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역 농구 선수로 활약했던 경기인 출신들은 흔히 농구 명문고, 농구 명문대 출신의 주류와 주류에 섞이지 못한 비주류로 나뉜다. 고양 오리온을 프로농구 정상에 올려놓은 추일승 감독은 대표적인 비주류 인사다.
경복고와 용산고, 연세대와 고려대 등 농구 명문 학교를 졸업한 현역 출신들은 선후배 사이의 관계가 끈끈하다. 서로가 서로를 끌어주고 밀어준다. 그들만의 세계가 존재한다.
추일승 감독은 농구계에서 대표적인 '흙수저'다. 홍대부고를 졸업했고 지금은 농구부가 없는 홍익대 출신의 추일승 감독은 비주류라는 꼬리표를 늘 달고 다녔다. 밀어주고 끌어주는 주변인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오로지 실력 만으로 승부했다. 그는 코트의 박사로 통한다. 그보다 열심히 농구를 공부하고 연구하는 지도자는 많지 않다.
지난 29일 오후 경기도 고양실내체육관에서 끝난 2015-2016 KCC 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에서 고양 오리온이 전주 KCC를 120-86으로 완파하면서 최종 전적 4승2패로 승리, 추일승 감독은 2003년 프로 사령탑 데뷔 후 13년 만에 첫 우승의 감격을 누렸다.
'흙수저'의 반란이다.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그동안 농구계의 비주류 인사로 여겨졌던 나날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추일승 감독은 "제가 원래 술을 싫어한다"는 '아재 개그'를 던지더니 "그래서 우승하면 원없이 울고 싶었다"고 속내를 드러냈다.
그는 울지 않았다. 마지막 6차전에서 일찌감치 점수차를 크게 벌려 경기 중반 이미 마음 속에서 우승을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열심히 준비했고 또 경기 운영을 잘했기에 눈물을 흘릴 기회조차 없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승리였다.
추일승 감독은 진중한 사람이다. 신사다.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마침내 최정상에 오른 순간 오랫동안 가슴 속에 담아뒀던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추일승 감독은 "늘 두 가지가 따라다녔다. 농구계의 주류냐 비주류냐, 또 우승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 그래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털어놨다.
이어 추일승 감독이 꺼내놓은 마음의 소리는 기자회견에 참석한 취재진에게도 깊은 울림을 남겼다.
그는 "내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연세대와 고려대를 나오지 않은 사람이 더 많은 세상에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주류라고 생각하고 내가 부끄럽지 않게 노력한다면 죽을 때까지 우승을 못하더라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추일승 감독이 힘들고 외로운 길을 걸을 때 힘을 실어준 인물이 있다. 영국의 오디션 프로그램 '브리튼즈 갓 탤런트'에서 기적과 감동을 선사한 주인공 폴 포츠다.
폴 포츠는 평범한 세일즈맨으로 살다가 노래를 하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섰다. 까칠하기로 유명한 심사위원들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지만 폴 포츠는 아름다운 목소리와 가창력으로 전 세계인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추일승 감독은 "언젠가 다큐멘터리에서 폴 포츠가 브리튼즈 갓 탤런에서 우승하는 것을 봤다. 나한테는 그게 농구가 아닌가 생각했다. 내 젊음을 농구에 바친만큼 끝을 보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이어 추일승 감독은 "폴 포츠가 불렀던 노래 중 마지막 구절이 '빈체로(vincero)'라는 말이 있었다. 영어로는 I'll win, 나는 이길 것이다라는 뜻이다. 그 말을 새기면서 한 게임 한 게임 이기고 싶었다. 올해만큼은 챔피언에 오르고 싶었다. 자신있었다"고 말했다.
'흙수저' 추일승 감독의 정상 등극은 세상의 시선을 바꿔놓은 폴 포츠의 성공담과 절묘하게 오버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