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전용 악단장' 출신 정요한 "탈북 이유는 신앙"

북한 대표 바이올리니스트, 태진아 앨범서 연주

가수 태진아가 최근 발표한 신곡 '꽃씨'에는 도입부터 수려한 바이올린 독주가 흘러나온다.

연주자는 여느 가수들의 앨범에 참여하는 현악기 세션이 아니다.

세계적인 콩쿠르에서 입상하며 김정일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북한의 대표적인 예술가로 활약한 바이올리니스트 정요한씨다.

정씨는 지난달 수원 안디옥교회에 처음으로 특송 연주를 하러 갔다가 이 교회 예배에 참석한 태진아와 만났다. '어메이징 그레이스'와 '사향가'를 연주하는 그의 바이올린 연주에 태진아는 가슴이 뜨거워졌고 조심스레 앨범 참여를 요청했다. 하나님 안에서 만났다고 생각한 정씨는 처음으로 가요 앨범에 참여했다.

지난 2009년 한국에 정착한 정씨는 최근 용산구 한남동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북에 있는 가족의 생사를 모르는 상황에서 여전히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며 차분히 탈북 이야기를 들려줬다.

◇ 해외 교환교수로 있다가 탈출…"신앙 위해 한국 왔다"

평양 출신인 정씨는 어린 시절 북한의 예술 영재로 발탁돼 김정일 체제의 극진한 지원을 받으며 북한을 대표하는 바이올리니스트로 성장했다. 전국 어린이방송예술 경연대회에서 1등을 하며 유명해졌고 6살에는 기록 영화의 아역 배우로 출연해 김정일의 눈에 들었다.

평양 음악대학과 러시아 차이콥스키 음악원을 졸업한 그는 차이콥스키 콩쿠르 등 세계적인 콩쿠르에서 다수 입상했다. 이후 김정일 전용악단의 악장 겸 단장을 8년간 역임했다. 평양 음대 교수로 재직하고 동유럽 대학 교환 교수로도 있었다. 탈북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동유럽 대학의 교환 교수로 있을 때였죠. 한 유럽인 교수가 '얼굴색이 안 좋은데 교회에 가보라'고 했어요. 저도 모르게 '할아버지가 기독교 장로였다'는 얘기를 평생 처음으로 털어놓았죠. 유학 시절이나 해외 공연 때도 하나님을 접할 기회가 여러 번이었지만 북에서 세뇌받은 대로 거절했는데 그때만큼은 마음에 와 닿았어요."

어느 주일 그는 마침내 유럽의 한 교회 문앞에 섰다. 교수 대표단으로 해외에 있을 때도 십자가를 보면 길을 둘러 갔고, '남조선 사람들이 교회에서 북한 사람을 유괴할 수 있다'고 선동하던 그였다. '되돌아갈까' 몇 번 고민하다가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찬송가 멜로디에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한다. 순간 두 번 다시없는 기회란 생각에,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싶단 심정에 예배당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그는 "예배 내내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을 줄줄 흘렸다"며 "4살에 바이올린을 시작할 때 할아버지가 나를 안고 늘 기도하신 기억이 났다. 할아버지는 기독교 장로란 이유로 평양에서 추방돼 핍박받다가 돌아가셨다"고 떠올렸다.

두 달 반 정도 주일마다 교회를 가자 결국 발각되고 말았다. 고가의 독일산 바이올린을 저당잡히고 도피 자금을 마련한 뒤 브로커와 NGO의 도움을 받아 한국 땅을 밟았다.

"여러 나라를 거치면서 여느 탈북자들처럼 죽음의 고비가 있었죠. 불법 체류이니 경찰에 붙잡히면 북송될 위험에 늘 노출돼 있었어요. 한국에 오기까지 5개월이 걸렸는데 수년이 걸린 분들에 비하면 전 그나마 고생을 덜 한 겁니다."

그는 탈북 이유를 묻자 "한가지 이유"라며 "하나님을 마음껏 믿는 세상에서 살고 싶었다. 신앙 때문에 온 것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처음 남한에 와 조사받을 때도 기독교 때문이란 걸 믿지 않는 눈치더라"고 말했다.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주체 사상에 길들어 있었기에 신앙을 택할 수 있었다고 했다.

"주체 사상의 본질이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신이고 운명을 개척하는 힘도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에요. 바꿔 말하면 혁명과 건설의 주인도 인민 대중이란 것이죠. 때문에 제 의지대로 신앙을 택할 수 있었고 후회는 없습니다. 하나님 아래서 살 수 있는 것에 감사할 뿐이죠."

◇ 김정일, 전용악단서 지휘봉 잡기도…"탈북자 정착에 힘쓸 것"

그는 북한에서 클래식 신동으로 인정 받아 방송과도 인연이 있었다. 기록 영화도 찍고 집에는 기자들이 찾아오기도 했다.

김정일이 영화와 악기 연주 등 예술에 조예가 있고 관심이 높은 터라 할아버지가 종교 탄압을 받았지만 가정환경과 별개로 영재로 인정받고 키워졌다. 그는 바이올린, 창작, 지휘 등을 아울렀다.

그가 맡은 김정일 전용 악단의 악단장은 모란봉악단 현송월 단장과 비슷한 위치라고 한다.

"북의 예술단체들은 철저하게 인민 대중의 선전 선동 수단입니다. 전용 악단은 김정일의 수준 높은 정서 생활을 위한 것이기도 해 지휘자가 있지만 김정일이 가끔 지휘봉을 잡기도 했죠."

악기는 개인 급수에 따라 국가에서 대여해줬다. 보통 예술단이 다루는 악기는 국가에서 제공해주고 급수가 더 높은 사람이 오면 넘겨주는 식이었다. 그는 북한에서 김정일이 거금을 들여 사온 세계에서 몇 대 안 되는 고가의 이탈리아산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그는 "한국 교회에 처음 찬양하러 갔을 때도 악기를 대여해주는 줄 알았다"며 "개인 악기가 필요해 10만원을 들고 악기사에 갔는데 내가 고른 게 300만원이더라. 100달러면 얼마든지 연습용을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악기사 사장님이 처음 보는 내게 그 악기를 공짜로 주시더라. 지금도 그곳에 다닌다"고 웃었다.

한국의 한 기도모임에서 만나 2011년 결혼한 그의 부인도 평양 음대를 졸업한 피아니스트다. 함께 자리한 부인은 탈북자 기도 모임이 아니었는데도 그곳에서 운명처럼 만났다고 했다. 정씨는 이 기도모임에서 북과는 인연도 없는 교인들이 진심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을 '오픈' 할 마음도 먹었다고 했다.

이후 그는 KBS 교향악단과 대학에서 섭외를 받았지만 거절하고 대신 군부대를 방문해 안보 강연을 하고 찬양 간증을 하기 시작했다. ㈔한국기독교탈북민정착지원협의회 홍보대사도 맡았다.

그는 "육군, 공군 등 여러 부대를 방문한다"며 "며칠 전에도 논산훈련소에서 강연을 하고 연주를 했다. 아내가 늘 피아노 연주를 함께한다"고 말했다.

그는 탈북자이니 부모, 형제에 대한 그리움과 통일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기도와 찬양이라고 강조했다.

"김정은 체제에서 잡음이 많이 나는 건 기강이 불안 하다는 것이죠. 영적으로는 통일이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열심히 찬양하며 탈북자들의 정착을 위해 힘쓰고 예술적인 측면에서 통일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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