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9단은 13일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 호텔에서 열린 알파고와의 제4국에서 3연패 뒤 빛나는 첫 승을 거뒀다.
'인간아닌' 알파고의 '인간같은' 실수, 그리고 '無심장 알파고화'된 '武심장 이세돌'은 '아직은 인류가 기계에게 굴복할 순간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냈다.
◇ 과학계 "진작 나왔어야"…"아직은 인간의 직관·통찰 완벽히 흉내낼 수 없어"
이 9단의 3연패 뒤 이룬 값진 첫 승에 대해 과학계에서는 "진작에 나왔어야 할 결과"라는 반응이다. 인공지능이 기술적으로 인간의 직관력과 통찰력을 완벽하게 흉내낼 수 없는 단계에서, 알파고의 빈틈, 즉 '불완전성'이 4국에서야 드러났다는 것이다.
맹성렬 우석대 전기전자공학과 교수는 이날 대국이 끝난 뒤 "알파고의 실수는 지난 1~3국에서도 나왔는데,그것이 경기에 큰 영향을 미칠 결정적인 것이 아니어서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고, 이번에는 결정적인 순간에 비슷한 허점을 보여 (이 9단이)이길 수 있었다"고 입을 열었다.
전기전자·재료과학분야 SCI(과학기술인용색인) 급 논문 50여 편을 발표한 맹 교수는 "알파고의 알고리즘으로 봤을 때, 인간의 직관력과 통찰력을 흉내내는 데 있어서 허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면서 "그런 허점이 앞선 경기에서도 보였지만, 그것이 판세에 결정적이지 않았고, 이 9단이 이에 적절하게 응수하지 못하면서 패배로 이어진 것"이라고 3국까지의 패인을 분석했다.
그러나 "이번 4국에서는 알파고의 그런 실수가 아주 결정적인 부분에서 노출되자 이 9단 역시 심리적인 압박을 느끼던 전과 달리, 알파고에 대한 나름의 감을 찾은 듯이 편하게 (경기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고 강조했다.
김진형 소프트웨어정책연구소 소장은 "알파고가 지금까지는 최상의 계산을 했지만 이번 대국에서도 봤듯이 100%를 완벽하게 맞추는 게 아니라 보유중인 데이터로 '최대한 맞추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대선 공주대 의료정보학과 교수도 "알파고는 전수가 아니라 확률적으로 작업한다"면서 "90%는 좋은 후보를 걸러낼 수 있지만 10%는 아닐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알파고의 '불완전성'은 바둑계에서도 일찍부터 인지하고 있었다.
한국 바둑사상 프로 통산 첫 1000승이라는 대기록을 쓴 서봉수 9단은 이날 "바둑은 수읽기가 중요한데, 이 점에서 기계는 계속 문제를 일으키며 완벽하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며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지 쉬운 문제를 알파고가 못 풀고 있는 셈인데, 그러한 부분에서 약점을 드러내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중국 바둑계의 한 인사는 프로바둑기사 다섯 명을 합쳐도 알파고를 이기지 못할 거라고 했는데, 그 정도는 아니다"라며 "아직까지는 약점을 잘 공략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정도"라고 덧붙였다.
'알파고의 아버지'라 불리는 구글 딥마인드의 데미스 하사비스 대표도 알파고가 '실수'를 인정했다. 그는 경기 도중 트위터에 "알파고는 79수에서 실수를 했다. 하지만, 알파고는 87수가 돼서야 그 실수를 알아챘다"는 말을 남겼다.
경기 직후 기자회견장을 그는 "얼마나 이 9단이 어마어마한 기사인지 보여준 것"이라며 진심으로 축하를 전하면서도 "대국에서 알파고 본인이 우세했다고 추정값을 냈는데, 이 9단이 묘수로 응수했고, 복잡한 형세에 기인해 알파고가 실수한 국면이 이뤄졌다"고 말했다.
