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가룟 유다는 왜 예수님을 배반했을까?

(사진=스마트이미지 제공)
고난 주간에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다가 가룟 유다의 배신과 배반이 있었기에 예수님의 구원사역도 이뤄졌다는 가롯 유다 '구원사역설'에 대해 생각해본다.

예수의 고난을 기념해야 할 고난 주간에 갑자기 가룟 유다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한창 지적 호기심이 많은 청소년들이나 믿음이 연약한 크리스천들이 때로는 신학계 일부에서조차 가룟 유다가 재평가 받아야 하지 않느냐는 주장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은 "가룟 유다는 억울하다. 가롯 유다는 선지자들이 예언한 대로 했고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그는 오히려 희생양"이라는 것이다.

더 들어가면 "가룟 유다가 아니었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사형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그렇게 했으면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의 보혈과 그 능력도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라는 주장이다.

결국 "가룟 유다는 구약 예언의 실행자로서 구약의 어느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일을 했다고 볼 수 있으며 그는 구약 예언의 희생물이다"라는 주장이다.

과연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위한 희생물일까?

얼핏보기엔 아귀가 들어맞는 그럴듯한 논리이다

성경의 특정 부분만 보면 '가룟 유다가 예수의 구원 사역을 위한 도구와 보조재로 쓰인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면 '가룟 유다가 희생양'이라는 등의 일부 주장은 절대 사실이 아니며 예수님의 뜻도 아니라고 판단된다.

특히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요13:27)'는 예수님의 말씀이 문제가 되는 듯 하지만 성경 전체 문맥을 보면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게 배반을 강요하거나 부탁한 것으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

논란이 되는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는 이 구절은 '예수님이 그의 제자 중 하나였던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려고 계획하는 일을 은연중에 알고 어쩌면 실망감에 빠져 가룟 유다의 행위를 지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당시 이 말을 같이 들었던 현장의 제자들도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요13:28~29)

이는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예수님 당신이 십자가에 매 달리도록 가룟 유다에게 무슨 은밀한 부탁을 했거나 강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잡혀가시기 전 그가 사랑하는 12제자들과 가진 최후의 만찬에서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은 그가 나를 팔리라.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26:23~24,막14:21,눅22:22,)"라고 까지 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 것이라는 것에 대해 어떤 경로인지는 모르지만 사전에 정보를 얻은 것으로는 보인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라고 일컬음 받고 군중을 소요한 죄목으로 조사를 판받고 처형될 정도로 당시 그를 따르는 군중이 대단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추종하는 수많은 무리 중 누군가 예수님에게 가룟 유다가 당신을 밀고할 것이라는 고급정보를 건네 주었을수도 있고 아니면 예수님은 육신을 입으셨지만 신성(神性)을 가지신 분이셨기에 스스로 그 정보를 인지하셨을지도 모른다.

어떤 방법으로든 그 정보를 안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마음이 매우 섭섭했을 것이고 번민과 고뇌로 불면의 밤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천하만민의 구원사역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사 세상을 이기셨듯이 예수님은 자기 제자의 배반 음모에도 결코 슬퍼하거나 화를 내는 등의 흐트러짐 없이 의연하게 대처하는 리더의 모습을 보여줬다고 해석하는게 맞지 않을까?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자신이 죽임을 당할 것으로는 미리 알고 있었으나 그 방법이 자신이 사랑하는 제자의 배반을 통해서 이뤄 질 줄은 처음에는 몰랐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성경에는 선지자의 예언 등을 통해 유대 땅에 메시아가 오셔서 고통 당하시고 죽으시나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다는 기록은 있으나 그 메시아가 그의 제자에 의해 배반당하고 팔린다는 예언이 성경 어디에도 없지 않는가?

즉 예수가 배반을 당하는 것은 예정된 것이지만 그 범인이 가룟 유다로 예정된 것은 아닌 것이다.

