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화가 변월룡, 이산의 아픔을 그리다

금강산 소나무, 1987, 캔버스에 유채.
현대사의 굴곡진 삶을 살아낸 고려인 화가 변월룡의 회고전 작품들은 마치 한 편의 역사 기록영화같다. 이번 전시로 분단으로 인해 남측이 접할 수 없었던 북한과 연해주,러시아의 풍경과 정서를 담은 한민족 출신의 미술작품들을 마주할 수 있게 됐다.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소련 몰락 직전까지의 시대적 상황에서 이주인 화가의 눈에 비친 사회주의권 사회의 풍경과 정서는 어떤 것일까. 사회주의 예술론에 바탕한 사회주의 인간형과 이상적 사회상을 그려내는 데 중심을 둔다. 그러면서도 이 이주인 화가는 인간의 깊은 내면을 담아낸 수많은 초상화들, 경계인으로서 강인함과 애수가 느껴지는 풍경화들을 남겼다.

나훗카의 소나무, 1962,에칭
러시아 본토에서 활동한 고려인 화가 변월룡(1916-1990) 전시회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미술관에서 3일 개막했다. 이 전시에는 회화, 에칭, 석판화, 드로잉 등 200여 점과 자료, 편지 등 70여 점이 선보인다. 러시아 특성상 개인전을 거의 가질 수 없어 변 작가 타계 후인 2011년 러시아에서 에칭 작품으로만 개인전을 가진 게 전부였다. 변 작가의 장녀 펜 올가 씨와 함께 한국을 방문한 차남 펜 세르게이씨는 "이 전시를 마음 먹은지 18년 만에 그 뜻을 이루게 되어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바르토메우 마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 이 전시가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나아가 유라시아 미술의 큰 부분을 보여주는 전시이다.특히 근대성과 근대 회화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살펴볼 수 있는 전시이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비(버드나무),1971, 에칭.
변월룡 작가는 100년 전인 1916년 연해주 쉬코토프스키의 유랑촌에서 태어났다. 중등교육을 마치고 미술학교에 편입한 뒤 일리야 레핀 레닌그라드 회화 조각 건축학교 회화과에 입학한다. 31살에 예술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대학원에 진학하고, 소련 미술가 연맹 회원으로 발탁된다. 35살인 1951년 레핀 예술아카데미의 데생 과목 교수직을 맡는다. 1953년 6월부터 1954년 9월까지 1년 3개월 동안 소련 문화성의 지시에 따라 평양미술대학 학장을 역임한다. 그는 북한에 돌아온 후 예술아카데미 정교수까지 승진하며 1985년 69세에 퇴직한다. 소련 몰락 직전인 1990년 뇌졸중으로 타계한다.

이번 전시에는 2차세계대전 중인 1942-1944년 독·소 전쟁으로 인해 레핀예술대학 교직원, 학생들과 피난 시절에 제작한 정치 포스터들로부터 시작된다. 1953-1954년 북한 체류 시기의 작품들, 그리고 퇴직 이후인 1986-1987년까지의 만년 작품까지 망라돼 있다.

그곳의 기념비, 1984, 캔버스에 유채.
이번 전시는 크게 4부로 나눴다. 레닌그라드 파노라마, 영혼을 담은 초상,평양 기행, 디아스포라의 풍경으로 구분했다.

'레닌그라드 파노라마'에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살펴볼 수 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예술가들에게 당성, 대중성, 이념성이라는 획일적인 목표를 제시하면서 지도자와 노동자, 조국의 발전, 혁명적 투쟁과 승리를 찬미할 것을 요구했다.<자유를 달라> 1,2(1943), <식민주의 족쇄를 끊어버려라>(1945), <젊은이들이여 지식과 과학을 습득하라>(1948) , <6.25 전쟁의 비극>(1962), <분노하는 인민>(1962), <조선 분단의 비극>(1962), <베트남>(1968) 등은 전쟁의 참상, 그리고 제국주의 침탈로부터 해방과 자유의 갈망을 담고 있다. <구두공장 돌격작업 반원> (1961), <사회주의 노동 영웅 어부>(1969) 등은 사회주의 노동자상을 그리고 있다.


'영혼을 담은 초상'은 변월룡이 공공장소에 전시되는 공식미술과는 별도로 자기자신만의 창작영역을 구축한 초상화 작품들을 배치했다. 그는 공적으로 주문받은 초상화 이외에 아카데미의 동료교수와 제자,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 학술원 멤버, 가족과 이웃 등 가까운 사람들과 나눈 내밀한 관계를 담은 초상화를 다수 남겼다. 만년에 그린 <어머니>(1985)는 항아리를 앞에 놓고 서 있는 늙은 어머니의 초상에서 고려인의 강제이주의 아픔을 담담하게 담아냈다.

