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시 18분, 123정 부정장 김종인은 어선들을 향해 확성기를 틀었다. "어선들 철수해, 어선들 철수하라고!" 123정은 빵빵 기적을 울리며 어선들이 세월호에 다가가는 것을 막았다. 느린 속도로 움직이며 세월호 근처로는 가지 않았다. 간격을 유지했다. 이때 진도 VTS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문이 잠겨 한 학생이 탈출하지 못한다"는 상황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123정은 "접근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세월호 안에는 여전히 승객들이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월호, 그날의 기록> (171~172쪽)
123정 기관장 최완식은 당시 접안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고 밝히기도 했고 선미에 접안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으로 보이는 정황들이 있다. 너무 멀리 떨어져서 마치 '강 건너 불 보듯' 하며 소극적 으로 임한 것이 문제였다. 구명보트에서 구조한 승객을 빨리 태울 수 있도록, 그래서 더 많은 승객을 구할 수 있도록, 세월호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접근했어야 하지만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123정이 되도록 세월호에서 멀찍이 떨어지려고 한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유추할 수 있는 단서가 있다. "직원들한테 들은 이야기는 세월호가 침몰하는데 123정이 가까이 있으면 같이 침몰하게 되니까 배를 뺐다"는 의경 박○○의 진술이다.(302~303쪽)
세월호 사건의 진실에 다가서기 위해 <세월호, 그날의 기록>이 출간되었다. 700쪽 분량의 이 책은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이 10개월 동안 방대한 기록과 자료들을 분석한 결과물이다. 15만장에 가까운 세월호 관련 재판 기록과 국회 국정조사특위 기록 등 3테라바이트(TB)의 자료를 분석했다. 각 자료와 기록을 인용할 때마다 주석을 달아서 정확성을 기했다. 주석은 2281개다.
<세월호, 그날의 기록>은 2014년 4월 15일 저녁 세월호가 인천항을 출항한 순간부터 4월 16일 오전 10시 30분 침몰할 때까지 세월호 안과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생생하게 재현했다. 배가 급격히 기울어졌을 때 조타실 상황과 승객들의 모습, 승객을 버리고 가장 먼저 도주한 선원들의 대화, 해경 경비정에 옮겨 탄 선원과 해경의 대화, 그 후 해경이 지휘부에 보고한 내용, 사고 소식을 들은 청해진해운이 감추려 했던 장면 등을 눈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려냈다.
세월호의 마지막 교신을 찾아내다
09:40 SSB 제주 운항관리실-세월호 [음성]
제주 운항관리실: 세월호, 세월호, 해운제주 감도 있습니까?
세월호: 네, 세월호입니다.
제주 운항관리실: 혹시 경비정, P정 경비정 도착했나요?
세월호: 네, 경비정 한 척 도착했습니다.
제주 운항관리실: 네, 현재 진행 상황 좀 말씀해주세요.
세월호: 네, 뭐라고요?
제주 운항관리실: (다른 담당자가 전화 바꿔 받음) 네, ○○님 현재 진행 상황 좀 말씀해주세요.
세월호: 네, 경비정 한 척 도착해서 지금 구조 작업 하고 있습니다.
제주 운항관리실: 예, 지금 P정이 계류했습니까?
세월호: 네, 지금 경비정 옆에 와 있습니다. 그러고 지금 승객이 450명이라서 지금 경비정 이거 한 척
으로는 부족할 것 같고, 추가적으로 구조를 하러 와야 될 것 같습니다.
제주 운항관리실: 네, 잘 알았습니다. 지금 선체는 기울지 않고 있죠?
세월호: (대답 없음)
세월호가 외부와 나눈 '마지막 교신'을 공개했다. 사고 발생 후 세월호와 교신을 유지한 곳은 진도VTS밖에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은 제주 운항관리실도 세월호와 교신을 유지했고, 1등 항해사 신정훈이 9시 40분 "승객이 450명이라서 경비정 한 척으로는 부족하고 추가로 구조하러 와야 된다"고 교신한 것을 확인했다(131~132쪽). 선원들은 교신 도중 세월호에서 도주했다. 이 마지막 교신은 검찰과 법원, 국회, 감사원에서도 공개되지 않았다.
마지막 교신을 통해 세월호 선원들이 조타실에서 승객에 대한 퇴선 명령 없이 도주한 이유가 드러났다. 승객에게 퇴선을 명령하면 선원들의 탈출 순서는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대법원은 세월호 선장에게만 살인죄를 인정했다. 이 교신 내용은 세월호 선장뿐 아니라 다른 간부 선원들에게도 승객을 버리고 도주한 책임을 무겁게 물을 수 있는 진실의 한 조각이다.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추가 조사가 필요해 보인다.