성경은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것은 예수님의 허락이나 사주에 의한 것이 아니라 돈 때문에 자기 이익을 위해 음모를 하고 실행한 것으로만 여러곳에서 기록하고 있다.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롯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그가 그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마26:14~16)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라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그들이 듣고 기뻐하며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막14:10~11)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매 그들이 기뻐하며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 (눅22:3~6)

즉 가룟 유다는 공의가 아니라 '은 삼십'을 받고 그 대가로 주군이자 하나님의 아들을 팔아 넘겼기 때문에 그는 분명히 배신자와 배반자일 뿐이지 결코 희생양이나 공로자일 수는 없는 것이다.

가룟 유다는 뒤늦게나마 자신이 막역무도한 잘못을 저지른 죄인인줄 알고 회개했으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놓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마 27:3~6)

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행1:18)"며 가룟 유다의 비참한 최후를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성경에 따라 정리하면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사전에 교감하거나 허락을 받는 등의 의사소통은 전혀 없이 자기 생각대로 행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역사상 가장 흉악한 반역을 저질러 가룟 유다가 얻게 되는 돈이 겨우 '은 삼십'인데? 이런 점에서는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동기를 전적으로 금전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조금 무리인 것으로도 여겨진다.

어떤 이유일까?

그것은 금전적 이유가 아니라 가룟 유다가 예수님에 걸었던 기대가 실망으로 돌아섰기 때문이 아니였을까 싶다.

그 단서와 역사적 흔적을 찾기위해 2천년 전 예수님이 살던 그 시대로 잠시 돌아가 보면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 명을 먹이고 물을 포도주로 만들고 나병환자와 중풍병자 등 각종 병든자를 깨끗히 낫게 하고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기적을 두루 목도한 시대적 증인이였다.

그는 '예수님이 신의 아들이자 그가 곧 신'이라는 명제(命題)를 확실히 믿었으리라 본다.

가룟 유다는 그런 전지전능하신 예수님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켰듯이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 총독이던 당시에도 로마의 지배에서 자기 백성들을 구해내고 독립할 수 있는 정치적 메시아로 믿었을 것 같다.

가룟 유다는 그런 대단한 예수님을 자기가 만났다는 것에 대해 너무나 큰 행운으로 생각하고 세상 끝날까지 예수님을 따라가려고 작정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예수를 반역할 생각은 애초 추호(秋毫)도 없었던 것이다.

사실 가룟 유다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향해 충성심으로 불탔던 사람으로 소위 열심당원이였으리라.

열심당은 당시 로마의 폭정을 전복시키고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기를 열렬히 고대했던 혁명적인 사람들로 조직되었고 그들은 과도하리만치 정치적 열심을 지니고 있던 열혈분자들이었다.

예수님이 이런 가룟 유다를 제자로 선택할 때 무슨 잘못이 있었을까?

예수님은 가룟 유다로부터 열심당원의 열정을 발견하고 그를 많이 신뢰해서 그에게 돈 주머니를 맡기신 것이리라.


어느 조직이든 회계(會計)와 재정(財政)은 가장 신임받는 사람에게 위임하는 법이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교화시킬 목적으로 부적격자인 그를 뽑으신 것도 결코 아니리라. 예수님은 분명히 그에게 무언가 훌륭한 점을 보신 것일거다.

그런데 왜 어떻게 가룟 유다는 배반의 칼을 들게 된 것일까?

가룟 유다는 원래 예수님을 배반할 뜻은 전혀 없었다. 당시 예수님이 가는 데마다 모여드는 군중들의 세 결집으로 볼때 조만간 로마군을 물러가게 하고 예수님이 왕이 되는 나라가 만들어지게 되면 자기의 시대도 도래한다고 내심 들떠 있었을 것 같다.

그런 가룟 유다가 예수님이 가장 고독했던 밤 그는 왜 자신의 스승에게 '칼날보다 더 찬 배반의 입맞춤'을 하게 됐을까?