원로당원들의 단체 초상, 1986-1987, 캔버스에 유채.
특히 만년에 그린 <원로당원들의 단체초상>(1986-1987)은 이 작품을 그리기 위한 습작을 볼 수 있는데, 이 작품에 등장하는 6명의 초상을 각기 습작으로 그렸다. 그 엄청난 공력과 정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변 작가는 앞서 <조선의 모내기>(1955)에서도 이 작품을 위한 주요 인물의 초상 4점을 습작으로 남겼다.

'평양 기행'은 1953-1954년 전후 북한의 풍경과 생활상, 그리고 유명 인사들의 초상화를 볼 수 있다. <북조선 풍경(압록강 부근 백마산성>(1953), <대동강변 여인들>(1954), <개성 선죽교>(1953) 등의 풍경을 담았다. <모란봉>(1953), <모란봉 을밀대>(1958) 풍경에서는 자동차가 등장하고, <북조선 정주(친선 열차)>(1958)에서는 모내기하는 풍경이 담겼다. 아울러 학생, 노인, 농민, 어부 등의 각기 초상과 평양근교 풍경을 그렸다.

조선의 모내기, 1955, 캔버스에 유채.
유명인사 초상화로는 작가 한설야, 이기영, 미술평론가 김용준, 무용가 최승희의 초상을 담았다.

'디아스포라 풍경'에서는 고향 인근의 변방 풍경을 주로 그렸다. 북한에 정착할 생각도 해봤지만 북한과 소련의 관계가 악화하면서 1954년 평양에서 복귀한 이후 다시는 발을 딛지 못했다. 고향 인근인 나훗카, 블라디보스토크, 사할린 등지의 풍경을 많이 그렸다. 조국과 가까운 이곳 변방에서 동포들을 보며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나훗카의 소나무>(1961), <블라디보스토크 해변>(1972), <칼라니노(유쥐노 사할린스크)(1978) 등의 작품을 남겼다.

만년에 그린 <금강산의 소나무>(1987, 유채)는 그의 마음이 여전히 고국(북한)에 가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북한에서 돌아온지 4년이 지나 <금강산>(1958)을 에칭화로 남겼었다.

특히 그는 소나무를 많이 그렸다. 북한에 있을 때 <소나무가 있는 풍경>(1953)을 필두로 <나훗카의 소나무>(1961,에칭), <금강산의 소나무>(1987)은 유채로 에칭화로 지속적으로 그려왔다. 소나의 강직함은 조선의 피가 흐르는 이주인으로서 타국의 땅에서 신산한 삶을 이겨낸 자신의 자화상이었을까.

그는 에칭화에서 바람의 흔들림을 잘 포착해 솜씨좋게 표현해냈다. <비(버드나무)>(1971)는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를 생생하게 담았다. 이 바람은 이산의 정처없는 이산의 삶을 은유한 것일까.

어머니, 1985, 캔버스에 유채.
변월량 화가는 사계를 주제로 작품을 남겼다. 봄에 해당하는 <그곳의 기념비>(1984), 여름에 해당하는 <모스크바>(1949), <가을>(1977), <겨울>(1973). 이들 작품에서 표현된 계절은 평온하고 밝다. 변 작가가 만년에 그린 봄에는 분홍 복사꽃이 환하게 자리를 빛내고 있다. 가지 못한 조국, 마음으로나마 기쁘게 맞이하기로 한 것일까. 장녀 펜 올가 씨는 "아버지는 사물이나 인물을 묘사할 때 그 속에 드러나는 긍정적 이미지를 포착해 그렸다"고 했다. 변 작가는 화가 집안이다. 부인 제르비조바는 물론 장녀와 차남 펜 세르게이 씨 모두가 화가이다. 세르게이 씨는 "저도 그렇고 제 동생도 그렇고 화가가 된 것은 아버지 덕분이다. 야외에 데리가 나가 스스로 그릴 수 있도록 인도해주셨다. 화가 이외의 직업은 생각할 수 없다"고 했다. 변 작가의 회고전에 자리한 두 자녀의 기뻐하는 모습에서 금강산의 소나무, 나훗카의 소나무 이미지가 포개진다.

전시기간: 3.3-5.8
전시장소: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출품 부문/수 :회화, 에칭, 석판화, 드로잉 등 200여 점 및 자료 70여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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