"대기하라" 12차례 선내 안내방송을 순서대로 복원
승객이 촬영한 동영상과 선원들의 진술을 토대로 선내 안내방송을 복원했다. 배가 기울어진 8시 52분부터 9시 45분까지 최소 12차례의 선내 방송이 이어졌다. 선내에 대기하라는 방송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려졌지만, 한 시간여 동안 그렇게나 많이, 집요하게 되풀이했다는 점은 드러나지 않았다. "더 이상 밖으로 나가지 마시기 바랍니다"라는 여객부 선원 강혜성의 선내 대기 방송은 탈출하려는 승객들의 의지를 꺾었다. 누가 봐도 탈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급박한 상황에서 승객의 탈출을 가로막은 심각한 판단 착오였다. (560-561쪽)
1부 '그날, 101분의 기록'은 4월 16일 오전 8시 49분 급격히 우회전해 왼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할 때부터 세월호의 위성조난신호를 확인한 10시 30분 29초까지 세월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생생하게 재현했다. 세월호 관련 재판 기록, 희생자들이 남긴 동영상, 카카오톡 대화, 문자메시지, 생존자들의 증언이 토대가 되었다.
3층 난간으로 가려면 4층 객실 창문 위를 가로질러야 했다. 아래로 추락하지 않으려면 창에 바짝 붙어서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두 항공구조사는 두 발을 창틀에 딛고, 두 손은 창문과 외벽을 짚으며 기다시피 이동했다. 항공구조사가 이동한 창문 아래는 SP-3 객실이었다. 이 객실에는 12개의 창문이 있고 일부 창으로는 SP-2 객실도 볼 수 있는 구조였다. 가로 1.5미터, 세로 1미터 크기의 창문 아래에서는 학생들이 "살려달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단원고 2학년 3반 31명이 머문 방이었다.(146쪽)
2부 '왜 못 구했나'는 101분 동안 기울어져가는 배에서 해경이 승객을 구하지 못한 이유를 짚었다. 전남 119 종합상황실에 첫 신고 전화가 온 8시 52분부터 해경 경비정이 사고 현장에 출동한 9시 34분까지, 그리고 배가 완전히 침몰하기까지 어떤 일을 했는지 추적했다. 지휘하지 않는 지휘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상황실, 현장에 가지 않은 현장 책임자가 있었다. 현장 영상과 사진을 요구하며 구조를 어렵게 한 권력의 손도 확인했다. 사고 해역으로 출동한 구조 세력과 해경 지휘부가 나눈 교신과 현장 상황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서 분석했다. 구조 실패를 감추기 위한 해경 지휘부의 은폐, 조작도 짚어냈다.
123정이 현장에 도착해 9시 36분, “배가 50도 기울었다”고 보고했지만 해경 본청 상황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관계기관과 통화하며 여객선이 약간 기운 상태로 "침몰 위험까진 없"다고 여전히 낙관했다. 안전행정부가 구조는 문제없겠다고 전망하자 본청 상황실은 인원이 많이 탔지만 "인근 배들이 있기 때문에", 구조에 문제가 없다고 "추측"한다고 말했다. 옆으로 기울어진 상태라도 큰 배는 부력을 이용하면 "그대로 침몰은 안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225쪽)
"구조나 이런 것을 지휘"하는 데 관심이 없는 청와대는 해경의 구조 활동을 뒤흔들었다. 세월호가 뱃머리만 남기고 침몰하던 10시 30분까지 청와대-해경 핫라인은 평균 3분 간격으로 울려댔다. 구조를 지원하는 상선의 톤수가 얼마인지, 사고 현장과 구조된 사람을 옮기는 섬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시시콜콜 묻고 또 물으며 끊임없이 영상을 요구했다. "현장을 확실히 봐야 정확한 보고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청와대의 요구는 해경의 지휘 계통을 타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123정까지 어김없이 전해져 결국 123정이 "구조 활동에 전념하기 어렵게 했다". 침몰하는 여객선에서 승객을 구해야 할 123정 대원들은 사진을 찍고 사람 수를 세느라 바빠졌다. 현장 구조 세력이 제대로 구조 활동을 하는지 지휘·감독해야 할 해경 지휘부도 덩달아 청와대 보고에 더 신경을 썼다. 해경청장 김석균은 아예 "상급부서에 보고하는 것"이 자기 역할이라고 주장할 정도였다.(307~308쪽)
3부 '왜 침몰했나'는 세월호의 침몰 원인을 심층적으로 분석했다. 일본에서 18년 이상 운행한 나미노우에호를 인수해서 더 많은 화물을 싣기 위해 증·개축한 세월호. 2013년 3월 15일 취항한 세월호는 막상 운항을 시작해보니경제성이 없었다. 적자가 나는 세월호의 수익을 내기 위해 상습적으로 화물을 과적했다. 면허가 있어야 하는 고박마저 고박 전문 업체가 아닌 하역 업체에 맡겼다. 실을 수 있는 양보다 더 많이 적재된 화물을 감추기 위해 청해진 해운은 배의 평형수를 줄였다. 감독 의무가 있는 자는 그냥 넘겼고, 조작하는 자는 아무렇지 않게 이를 계속했다. 이런 상태의 세월호가 어째서 그날, 2014년 4월 16일 침몰했는지 알아봤다. 세월호의 AIS 항적도 조작에 대한 의혹도 살펴보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어떤 자료가 공개되어야 하는지 제언했다.