도대체 둘 사이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실상 가룟 유다는 먼저 배반을 당했기 때문이다. 무엇이 그를 배반했을까? 그것은 누구였을까? 그것은 그의 기대가 배반당한 것이였다.

열심당원인 가룟 유다는 자기가 모시는 예수님이 로마 제국을 무너뜨릴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후 자신도 예수님이 왕이 돼 통치하는 새 나라의 고관대작(高官大爵)에 앉을 것으로 기대하면서 킹 메이커의 꿈을 꿨을 것이다.

그는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때가 되면 신통력을 부려 천군천사가 내려오든지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을 것 같다.

그래서 천군천사의 손에 로마군들이 한칼에 모두 베임을 당하고 예루살렘을 핏물로 어지럽혔던 로마의 십자가 형틀은 모조리 불살라지게 될 날이 곧 올 것이라는 믿음에 의심이 없었으리라.

특히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했을 때 예수님을 기다리던 군중들이 "그들의 겉옷을 벗어 길에 펴고 예수님이 타신 나귀 앞을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하면서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환영하고 지지하는 군중들의 세력을 볼 때 가룟 유다는 더욱 자신의 믿음을 확신하면서 예수님이 날을 택해 그 거사일 만 지시해 줄 것을 학수고대(鶴首苦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가룟 유다에게 예수님은 그 거사를 실행하기는커녕 당신이 그 십자가들 중 하나에 매달리게 될 것이라는 말을 스스로 하시고 최후 만찬까지 하시자 너무 충격을 받아 정치적 패배감과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가룟 유다에게는 '예수님이 곧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라'(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마26:2)고 제자들에게 한 이야기는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꿈을 실현하려던 혁명가 가롯 유다에게는 청천벽력(靑天霹靂)과도 같았을 것이다.

일이 이쯤되자 마침내 실망과 분노에 찬 가룟 유다는 거사가 틀렸다고 판단하고 대제사장을 찾아가 자초지종 예수님을 넘겨줄 방법을 모의했을 것이다.

이런 가정과 추론이 가능하다면 가룟 유다는 돈이 아니라 자기가 꿈꿨던 정치적 기대와 야망에 대한 실망감과 낭패감으로 예수님에 대한 인식과 충성심이 근본적으로 흔들렸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룟 유다만을 정죄할 순 없다.

가룟 유다는 며칠 전 까지만 하더라도 겨우 '은 삼십'에 자신이 모시던 주군 예수를 배신하면서 역사상 가장 유명한 배반자로 낙인찍히게 될 줄은 꿈도 꾸지 못했으리라.

배반의 역사는 가룟 유다에서 끝이 났는가? 그렇지가 않아 문제다.

요즘 교회와 관련된 각종 불미스러운 사건들로 인해 '개독교', '먹사'라는 말까지 나오는 등 한국교회의 위상이 나락으로 추락하면서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형국이 됐으니 참으로 개탄스럽다.

특히 물의를 빚고 있는 거의 모든 사건들이 작은 교회보다는 중·대형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고 기도와 말씀 준비 등 목사 본연의 일보다는 각종 명예와 감투를 쫓아다니며 세상일로 바쁜 정치목사들이 관련되어 있으니 이것이야 말로 '은삼십'에 예수를 팔아먹은 가룟 유다와 다를게 뭐가 있겠는가?

정치목사, 장로들을 비롯해 지탄받는 크리스천들의 문제점은 예수님이 버린 '물질과 권세, 명예'를 다 주어 섬기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들이 입으로는 예수를 말하나 과연 그들 안에 예수가 있을까?

영국 크리스천 문학가, C.S 루이스(C.S. Lewis) 말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동안만 그리스도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동안 주님이 나를 지배하기 때문이다"라고.

세상 것을 예수 십자가에 다 내려놓고 예수님이 타고 가신 새끼 나귀처럼 주의 사역에 쓰인바 되고 예수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고난 주간이 되길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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