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폭력 피해자 정수는 어떻게 가해자가 됐나

[방임청소년 보고서④] 사랑받은 적 없어서…사랑하는 법 모르는 아이들

최근 가정폭력과 학대에 희생된 아이들의 사례가 잇따라 드러나고 있다. 드러나지 않은 한편에는 희생되지 않기 위해 집을 떠난 아이들이 있다. 집에서도, 사회에서도 사랑받은 적이 없는 아이들은 사랑하는 법을 몰랐다. 이는 또 다른 문제를 낳고 있었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아빠한테 맞아 죽겠다 싶었죠" 모텔방 전전하는 아이들
② 16살 주희가 노래방 도우미로 빠진 이유는
③ "나는 14살, 양치질 배워본 적 없어요"
④ 가정폭력 피해자 정수는 어떻게 가해자가 됐나
집에서도, 사회에서도 사랑받은 적이 없는 아이들은 사랑하는 법을 몰랐다. 이는 또 다른 문제를 낳고 범죄로 이어지기도 했다. (사진=자료사진)
정수(가명·16)는 집에서 맞고 살았다. 옷도 멀끔하게 입지 못했다. 같은 반 아이들은 정수에게 '일러바칠 부모'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때부터 아이들에게도 맞고, 돈을 뜯겼다.

학교는 집에서의 정수를 보호해주지 못했고, 집은 학교에서의 정수를 보호해주지 못했다.

결국 정수는 둘 다 떠났다. 집과 학교를.

그러자 사람들은 이번에는 정수가 집을 나오고 학교를 다니지 않는다고 손가락질을 했다.

정수는 묻는다. "제가 어떻게 해야 되는 거죠?"

미정(가명·15·여)은 집을 나온 뒤 생과일주스 가게, 고깃집, 전단지 돌리는 일 등을 했다. 일을 구하기도 어려웠지만 일하더라도 돈을 제대로 받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러다 '조건만남'을 알게 됐다.

예전보다 일을 구하기는 쉬웠지만 여전히 돈을 받지 못할 때가 있었다고 했다. 조건만남에 나온 상대 남성은 종종 미정을 때리고, 끌고 다니고, 위협한 뒤 사라졌다.

미정이 들은 말은 "말할 데도 없잖아. 신고도 못하잖아"였다.

주희(가명·16·여)는 "불법 노래방 도우미 중에 '민짜'가 진짜 많다"고 말했다. 미성년자를 가리키는 은어다.

"그런데 경찰이 언제 단속하는지 삼촌들이 다 알아요. '내일부터 단속한대 미성년자 나오지 마', '어디 단속 떴대 그쪽으로는 가지말자'고 말해요."

이런 과정에서 자리 잡는 깊은 불신은 자신의 상황을 알리거나 도움을 청하는 것을 더욱 주저하게 만들고, 바르게 해결할 기회를 놓치게 한다.

주희는 "삼촌들이 경찰 단속을 다 아는 모습을 보면서 어른들에 대한 신뢰가 사라졌다"고 말했다.


'너무너무 배가 고프고 추워' 청소년 지원단체에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는 진태(가명·17)는 "연락을 하긴 했지만 처음에는 장기매매를 하는 곳이 아닌가 의심했다"며 "그동안 하도 많이 당해서..."라고 말했다. 다른 아이들도 자신과 같은 이유로 시설·단체를 먼저 찾길 꺼려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일부 아이들은 '처벌받지 않는다', '스스로 지켜야 한다', '도움은 받을 수 없다'를 학습하게 된다고 말한다.

집과 학교 모두에서 밀려난 정수는 어떻게 됐을까.

정수는 살아남으려면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인맥'을 키웠다. 자신을 괴롭힌 사람들보다 센 형들과 어울리고 조직폭력배와 비슷한 생활을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몸에는 문신을 새기고, 보호관찰을 받고 있었다.

조건만남을 하다 상대 남성에게 피해를 입은 미정. 비슷한 일을 당한 미정의 친구는 남자친구와 '조건사기'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미정의 친구가 조건만남을 하기로 한 남성을 만나고 있으면, 남자친구가 현장을 급습해 남성을 협박하고 돈을 뜯어내는 것이다.

"이용당했으니 나도 이용하겠다"는 것이었다.

혜원(가명·여·16)은 갓 집을 나온 아이들에게 접근해 잘해주고, 친해진 뒤에 성매매를 시킨다.

실은 혜원이 집을 나왔을 때 당했던 일이다.

대전에 와서 만난 '친구들'의 따뜻함에 끌렸었다. 그 친구들이 시키는 대로 했고 돈도 친구들에게 다 줬다고 했다. 혜원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이 세계에 나오면 냉정해져요. 냉정해질 수밖에 없어요. 왜? 죽기 살기로 싸우는 건 저희들이니까. 안 그러면 약해지고 제가 당하는데 그럴 수는 없잖아요."

구제받지 못한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또 다른 피해자를 낳으면서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에 대해 이창훈 한남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반복적으로 피해를 당하는 동안 '이런 가해행위가 용인되는구나'라는 잘못된 인식을 하게 되면서 비슷한 유형의 가해자가 될 수 있는 위험성이 높아진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자신들이 입은 피해가 용인되지 않는 것이라는 걸 아이들이 실감할 수 있도록 돕는 사회제도, 형사사법제도의 역할이 중요하다"며 "피해자 보호로서는 물론, 방치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심각한 범죄를 예방한다는 측면도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강해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아이들도 속으로는 누군가 이것을 멈춰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정수는 "세지겠다고 아는 형들 모으고 생활했던 게 쪽팔려졌다"고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비행을 저지르고서야 받은 '보호관찰'이 사회에서 받은 첫 도움이 됐다.

미정에게 어떤 어른이 되고 싶냐고 묻자 "자신에게 성매매를 하지 말라고 했던 언니가 딱 한 명 있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언니처럼 되고 싶다"고 말하는 미정에게서 조금 더 일찍 그런 조언을 듣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그 언니처럼 사람들이 '왜 했어'가 아니라 '앞으로 안 하면 돼'라고 말해줬으면 좋겠어요."

'믿지 못할 어른들' 속에서도 아이들은 '좋은 어른'을 기다리고, 못내 놓지 못하고 있었다.

"사회가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사랑을 가르쳐주는 '대안가정'이 돼야 한다"는 게 이 아이들을 지켜보는 현장의 목소리다.

실시간 랭킹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