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대배우' 포스터의 문구는 마치 배우 오달수가 우리에게 던지는 말 같다.
오달수와 떼어 놓을 수 없는 요소는 바로 흥행이다. 어떤 영화든 감초 조연으로 그가 들어가기만 하면, '믿고 보는' 관객들이 속출한다. 영화를 선택하는 오달수의 눈이 탁월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대한민국 대표 조연 배우이자 영화계의 공식 '천만 요정'이다.
첫 주연작 개봉을 앞두고 취재진들과 만난 오달수는 막걸리를 나눠마셨다. 웃기고 떠들썩하기 보다는 차분한 담소가 이어졌다. 그곳에 우리가 스크린에서 만나는 '감초' 오달수는 없었다. 그냥 지금까지 치열하게 살아 온 배우 오달수의 얼굴이 있었을 뿐이다. 다음은 오달수와의 일문일답.
▶ '천만 요정'이라 불릴 정도로 유명 배우가 된 지금 불편한 지점이 있나?
- 편하게 술 못 마시는 것? 가끔 술집에서 술에 취한 분들이 같이 사진을 찍자고 권할 때가 있다. 뭐 한 잔 따라 주시겠다는 거나 제가 사인을 하는 건 좋은데 타인의 휴대폰에 제 사진이 남는 건…. 다 괜찮은데 굳이 불편한 점을 꼽는다면 그렇다는 얘기다.
▶ '대배우'와 그냥 '배우'의 차이는 뭘까?
- 20~30대 배우들을 두고 연기를 잘한다고는 해도 '대배우'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는다. 그만큼 아무나 될 수는 없는 거다. 원래 유럽에서는 배우가 되기도 힘들고, 그래서 배우라는 말도 아무한테나 쓰지 않는다. 그러니까 '대배우'라는 말은 엄청난 영광이다. 조건 없이 믿고 볼 수 있는 배우, 깊은 연륜에 연기의 깊이 또한 따라갈 수 없는 배우가 아닐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대배우로는 알 파치노, 로버트 드니로 등이 있다.
▶ 20년 동안 무명배우였던 장성필 역을 맡았다. 실제로 연극 무대에서 활약해 왔고, 무명 시절도 있었을 텐데 더 밀접한 캐릭터라 어려운 점도 있었나?
- 이제 저는 무명이라고 할 수 없기는 하다. 그렇다고 해도 그런 생활을 겪었던 사람으로서 캐릭터를 하나 입기가 쉽지가 얺더라. 차라리 다른 분야의 캐릭터였다면 자료 조사를 한다든지 독특한 표현 부분이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을 것 같다. 그런데 제가 겪은 일들과 닮아 있어 오히려 캐릭터를 입기가 까다로웠다.
- 대배우들이야 인물에 최대한 가깝게 가져다 붙이는 '드니로 어프로치' 등과 같은 방법을 쓴다. 저는 딱히 방법은 없고 연기에는 과학적인 부분이 많이 들어가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 실성한 사람을 연기한다면 캐릭터를 잡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럴 때는 과학적 분석이 큰 도움이 된다. 만약 그것도 떠오르지 않으면 동물을 떠올리고 동물에 많이 비유하기도 한다. 들었던 이야기나 봤던 영화들을 살짝 변형하기도 하고.
▶ 영화 속에서 장성필은 20년 만에 '깐느 박' 영화에 캐스팅된다. 첫 영화 촬영 당시에 어땠는지 기억이 나나?
- 당시에는 찍으면 확인하는 것도 몰랐다. 그냥 하라는대로, 시키는대로 할 때다. 촬영 감독님이 자꾸 저한테 '그러면 안 나온다'고 뭐라고 했었는데 제가 자꾸 앵글 밖으로 벗어나서 그런 거였다. 그게 앵글 안에 한해서 편하게 하는 건데 저는 그냥 편하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어디서 저런 애를 데려왔냐고 미치려고 하셨다. (웃음) 그렇게 야단치면서 가르쳐 주는 것 아니겠나.
▶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를 촬영할 때 이번 영화를 연출한 석민우 감독과 인연을 맺었다고 들었다.
