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에논', 딸을 잃은 아빠의 찬란한 슬픔

신간 <에논>,퓰리처상 수상 작가 폴 하딩 지음

폴 하딩의 두번째 소설 『에논』은 전작『팅커스』의 주인공 조지 크로스비의 손자인 찰리와 찰리의 딸 케이트의 이야기이다. 전작에서처럼 뉴잉글랜드의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크로스비 집안의 사연을 풀어간다.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품고 있는 이 소설은 ‘상실’이라는 감정을 극한까지 치열하게 파고 들어간다. 『에논』은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 상실의 슬픔에 몸부림치는 세상 모든 이들에게 바치는 고독하고도 아름다운 레퀴엠이다.

“케이트가 죽었어. 차가 쳤대. 그래서 애가 죽었어, 찰리.”

어느 가을날 가족들의 찬거리를 사러 나온 길에 딸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급작스러운 전화를 받은 뒤, 찰리 크로스비는 끝도 없는 절망의 나락 속으로 빠져든다. 깊은 슬픔에 빠져 제 한 몸 가누지 못하는 그를 두고 아내는 친정으로 떠나버리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찰리는 처방받은 진통제를 남용하고 술을 마시며 슬픔을 잊으려 애쓴다. 그러나 그럴수록 딸에 대한 기억은 더욱 선명해지고, 약에 취한 찰리의 눈앞에 죽은 케이트가 기괴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소설은 가혹한 슬픔과 상실에 직면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고통 속에 빠뜨리는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절망으로 무너져 극복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그들이 어떤 순간에 삶에 대한 미약한 희망을 발견하게 되는지를 탁월한 방식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상실에 대한 애도와 슬픔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의 지나치리만큼 상세한 묘사가 이 작품의 전부라 해도 과언은 아니나, 너무나 현실적이고 세밀하게 묘사된 슬픔과 절망이 읽는 이의 마음을 끌어들이며 찰리의 슬픔을 읽는 이에게 고스란히 전달한다. 『에논』은 인간 존재의 근원적이고 필연적인 경험인 상실과 애도를 대가와 같은 솜씨로 그려낸 놀라운 작품이다.

그 빛에 목소리가 있어 케이트가 괜찮다고,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해주기를, 그리고 그 말이 변모하여 내 가슴속 심장이, 내 늑골 뒤에서 차오르는 사랑이, 내 목을 조이는 울화가, 내 눈을 휘젓는 살인적 고통이, 내 코에서 타오르는 유황이, 내 귀에서 울부짖는 허리케인이, 내 컵 속의 분노가 되기를 바랐다. (295쪽)

느닷없이 찾아온 깊은 절망 속에서 마주한
눈부실 정도로 찬란한 생의 순간들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구렁텅이를 헤매던 찰리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심한다. 물에 빠져 죽으려는 시도가 실패로 끝난 후 흠뻑 젖은 몸을 끌고 딸의 무덤가로 돌아왔을 때, 그는 케이트 또래의 소녀들을 만난다. 아이들은 같은 학교에 다녔던 케이트를 기억하고 있었고 약에 취해 밤중에 숲속을 헤매고 다니는 찰리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심지어 케이트의 무덤가에서 아름답게 빛나는 케이트의 유령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그를 장난스럽게 “아빠”라고 부르는 사춘기 소녀들에게서 뜻밖의 위로를 느낀 찰리는 삶을 계속 살아가기로 한다. 일 년간 케이트를 그리워하며 스스로에게 행한 자기파괴적인 행동들을 돌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케이트가 죽은 후 내가 해온 짓이 폭력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슬퍼하거나 상처를 치유하거나 심지어 애도를 하는 것도 아니었고, 딸의 죽음이라는 폭력에 홀려 그것에 의도적으로 매달리는 행위이자, 내 딸을 치어서 그애를 자기 자신과 이 세상에서 멀리 떠나보낸 그 차가 그애와 우리 가족에게 가한 폭력을 고집스럽게 보존하는 짓이었다. (315쪽)