하사비스의 말대로, '이세돌다운, 이세돌만의' 침착함은 4국에서 제대로 빛을 발휘했다.
우승이 이미 알파고에게 돌아간 4국이었다. 이 9단의 말대로 심리적 압박에서 벗어나서였을까, 이번 대국만큼은 알파고의 약점을 파헤치고 싶어서였을까. 경기 초반부터 알파고가 해달라는 대로 움직였다. '두 점 머리를 맞지 말라'는 바둑계 정설에도, 그는 두 점 머리를 맞았다. 상대가 젖혀도 반발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세기의 대결'에서 알파고가 이 9단을 통해 진화하듯, 이 9단 역시 점점 '알파고화'돼갔다. 그는 인간이 아닌 알파고의 눈으로 반상을 내려다봤다. '사람이라면 좀처럼 두지 않는 수, 감히 시도하지 못하는 수, 놓으면 스승에게 혼나는 수'를 두기 시작했다.
이날 해설을 맡은 송태곤 9단은 "평소 같으면 '실수나 엉뚱한 수, 혹은 ‘기세 부족’이라고 여길 만한 수였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다, 이 9단 역시 대국을 거듭할수록 알파고화 돼는 것 같다"고 말했다. 3국까지 보였던 알파고의 실수가 "지금 당장 이해할 순 없어도 신의 한 수"였듯, "이 9단 역시 전체를 내다본 운명의 수였다"는 설명이다.
양재호 9단은 "이 9단이 두 귀를 점령하고 좌변과 우변에도 집을 마련하고 알파고는 그 사이 상변 쪽에 거대한 흑집을 만들 때 백40으로 상변 흑집 깨기에 돌입하는 이 9단의 공격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작전에 알파고가 10만 가지 경우의 수로 노련하게 대처하면서 이때까지만 해도 알파고의 우세가 예상됐다.
"이 9단이 불리하다", "4대국마저 알파고에게 내준다"는 예측에 현장분위기는 점점 더 어두워졌갔다. 경기를 지켜보며 모두가 "No"를 외치고 고개를 내젓던 순간에도 이 9단은 오른손 검지로 돌통을 '톡톡'치며 다음 수를 생각했다. 그 결과 이번 대국의 승패를 결정한 '운명의 한 수'가 나왔다.
비좁은 흑돌 사이로 '백78'을 끼운 것은 이날 대국의 '백미'였다. 예상치 못한 수에 알파고는 '당황'했고 이해할 수 없는 수를 남발했다. 인간아닌 알파고의 인간같은 실수였다. 엉뚱한 수는 83부터 97까지 이어졌다. 인공지능의 한계를 확인케해준 '쎈돌 한 수'였다.
이에 대해 이 9단은 "사실 중앙은 더 쉽게 수가 날 곳이었는데 또 지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 그 수 말곤 없었기에 어쩔 수 없는 한 수였는데 칭찬받아 어리둥절하다"면서 모두의 갈채에도 자세를 낮췄다.
"한국 바둑계 승리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기쁘다"는 프로기사 이다혜 4단은 "'과연 이세돌'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훌륭한 정신력과 실력을 보여줬다"면서 "아자황이 돌 던지는 순간 환호성 나올 정도로 기뼜고, 정말 감동적"이라고 말했다.
송 9단 역시 "이 9단이 자신의 바둑을 잘 뒀다. 중앙에서 이세돌의 승부수가 멋있었다"고 평가했다. 아울러 "이 9단이 알파고와의 대국을 거듭할수록 알파고의 생각에 익숙해지고 있다"면서 "알파고의 이상한 약점을 파악한 만큼 마지막 대국에서 재밌는 승부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내다봤다.
한편, 지난 12일 열린 3국에서 알파고가 승리하면서, '인간 대 기계의 대결' 우승은 알파고에게 돌아갔지만, 이와 상관없이 대국은 5국까지 진행된다. 5국은 오는 15일 오후 1시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 호텔에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