- '박쥐' 개봉이 2009년이었다. 진지하게 했던 이야기도 아니고, 그냥 작업을 하다가 석민우 감독에게 '제가 입봉하면 꼭 출연해달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알았다'고 했다. 스쳐지나가면서도 기억에 오래 남는 이야기들이 있다. 그런데 거의 7~8년 정도 지난 시점에 자기가 입봉한다고 찾아왔더라. 그 기간 동안 제 기억에 남았던 약속인데 깰 수가 없는 두께감이 있었다. 그래서 무조건 했다. (웃음)
- 아마 제 추측인데 '아가씨' 주연 배우들 중에서 박찬욱 감독과 함께 했던 배우가 단 한 명도 없다. 박 감독과 다 처음 작업하기도 하고, 배우들이 낯도 좀 가린다. 촬영 중에 모니터 옆에 계속 붙어 앉아 있는 배우가 드물다더라. 박찬욱 감독은 다음 컷을 준비할 때 배우들과 함께 앉아서 사진 찍고 그런 걸 좋아한다. 최민식 형님이나 송강호 형님이 유독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이끄는 스타일이기도 하다. 아마 외로움을 타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 사실 '감초 조연'으로 활약하면서 굉장히 비슷한 배역들을 많이 맡았다. 여전히 관객들은 오달수의 연기를 좋아하지만 배우 스스로는 이미지 소비를 걱정했을 것 같기도 한데.
- 그런 걱정을 왜 하지 않았겠나. 시나리오 받으면 오히려 제가 좀 지겨울 정도로 비슷한 역할들이 많다. 그러나 관객들은 그렇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질린다기 보다는 익숙하다고 표현하고 싶다. 그 익숙함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향기다. 저 배우가 영화 속에서 유쾌하거나 재미있게 나오면 편안해지는 그런 느낌 아닐까.
▶ 그러면 스스로 항상 새로운 도전과 역할에 열려 있는지? 정말 비열한 악역을 한 번 보고 싶기도 하다.
- 작품만 좋다면 할 의향이 있다. 그렇지만 새로운 도전을 위해 좋지 않을 작품을 할 필요나 이유는 없다. 한편으로 이런 면도 있다. 제가 잘할 수 있는 것만 해도 시간이 부족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제 안의 악마성을 끌어내서 악역도 해보고 싶다. 정말 지독하게 나쁜 놈. 그런데 감독 등 권력을 쥔 사람들이 안 시켜준다. (웃음)
- 보시는 것만큼 그렇게 독특한 성격은 아니다. 제 매력은 정말 잘 모르겠다. 매력이 없지 않나? 저는 술을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하긴 한다. 열 받아도 잘 참는다. 물론 한 번 화나면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그런데 요즘은 그래봤자 뭐하나, 그런 생각도 들더라.
▶ 지금까지 경력이 상당한데, 연기가 아닌 제작 쪽으로는 전혀 생각이 없나?
- 선택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권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그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아주 인간적으로 다가가는 사람들은 드물다. 아주 덕이 있거나 뛰어난 사람이 아니면 사람들이 거리를 두려고 한다. 오히려 없는 사람들과 친해지려고 하는데 그게 사람의 본능 같다. 그래서 선택권을 쥔 역할은 하고 싶지 않다. 사람들이 내게서 멀어지니까.
▶ 하나뿐인 딸이 만약 배우를 꿈꾼다면 어떨 것 같나? 아버지로서 흔쾌히 받아들일 생각인지?
- 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머리가 크니 다른 것들이 보이는 것 같다. 제가 아버지를 따라 교사를 꿈꿨던 것처럼 우리 딸도 배우를 꿈꿨다. 그런데 사촌언니가 중국 가는 걸 보니 중국에 가고 싶기도 하고, 꿈이 자꾸만 바뀐다. 만약 배우를 하고 싶다고 하면, 힘든 거 아니까 말려야지. 부모들 마음은 다 같지 않나? 내가 살았던 것처럼 살지 말고, 내 길만은 따라오지 말아라.
▶ 여기까지 오는데 '이제 배우 그만해야 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힘든 일이 있었나?
- '그 동안 잘 버텼다'고 웃으면서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렇게 버틸 때 때려치우고 싶은 생각이 하루에 열두번도 넘게 들었다. 너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도 있었고. 내가 왜 이걸 하고 있지. 후회는 아니지만 이런 생각도 많이 했었다. 내 딸은 그렇게 괴롭게 살지 않았으면 한다.
▶ 계속 연극 배우로만 살아갔다면 어땠을지 궁금하다. 힘들었던 과거와 지금, 가장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
- 만약 우리나라가 연극 배우만 해서 먹고 살 수 있는 풍토였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치열하게 살았을까 싶다. 아마 그렇지 못했을 거다. 나태해지거나 매너리즘에 빠졌을 수도 있다. 마음은 크게 달리진 부분이 없다. 그냥 외적으로는 빚이 많이 줄었다는 거? 27살에 영화를 시작했는데 얼마나 빚이 많았겠나. 만약 계속 힘든 상황이었다면 돈도 돈이고 친구들에게 마음의 빚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빚도 많이 줄었다. 물론 아직도 다 못갚고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