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이공학의 시초라 불리는 장영실은 조선이라는 신분제 사회에서 기생의 아들, 천민으로 태어났다. 하루가 멀다 하고 쳐들어오는 왜구에 진저리를 내던 동래현(현재의 부산)에서 그는 어머니의 신분을 이어받아 어릴 적부터 관가에서 노비로 종사했다. 그가 태어난 조선은 유교 질서로 운영되는 계급 사회. 가치가 사실을 지배하는 도덕과 관념의 세계에서 물질과 물리 영역을 다루는 이공 분야가 천시되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중국에 사대해야 하는 조선의 운명 또한 백성들에겐 아득한 한계 지점이었다. 예로 조선은 명나라의 천문을 받아서 써야 할 뿐 스스로 천문을 관측할 수 없었다. 천문 관측은 오로지 황제의 권한이었고, 황제는 대중국의 왕에게만 허락된 지위였다.장영실이 태어난 세상은 이러했다. 자연을 탐구하고 도구를 만들어 내는 재능 따윈 뿌리 내릴 곳 없는 척박한 환경이었다.
주머니 속의 송곳은 튀어나오고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온다
장영실은 주어진 운명을 수용했지만, 그 이상을 추구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어머니가 시켜 주신 글공부를 기반으로 그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만들고, 고치고, 탐구하며 자기 본연의 모습을 긍정했다. 자신 안에 있는 소질이 운명에 가로막히지 않고 자연스럽게 발현될 수 있도록 길을 터놓음으로써 세상에 끊임없이 참여한 것이다. '일월영측(日月盈仄)이요 진숙열장(辰宿列張)이라'는 대목을 읽으며 만물이 순환되는 근본 이치를 끊임없이 고민했고, 화약을 만들어 왜구를 물리친 최무선의 이야기를 어머니께 들으며 기술 발전을 통한 나라의 부강을 꿈꿨다. 틈틈이 동네 아낙들이 사용하는 물레나 씨아기 따위를 더 편리하게 개량하고 고쳐 주었고, 현령을 도와 비의 양을 재는 간단한 도구를 만들어 내며 조금씩, 조심스럽게 세상에 자신을 드러냈다. 장영실의 탐구 정신은 무언가를 준비하던 노력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었고, 그는 어느 사이에 준비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기회는 그런 그를 멀리서 기다리고 있었다.
장영실은 고을 현령의 추천으로 궁중 기술자로 발탁되었다. 그는 궁에서 그의 운명을 뒤바꿔 놓은 장본인, 세종을 만나게 된다. 세종은 조선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우리나라 역사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천재 임금이다. 장영실은 세종에게서 조선의 과학 발전이란 소명을 부여받고 자신의 재능을 극한까지 펼치며 평생을 숨 가쁘게 종사했다. 천민이란 신분에서 벗어나고 조선이란 나라가 지닌 한계를 뛰어넘은 여러 가지 성과는 곁따른 요소였을 뿐, 장영실이 이룬 것은 진정한 자아실현이었다.
장영실은 자기 존재를 주장하는 대신 증명해 보이는 인물상을 대변한다. 이 책은 장영실의 전 삶을 통해 인간은 단지 운명에 순응하는 존재가 아니며,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인생을 개척해 나아가는 강인한 존재임을 깨닫게 해 준다. 불가능으로 점철된 시대 환경과 태생을 뚫고 천민에서 종3품 벼슬아치로 인생 역전을 이룬 장영실. 그의 인생을 초등 눈높이에 맞게 가장 잘 압축하고 요약한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불가능으로 점철된 현재의 우리 시대를 살아감에 있어서도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세상이 요구하는 역할과 소임을 등지지 않으면서도 자기 본연의 재능과 열정을 찾는 탐구 정신, 그리고 그것을 현명하게 발휘하며 세상에 이바지하고 스스로를 증명하는 법을 장영실은 전 인생을 통해 보여 주고 있다.
이 책에는 장영실뿐 아니라 그가 살던 세종 시기를 채운 이천, 윤사웅, 김익정, 정초, 정인지, 박연, 황희, 맹사성 등 여러 역사 인물이 등장한다. 독자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인재를 적극 등용하고 그들의 재능을 장려하며 끊임없는 소통을 통해 학문과 문화를 융성시켰던 조선 초기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천재와 천재가 만나 뜻을 모으고 매진할 수 있었던, 도전과 열정으로 치열하게 들끓던 세종의 시대를 추억처럼 회상하며, 우리는 오늘날 장영실이 시대를 잘 만난 인물로 평가되는 이유를 비로소 납득할 수 있다.
정휘창 지음/파랑새/176쪽/11,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