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대결 현장> 계산기에 도전한 암산王, "수세에도 돌 안 거둬"

'5시간' 아름답고 인간만이 해낸 승부… "계산기와 끝까지 싸워보겠다는 투지"

15일 서울 포시즌스 호텔에서 이세돌 9단과 구글 인공지능(AI) 알파고의 제5국이 펼쳐지고 있다. (사진=한국기원 제공)
"인간을 들었다 놨다"한 세기의 대결이 막을 내렸다. 이 9단이 연거푸 3연패를 당하면서 우승은 알파고에게 돌아갔지만 그래도 이 9단은 포기하지 않았다. 충격 속에서도 알파고의 약점을 간파한 그는 결국 4국에서 알파고를 상대로 180수만에 불계승을 거뒀다. 5국 가운데 값진 1승을 얻어낸 이세돌 9단은 거의 외계인의 침략에서 지구를 구해낸 영웅이 됐다.

5국에서도 그는 슈퍼컴퓨터를 상대로 절대 물러나지 않았다. 5국 시작 5시간 만에 이 9단은 흰 돌을 올렸다. 아름다운 명승부였다. 대국장에는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날 오후 1시부터 서울 광화문 포시즌 호텔에서 열린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마지막 5국을 26분 앞둔 12시 34분, 이 9단은 딸과 함께 대국장으로 입장했다.

여느 때처럼 하늘색 와이셔츠에 남색 정장 차림을 한 그는 아빠 손을 잡는 대신 아이스크림을 손에 든 딸을 챙기면서, 입을 굳게 다물고 담담한 표정으로 들어섰다. 빨간색 바지에 회색 코트를 입은 딸은, 아빠가 대단한 사람인 걸 아는지 모르는지, 쏟아지는 카메라 플래시와 그를 주목하는 국내외 취재진이 그저 신기한 눈치다.

이세돌 9단이 15일 구글 인공지능(AI) 알파고와의 제5국에 앞서 딸 혜림양과 함께 하고 있다. (사진=한국기원 제공)
1시 정각이 되자, 흑돌을 잡은 이 9단의 제한시간 2시간에서 초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 9단은 검지를 중지 밑에 넣고 그사이에 검은 돌을 끼워, 차분히 반상에 올린다. 알파고 사냥이 시작됐다.

이 9단은 어떤 돌도 돌처럼 취급하지 않았다. 고개를 쑥 내밀어 바둑판 가까이 댔다가, 몸을 다시 뒤로 젖히면서 멀리 바라봤다, 미간도 찌뿌려보고 한쪽으로 노려보면서 신의 한 수를 둘 곳을 찾았다.

그는 경기 초반 흑 17로 승부를 던졌다. 대국장 해설자도 흥분했다. 그러나 알파고는 그 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마치 그런 수는 없다는 듯이 다른 곳에서 자기 길을 이어갔다. 몸을 뒤로 젖히는 이 9단의 어깨에서 얕은 한숨이 느껴졌다.

그는 매 수마다 "알파고라면 어떻게 둘까"를 염두에 두는 모습이었다. 오른손으로 턱을 괴었다가, 관자놀이를 짚으면서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이날 해설을 맡은 김성룡 9단은 "이세돌 저 표정은 신난 표정"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이 9단은 평소 대국 때처럼 상대방 얼굴을 보며 그 사람의 기운을 파악하고, 다음 수를 내다보듯, 아자황의 얼굴을 쳐다보기도 했다. 아자황이 두는 것도 아닌데도 그를 보면서라도 알파고의 수를 알아내고 싶어 하는 승부사 기질이 느껴졌다.


경기가 1시간 정도 접어들면서 해설을 맡은 김 9단은 "왔네, 왔어. 그분이 오실 것 같다"면서 이 9단의 승리를 점치기도 했다. 또 "알파고의 실수인 것 같다"는 분석이 나올 때도 그는, 흑돌을 잡고 손을 바둑판 가까이 댔다가도 다시 돌통으로 옮기면서 놓았다 쥐었다 신중한 태도를 이어갔다.

제한시간 2시간 중 절반이 지났을 때, 이 9단 특유의 계산법 오른손 검지로 돌통을 톡톡톡 두드리는 모습이 나왔다. 이번 대국은 "쉽지 않다"는 걸 알려주는 듯 했다.

15일 서울 포시즌스 호텔에서 이세돌 9단과 구글 인공지능(AI) 알파고의 제5국이 펼쳐지고 있다. (사진=한국기원 제공)
경기 중반으로 접어들수록 알파고는 지난 대국에서까지 보여줬던 '알파고다운', 기존 바둑에 없던 수로 이 9단을 공격해갔다.

이 9단 또한 알파고를 '장고'로 몰아갔다. 지난 4국에서는 이 9단과 알파고의 제한 시간 차이가 2배 이상 벌어졌다. 4국 초중반에 제한 시간을 모조리 써버리면서 후반에는 이 9단에게 1분 초읽기 말고는 '생각 시간'이 없어, 보는 사람들의 심장을 졸이게 했다.

알파고는 마지막 대국에서도 강했다. "하루 쉬어서 과부하와 버그가 해결됐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로, 알파고는 3국에서처럼 강력한 모습으로 나갔다. 김 9단은 알파고를 두고 "마치 전성기 때 이창호 9단을 보는 것 같다"며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알파고에 소름 끼쳐했다.

경기가 중반으로 접어들자, 이 9단은 '쎈 돌 램프' 주문에 나섰다. 주먹 쥔 왼손 등을 오른손 엄지로 어루만지는 이 9단의 대국 습관인데, 이를 두고 이세돌이 "마법을 부린다"고 한다.

그가 초 집중력을 발휘할 때 보이는 모습이다. 바둑계에서는 이 9단이 '마치, 승리의 주문을 외우는 듯한, 램프를 만져 지니를 부르는 듯한 모습'이라고 해서 그렇게 붙여졌다.

후반으로 접어들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입 한쪽을 올리면서 눈도 같이 찡긋하는, '안되겠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표정도 지어보였다. 그래도 끝까지 계산으로 이겨보겠다는 집념을 보였다. 그러나 램프의 요정은 나오지 않았다. 1202대의 슈퍼컴퓨터를 인간 한 명이 이기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다.

경기가 시작된 지 4시간 30분이 넘어가고, 알파고가 이겼다는 해설이 계속 나오는데도, 이 9단은 흑돌을 계속 집었다. 김 9단은 "프로들은 졌다는 걸 안다(이세돌도 이미 안다)"면서 "그럼에도 계속한다는 것은 계산기와 끝까지 해보겠다"는 걸 뜻한다고 말했다.

이 9단은 경기 시작 5시간 만에 흰 돌을 올렸다. 7집 반이 불리한 흑돌로 싸우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아름다운 경기였다.

추천기사

실시간 랭킹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