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굴곡 많은 우리 근현대사 속에서 명멸해간 인물들을 다시 복원해보는 시간인데요, 오늘은 최근 영화로 개봉되기도 했던 비운의 레슬러 "역도산"의 삶을 조명해 봅니다.
서해성의 인물한국사 - 역도산[1925~1963]
◎ 사회/정범구 박사>
역도산을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서해성>
그는 식민지 조선 관북의 씨름꾼으로 자라 일본에서 이름을 얻었다. 그가 얻은 명성과 부와 사회적 지위는 불완전한 것이었다. 그는 식민지 시대를 거쳐, 식민지를 지배하던 문화와 정서, 제도가 여전한, 제국주의 침략 역사에 대한 어떤 반성도 없는 일본에서 ''조센징''으로 살아야 했다. 그는 이러한 차별적 조건을 박차고 나가고자 했다. 최고가 되어서 이를 극복하리라 여겼던 듯하다. 따라서 그러한 존재들이 겪게 되는 드라마틱한 운명, 또는 비운의 삶은 그의 몫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 운명을 외면하려고 하지 않았다. 아니, 그 파도를 타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했으며, 때로 물결을 일으키고자 했다.
역도산의 운명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을 듯하다.
우선 그는 재일동포였다. 이 말은 그의 존재 자체가 이미 일본에서 사회적으로 어느 한 부분이 거세된 자라는 뜻을 포함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일본이 전후 처리 과정에서 어떤 반성도 없었다는 점을 우선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이 점이 개선되었다면 역도산을 포함한 재일동포의 운명과 팔자는 많이 달라졌을 게 틀림없다. 그가 일본에서 활동을 위해 법적으로 일본인이 된 까닭은 기본적으로 여기에 있다.
두 번째는 역도산이 대중적으로 성공한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여느 재일동포들이 그렇듯 역도산 또한 세 나라 사이에 운명이 놓여 있었다. 분단 이후 그의 고향은 북한이 되었고, 남한 또한 자신이 사랑하는 세상이었으며, 일본은 그가 살아가야 하는 곳이었다. 그 세 나라, 한국 북한 일본은 각각 자신들이 필요한 부분을 역도산에게서 취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이미지를 나눠 갖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가 ''찢겨진 운명의 주인공''을 벗어나기 어려웠으리란 것쯤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무조건 항복''을 해야 했던 미국을 이겨주는 존재였고, 한국에서는 전 일본인을 물리친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나이였으며, 북한-사회주의권에 프로 스포츠가 없다는 점과 더구나 그 종목이 격투기라는 점을 상기해 보라!-에서는 자기 지역(나라) 출신의 자랑이자 최고 지도자(김일성)의 관심을 받고 있는, 요컨대 세 나라 모두에게 ''영웅''이었다. 영웅대접은 역도산에게 최고의 영광이자 동시에 험난한 운명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덧붙이건대 그는 살아서 분단체제의 남과 북에서 고르게 인정받은 거의 유일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그 영광과 부채를 알? 年?듯하 다.
나머지 하나는, 역도산이 민족문제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오래도록 일본에서 출세한 프로 레슬링 선수 역도산에만 관심을 가져온 측면이 있다. 사실 역도산은 하나의 프로 스포츠 선수만은 아니었다. 그는 프로 스포츠 기획자이면서 흥행사이기도 했고, 탁월한 사업가이기도 했다. 그는 고작 39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비로소 일정하게 사회적 영향력과 힘을 가졌을 때 역도산은 조국과 만났다. 아니, 만나고자 했다. 하지만 그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가 죽어버린 까닭이다. 그의 죽음에 대한 의문은 이러한 배경과 무관할 수가 없다.
1. CIA 개입설: 역도산이 통일 메신저 역할을 하다 CIA에게 죽었다는 주장이다. 이 경우 증거를 밝히기도 어렵지만 실제로 구체적 근거가 없기도 하다.
2. 조국(남과 북 중 하나)으로 환국하는 걸 막기 위한 일본의 음모: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인식이 여기에는 공유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3. 수술 후 탄산음료 섭취: 이는 부인과 제자 레슬러, 간호사 2명 등 간병한 사람들에 따르면 전혀 근거가 없다고 한다.
4. 마취제 과다투입 등에 따른 의료사고: 당시 일본은 마취수준이 높지 않았다. 역도산은 덩치도 크고 해서 마취가 잘 되지 않아 보통사람의 2배정도 마취제를 투입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취로 인해 수술 중 사망 가능성은 낮다고 한다. 1차 수술 때 깨끗하지 못한 처리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의견이 있다.
5. 산소부족에 의한 호흡장애로 사망: 여기에는 수술 후 회복실에 누워 있는 역도산의 호흡기가 제거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짙게 드리워져 있지 않나 싶다.
6. 공식 사인인 화농성 복막염
7. 재산 다툼: 역도산이 북한측과 접촉한 뒤 역도산 관리 아래 있던 재산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고 한다.
역도산의 죽음에 대해 이처럼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는 데는 저마다 까닭이 있을 터이다.