그는 “케이트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었더라면 내 슬픔은 더욱 크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았을까? 내 딸의 짧고도 행복했던 삶이 내 삶의 가장 큰 기쁨이었던 건 아닐까?” 하고 케이트가 그에게 인생의 빛나는 순간을 선사하고 아름다운 기억을 남겨준 것을 감사하게 여기기로 한다. 그리고 삶이 끝난 날에 혹여나 있을지 모르는, 딸과의 재회를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찰리의 절절한 고통과 빛나는 환상은 너무나 생생하면서도 처연하고, ‘찬란한 슬픔’이라는 표현에 꼭 걸맞게 아름답다. 독자들은 찰리가 그러했던 것처럼, 아주 자그마한, 그러나 찬란히 빛나는 희망을 발견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저 한동안 너무 좋은 시간을 보냈기에 사랑과 선에 대한 거짓말을 믿고 거기에 미혹되었던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그 시절을 보내는 동안,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것은 진실이었다. 그것은 내 딸이 죽은 후 겪은 절망만큼이나 진실이었다. (314~315쪽)

◆ 본문에서

케이트의 죽음에 어떤 심오한 선함이나 축복의 의미가 있다는 생각은 상상 속에서는 품을 수 있었고 심지어 그것의 진실성을 받아들일 수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단 한 번도 그렇게 느낀 적이 없었다. 창조에 내가 범접할 수 없는 대단히 큰 의미가 있다고 해서 내 슬픔이 지워지는 것은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41~142쪽)

전 우주를 합친 것과 비교할 때 내 비통함은 별것이 아님을 이해한다 해도 비탄에 빠지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142쪽)

내 딸은 자신의 죽음이 가져온 고통이 가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때로는 내 딸이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슬픔과 분노에 잠긴 나를 보고, 그것이 삶이라는 우스운 비극의 자연스러운 일부임을 이해하기 때문에 웃는다는 느낌. (143쪽)

비록 삶의 굴레에 속박된 나 자신은 케이트와 함께한 삶의 기쁨이, 비록 그것이 훼손될 수 없는 것이더라도, 케이트가 없는 삶과 이루는 극명하고도 파괴적인 대조에 계속 고통받아야 하겠지만. 그 기쁨은 내 비탄의 척도이자 원천이었다. (144쪽)

나는 내 자식에 굶주렸고 무덤에서 나 자신을 먹어치우는 데 골몰했으며, 그리하여 두 세상의 중간쯤에서, 아니면 내가 조금 더 넘어가서, 어느 날 밤 아주 잠깐 동안만이라도 아이와 만날 수 있기를 소망했다. 산 자들의 에논에서 젖은 풀밭이나 낙엽, 또는 눈 쌓인 땅에 맨발을 디디고 다시 일어난 내 딸과, 부디 단 한마디나마, 마지막 인간의 말을 나눌 수 있기를. (181쪽)

새파란 하늘과 휘돌며 물러나는 구름들, 쏟아져내리는 햇살, 밝은 초록색 풀, 땅에 떨어진 가지의 꺾인 끝부분과 단풍나무 몸통에 생긴 상처들에서 빛나는 검푸른 금빛 고갱이, 마당 한가운데 널찍한 웅덩이로 고여 바람에 잔물결을 일으키는 은회색 투명한 빗물, 이 모든 것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워 나는 미소를 지으며 주변을 바라보다 진흙투성이의 젖은 풀 위에 앉아 울었다. (300쪽)

상처 입은 심장도 고동을 멈추진 않기 때문에. (314쪽)

나는 하루를 감정가의 눈으로 바라본다. 때로 나는 앉아서 눈물을 흘린다. 때로 나는 말없이 앉아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가슴 아픈 기쁨을 느낀다. (344쪽)

날이면 날마다, 어딜 가나, 언제나, 네가 너무도 보고 싶다고, 너무도 사랑한다고, 그리고 이건 모두 꿈이라고, 꿈에서는 모두 그런 식이라는 걸 너도 알 거라고, 그리고 단 한순간도 너를 내 마음속에서 지우려 한 적 없다고. (345쪽)

폴 하딩 지음/민은영 옮김/문학동네/352쪽/1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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