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국에서도 그는 슈퍼컴퓨터를 상대로 절대 물러나지 않았다. 5국 시작 5시간 만에 이 9단은 흰 돌을 올렸다. 아름다운 명승부였다. 대국장에는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날 오후 1시부터 서울 광화문 포시즌 호텔에서 열린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마지막 5국을 26분 앞둔 12시 34분, 이 9단은 딸과 함께 대국장으로 입장했다.
여느 때처럼 하늘색 와이셔츠에 남색 정장 차림을 한 그는 아빠 손을 잡는 대신 아이스크림을 손에 든 딸을 챙기면서, 입을 굳게 다물고 담담한 표정으로 들어섰다. 빨간색 바지에 회색 코트를 입은 딸은, 아빠가 대단한 사람인 걸 아는지 모르는지, 쏟아지는 카메라 플래시와 그를 주목하는 국내외 취재진이 그저 신기한 눈치다.
이 9단은 어떤 돌도 돌처럼 취급하지 않았다. 고개를 쑥 내밀어 바둑판 가까이 댔다가, 몸을 다시 뒤로 젖히면서 멀리 바라봤다, 미간도 찌뿌려보고 한쪽으로 노려보면서 신의 한 수를 둘 곳을 찾았다.
그는 경기 초반 흑 17로 승부를 던졌다. 대국장 해설자도 흥분했다. 그러나 알파고는 그 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마치 그런 수는 없다는 듯이 다른 곳에서 자기 길을 이어갔다. 몸을 뒤로 젖히는 이 9단의 어깨에서 얕은 한숨이 느껴졌다.
그는 매 수마다 "알파고라면 어떻게 둘까"를 염두에 두는 모습이었다. 오른손으로 턱을 괴었다가, 관자놀이를 짚으면서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이날 해설을 맡은 김성룡 9단은 "이세돌 저 표정은 신난 표정"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이 9단은 평소 대국 때처럼 상대방 얼굴을 보며 그 사람의 기운을 파악하고, 다음 수를 내다보듯, 아자황의 얼굴을 쳐다보기도 했다. 아자황이 두는 것도 아닌데도 그를 보면서라도 알파고의 수를 알아내고 싶어 하는 승부사 기질이 느껴졌다.
경기가 1시간 정도 접어들면서 해설을 맡은 김 9단은 "왔네, 왔어. 그분이 오실 것 같다"면서 이 9단의 승리를 점치기도 했다. 또 "알파고의 실수인 것 같다"는 분석이 나올 때도 그는, 흑돌을 잡고 손을 바둑판 가까이 댔다가도 다시 돌통으로 옮기면서 놓았다 쥐었다 신중한 태도를 이어갔다.
제한시간 2시간 중 절반이 지났을 때, 이 9단 특유의 계산법 오른손 검지로 돌통을 톡톡톡 두드리는 모습이 나왔다. 이번 대국은 "쉽지 않다"는 걸 알려주는 듯 했다.
이 9단 또한 알파고를 '장고'로 몰아갔다. 지난 4국에서는 이 9단과 알파고의 제한 시간 차이가 2배 이상 벌어졌다. 4국 초중반에 제한 시간을 모조리 써버리면서 후반에는 이 9단에게 1분 초읽기 말고는 '생각 시간'이 없어, 보는 사람들의 심장을 졸이게 했다.
알파고는 마지막 대국에서도 강했다. "하루 쉬어서 과부하와 버그가 해결됐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로, 알파고는 3국에서처럼 강력한 모습으로 나갔다. 김 9단은 알파고를 두고 "마치 전성기 때 이창호 9단을 보는 것 같다"며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알파고에 소름 끼쳐했다.
경기가 중반으로 접어들자, 이 9단은 '쎈 돌 램프' 주문에 나섰다. 주먹 쥔 왼손 등을 오른손 엄지로 어루만지는 이 9단의 대국 습관인데, 이를 두고 이세돌이 "마법을 부린다"고 한다.
그가 초 집중력을 발휘할 때 보이는 모습이다. 바둑계에서는 이 9단이 '마치, 승리의 주문을 외우는 듯한, 램프를 만져 지니를 부르는 듯한 모습'이라고 해서 그렇게 붙여졌다.
후반으로 접어들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입 한쪽을 올리면서 눈도 같이 찡긋하는, '안되겠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표정도 지어보였다. 그래도 끝까지 계산으로 이겨보겠다는 집념을 보였다. 그러나 램프의 요정은 나오지 않았다. 1202대의 슈퍼컴퓨터를 인간 한 명이 이기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다.
경기가 시작된 지 4시간 30분이 넘어가고, 알파고가 이겼다는 해설이 계속 나오는데도, 이 9단은 흑돌을 계속 집었다. 김 9단은 "프로들은 졌다는 걸 안다(이세돌도 이미 안다)"면서 "그럼에도 계속한다는 것은 계산기와 끝까지 해보겠다"는 걸 뜻한다고 말했다.
이 9단은 경기 시작 5시간 만에 흰 돌을 올렸다. 7집 반이 불리한 흑돌로 싸우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아름다운 경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