4부 '대한민국에서 제일 위험한 배, 어떻게 태어났나'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위험한 배"로 증·개축한 세월호가 여객 운항에 대한 인허가를 받는 과정을 되짚어봤다. 인천항만청, 한국선급, 인천해경 등 국가기관의 관리·감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사고 이후 청해진해운이 돈을 줬다고 진술한 공직자 중 다수가 기소조차 피했다. 기소된 경우에도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받았고 증거가 있는 경우에도 '사회 상규에 반하는 정도'가 아니라는 이유로 풀려났다. 공무원을 관리하는 '한국적 정서' 안에서 "대한민국에서 제일 위험한 배"가 태어났다. 국정원, 끝나지 않은 의문도 살펴봤다.
5부 '구할 수 있었다'는 이 책의 결론에 해당한다. 구할 수 있었다! 선원이 구할 수 있었고, 해경도 구할 수 있었다. 구조할 시간도 구조할 세력도 있었다. 없었던 것은 구조 계획과 책임자였다. 여객선이 재난에 처했을 때 선장과 선원들, 그리고 해경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밝혔다. 선장의 '도주' 명령에 따랐다는 이유로 간부선원들의 살인 혐의를 벗겨준 대법원 판결의 문제점도 지적했다.
참사 1년 후, 한 아버지와의 만남이 낳은 결실
<세월호, 그날의 기록>은 2015년 봄, 한 아버지와의 만남에서 시작됐다. 박수현 학생은 참사 당일 세월호 B-19 객실에 있었다. 그는 15분여 동안 세월호의 마지막 순간을 휴대전화 동영상에 담았다. 소금기 걷힌 휴대전화에서 동영상을 발견한 아버지 박종대 씨는 이를 수현이가 남긴 숙제로 생각했다. 아버지는 세월호에 대한 기록을 모았다. 매일 새벽 3시, 아들의 책상에 앉아 기록 더미를 읽어 내려갔다. 세월호 관련 재판이 진행될수록 기록은 쌓여갔다.
박종대 씨와 세월호 유족들이 건너야 할 시간은 그대로 '진실의 힘'이 견뎌온 시간이었다. '진실의 힘은 1970~80년대 군사정권하에서 간첩으로 조작되었다가 재심 재판을 통해 무죄를 밝혀내고 손해배상을 통해 국가 책임을 추궁하는 데 성공한 이들이 만든 단체다. 진실을 밝히는 길이 얼마나 고된지 몸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박종대 씨에게 함께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을 만들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날부터 지금까지 사건을 취재해온 한겨레21 정은주 기자와 20대의 젊은 박다영 씨, 박수빈 변호사, 박현진 씨가 '세월호 기록'이라는 이유만으로 참여했다. '진실의 힘' 조용환, 송소연, 강용주 이사와 이사랑 간사가 '세월호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진행했다.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은 이번 출간 작업을 이렇게 회고했다. "<세월호, 그날의 기록>은 평범한 시민의 눈을 조명탄 삼아 깊은 바다,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용기 있게 그날을 기록하고 증언한 세월호 희생자, 생존자들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피해자 가족협의회와 유족들은 희생자들이 세상을 향해 남겨놓은 마지막 목소리를 실명으로 사용하도록 허락해줬다"고.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 출판사 진실의 힘/ 700쪽/2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