키는 그녀의 비판은 여성들 자신의 여성적 글쓰기라는 미래의 과제를 제기하고 있다.


6. 분배 정치는 차이에 대한 지배와 억압에 충분히 민감한가? - 아이리스 영
아이리스 영은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정치철학자이다. 그녀는 『정의와 차이의 정치』라는 저작을 통해 롤즈를 비롯한 기존 분배 중심 정의론들이 가지고 있던 한계를 논파하면서, 진정한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집단의 차이를 억압하지 말고 오히려 그 차이를 긍정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처럼 페미니즘에 입각한 ‘차이의 정치’를 옹호하면서 그녀는 정의론의 새로운 장을 열어젖혔다. 분배 정치로는 포착할 수 없는 지배와 억압의 요인을 밝히고 그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페미니즘적 정의론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7. 섹스는 정말로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인가? - 주디스 버틀러
주디스 버틀러는 페미니즘 이론가이자 퀴어 이론의 대변자로 유명하다. 그녀는 대표작인 『젠더 트러블』을 통해 기존 페미니즘적 시각들이 여성의 정체성을 지나치게 통일적으로 가정하고 있음을 비판하면서, 여성의 정체성이 결코 단일하지 않으며 그러한 정체성에 포착되지 않는 ‘여성들’이 존재함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나아가 그녀는 페미니즘이 젠더 정치의 한계를 넘어 퀴어 정치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하였으며, 젠더의 다양성과 수행성에 주목하여 자연적인 것으로 생각되던 ‘섹스’조차 의심하고 넘어설 수 있는 급진적 시각을 제공했다.

8. 자본주의는 외부가 없는 체제인가? 차이의 경제는 어디에 있는가? - 깁슨-그레이엄
깁슨-그레이엄은 페미니스트 경제지리학자 줄리 그레이엄와 캐서린 깁슨의 공동 필명이다. 이 둘은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정치경제학의 판을 새로 짜고자 했다. 자본주의적 경제 연구와 그에 대한 비판적 연구를 넘어서, 자본주의 담론 자체가 비자본주의적 실천을 억압하는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음을 폭로하고 비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을 명백하게 드러내 보여준 것이다. 이를 통해 그녀들은 자본주의적 경제라는 관점에 이미 성별 정치가 개입되어 있음을 밝히고, 남성 중심적 정치경제를 넘어서기 위해 여성 경제의 논리와 언어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마을 경제를 아우르는 ‘차이의 경제’를 불러오려는 그녀들의 노력은 기존 자본주의 경제가 한계에 달한 오늘날의 현실에 매우 의미 있는 대안들을 발굴해내고 있다.

본문 중에서

여성들은 왜 장구한 역사 동안 주체가 되지 못하고 절대적 타자에 머물러 있었을까? 이에 대한 보부아르의 대답은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그녀의 유명한 주장에 있다. 즉 여성이 절대적 타자가 된 것은 사회문화적 산물일 뿐, 여기에 어떤 불변적 필연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32쪽)

뤼스 이리가레에게는 진정한 의미의 타자가 된다는 것은 주체가 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다. 이것은 시몬 드 보부아르 이후의 페미니즘이 ‘제2의 성’의 지위에서 벗어나 타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주체 입장을 쟁취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뤼스 이리가레는 평등주의 페미니즘을 비판하면서,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위한 싸움은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여성해방의 최종적인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재차 강조한다. 평등과 동등함을 추구하는 것은 남성을 주체의 모델로 삼음으로써 여성이 남성이 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목표는 남녀 모두가 제1의 성도 제2의 성도 되는 일 없이, 차이 나는 두 성으로서 주체이자 타자가 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68쪽)

길리건은 “여성적 윤리”로서의 돌봄 윤리와 “여성주의적 윤리”로서의 돌봄 윤리를 구분한다. 그녀에 따르면 “여성적 윤리”로서의 돌봄 윤리는 가부장주의 사회에서 여성에게만 강조되었던 윤리이다. 돌봄을 여성의 본성과 연결시켜서 그것을 여성만의 업무로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여성주의적 윤리”로서의 돌봄 윤리는 여성에게만 돌봄 역할을 한정하는 가부장주의 질서에 반대하며, 돌봄을 모든 인간의 보편적 윤리의 지위로 놓는다. (147쪽)

버틀러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젠더 트러블』은 그 부제가 말해주고 있듯이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 그야말로 ‘여성’이라는 정체성 범주의 해체를 꾀하고 있다. 버틀러는 이성애와 동성애의 구분조차도 권력 담론의 일부라고 규정함으로써 성 정체성 자체를 문제 삼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여성주의 이론이 여성이라는 범주를 넘어서 소수자의 섹슈얼리티 문제로까지 확장되는 지점을 확인할 수 있다. (213쪽)

연구모임 사회비판과대안 엮음/사월의책/288쪽/2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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