당시 한반도는 물론 세계는 메카시즘이 극에 달해 있었다. 비이성이 지배하는 국제사회에서 실제로 국가 권력이 개입하는 음모와 공작이 판을 쳐온 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설령 진실이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의문의 죽음에 관한 의혹이 증폭되어온 건 여기에서 연유한다. 그 의문이 역도산의 신비화를 부채질한 측면이 있는 것은 틀림없다.
그 의문과 신비가 벗겨지는 날은, 우선 재일동포의 지위향상과 진정한 의미에서 메카시즘의 종언, 나아가 통일에 있을 것이다. 그 날에야 역도산은 부모가 지어준 한국이름 김신락으로 온전히 잠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다시 말해 그에게 씌워져 있던 멍에는 아직 벗겨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 사회/정범구 박사>
역도산의 고향은 어디인가.
◑ 서해성>
역도산은 1924(23년 설도 있음)년 11월 24일 함경남도 홍원(浜京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과 관련이 있는 듯함)군 용원면 신풍리 靈武場 경주 김씨 한학자 집안에서 김석태와 전기(田己)의 6형제 중 3남(막내)으로 태어났다. 이름은 신락(信洛)이었다. 역도산의 세 번째 부인이자 마지막 여인인 다나카 게이코의 말에 따르면 부모의 고향은 경주였다고 한다. 이는 경주 김씨에 대한 오해일 수도 있다. 큰형은 항락은 씨름꾼, 둘째 형의 이름은 공락이다. 40년 일본으로 건너간 역도산이 그를 일본으로 데려간 일본 형사 모모타 기노스케의 양자(장남)로 41년 입적해서 얻은 이름은 모모타 미츠히로(百田光浩)이며, 力道山이란 이름은 스모 선수로 활동하면서 지은 이름이다. 그가 스모 샅바에 스스로 쓴 이름 글씨를 보면 간결하고 꾸밈없는 결기가 느껴진다. 어떤 기록에는 종전 이후 역도산이 쓰모를 그만 둔 뒤 공사장을 전전할 무렵 모모타 미츠히로를 찾아가서 양자로 입적했다고 하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처음 스모에 입문했을 때 역도산은 조선인임을 분명히 했고, 이를 알고 있던 동료들은 그를 ''킨''이라고 불렀다. 그 무렵 역도? 遠?훈련과 학대 등 도장생활이 힘들어 울 때 ''아이고''라고 했다고 한다. 그의 출생지는 일본 스모협회 기록에 따르면 조선, 일본의 비젠, 이윽고 나가사키로 바뀌어나간다. 나가사키현 오무라쵸는 모모타 기노스케가 사는 곳이었다. 그는 고향 여인 박신봉에게서 딸 김영숙(43년)을, 스모 선수 시절 교토 여인 오자와 후미코에게서 모모타 치에코(44년), 요시히로(46년/1999년 사망), 미츠오(48년) 등 1녀2남, 마지막 부인 다나카 게이코와 사이에서 유복자로 딸 히로미(64년)을 얻었다.
◎ 사회/정범구 박사>
어떻게 해서 일본으로 건너가 스모 선수가 되는가.
◑ 서해성>
김신락은 큰형 항락과 함께 식민지 조선의 씨름꾼이었다. 형은 관북에서는 이미 이름난 씨름꾼이었다. 38년 단오절 15살로 출전한 씨름대회에서 항락이 가까스로 이긴 장사와 3위 결정전을 치러 승리했다. 이 광경을 일본 형사 오가타 도라이치와 일본 씨름의 한 조직인 니쇼노세키 베야(방)의 후원자(선수 발굴자) 모모타 기노스케가 지켜보았다. 이들은 신락에게 스모를 할 것을 권했다. 일본 형사는 스모를 하게 되면 두 형의 징용을 면케 해주겠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이즈음 신락이 한 손으로 엽기를 들고 힘 자랑하며 찍은 소년다운 사진이 남아 있다. 이듬해 39년 부친이 세상을 떠났다. 마침내 40년 겨울 신락은 부모 형제 몰래 서울역을 거쳐 부산에서 연락선을 타고 시모노세키로 떠났다. 손에는 기노스케가 알아보도록 일장기를 들고 있었다. 어머니는 신락을 떠나보내지 않기 위해 박신봉이란 처녀와 정혼을 해놓고 있었지만 그는 뿌리쳤다.
그 해 2월 니쇼노세키 방에 입문하고 5월에 제자 선발 시험에 나가 합격한다.
* 스모 서열: 조노쿠치-조니단-산단메-마구시타-주료-마쿠우치
마쿠우치(스모 1군) 내의 서열: 마에가시라-고무스비-세키와케-오오제키-요코즈나(橫綱)
초기에 역도산은 도장 청소를 비롯한 허드렛일을 하루 종일하고 밤에야 겨우 혼자 연습에 들어갈 수 있었다. 밤에 연습한다고 몽둥이찜을 당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1년 만에 그는 신참들을 가르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의 연습량과 강도가 대단했기 때문이다.
역도산은 41년 1월 조노구치, 5월 조니단, 42년 1월 전승으로 산단메에 이른다. 41년 12월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뒤 역도산은 스모협회 황군위문단 일원으로 중국과 한반도 순회경기에 나섰다가 일본으로 돌아가는 길인 42년 늦봄 고향을 방문해서 박신봉과 부부가 된다. 역도산의 말에 따르면 박신봉과는 결혼식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다시 고향을 찾은 것은 전쟁 막바지인 45년 모친 별세 부고를 받고서였다. 하지만 이는 거짓말이었다. 폭격중인 일본에서 그를 돌아오게 하기 위한 어머니의 배려였다. 그게 마지막 고향길이 되고 말았다. 역도산이 38년에 한 회고(단행본으로 출간)에 따르면 전쟁시기에 그는 그저 스모를 한 것만이 아니라 근로보국대로 나갔다고 한다. 거기서 쇠뭉치를 들어올리다가 잘못 떨어뜨려서 왼쪽 팔목을 다쳐 고질이 되었다는 증언도 하고 있다. 45년 6월부터는 국기관이 폭격으로 파괴되는 등 아예 스모를 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종전을 도장 동료들과 함께 임시로 가 있던 절에서 맞았다.
역도산은 패전(해방) 전인 44년 5월 마쿠시타, 11월 비로소 월급을 받는 주료(十兩)로 승급한다. 그는 전후(45년 11월에도 역도산은 주료급 7순위로 시합에 나가 8승2패를 거둠)에 감자와 죽을 먹으면서 시합을 계속해야 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마침내 스모 1군인 마쿠우치의 마에가시라에 이른 것은 47년, 고무스비는 48년 10월이었다.
49년 초 역도산은 평소에 가장 좋아하던 민물 게를 먹고 폐디스토마에 걸려 4월까지 크게 고생을 하게 된다. 야나기바시 메이지 병원에 약2개월 가량 입원을 할 정도였다. 112킬로의 체중은 97킬로로 줄어 있었고, 폐결핵처럼 기침과 담이 나오고 미열과 구토 증세가 이어졌다. 운 좋게 에메친이란 주사액을 미국에서 구해와 가까스로 병을 치료할 수 있었다. 그는 의사에 만류에도 출전하여 참패 끝에 마에가시라에 떨어졌다가 이윽고 50년 5월 세키와케에 다시 올랐다. 오오제키와 대망의 요코즈나(橫綱)가 눈 앞에 있었다.
역도산이란 이름은 1949년 5월 무렵 세키와케 시절 도장 관장의 평소 지론이었던 ''씨름은 힘의 길이? ?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의 키는 177센티미터였고 중량은 당연히 대개 100킬로그램을 상회했다.
그 무렵 역도산은 오토바이 ''인디언''을 타고 다녔다. 점퍼, 양복, 가죽 재킷이나 알로하셔츠, 때로 스모 선수 저고리를 입은 채 거구의 사내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것은 눈길을 끌었을 게 틀림없다. 역도산은 오토바이나 차를 무척 좋아했던 듯하다.
스모 선수 시절 역도산의 연습량은 대단했다고 한다. 나중에 요코즈나에 오른 일본 역사 와카노하나(하나다 가쯔지?/일본스모협회이사장/46년 8월 니쇼노세키 방에 들어옴)에 따르면 역도산과 하는 훈련이 너무도 힘들어 그의 정강이를 물어뜯었다고 한다. 역도산은 레슬링을 하는 동안 내내 타이즈를 입었는데 이는 그때 물린 흔적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라고 술회했다.
◎ 사회/정범구 박사>
스모를 그만 둔 이유는.
◑ 서해성>
50년 8월 25일 새벽, 역도산은 자기 집 부엌에서 생선 칼로 마게(스모 선수의 상징인 상투)를 스스로 잘라버리고 울었다. 스모는 동편과 서편으로 나뉘어 있는데 동이 더 서열이 높았다. 그런데 역도산이 까닭 없이 서로 옮겨가 있었다. 1950년 9월 진행표에 나와 있는 역도산의 서열은 그 전 대회에 마찬가지로 세키와케였다. 하지만 지난번 대회에서 3번째의 우승을 차지한 아즈마후지세키는 동편의 요코즈카였다. 그는 낙담했다. 운동에서만큼은 실력으로 증명된다면 차별이 없거나 덜할 것이라고 믿었을 게다. 하지만 일본 스모 협회는 조선인을 차별하고 나왔다. 당시 보수적인 일본 스모계는 외국인이 요코즈나가 된다는 것을 용납할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 게다가 사범과의 불화도 있었으며, 모국에는 전쟁이 일어나 있었다. 딸 하나와 아들 둘을 먹여 살리는 일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역도산의 회고를 더듬어가 보면 당시 자신은 아들 둘만을 데리고 살았던 듯하다.
마게를 자르는 일로 10년 넘는 세弼?요코즈나가 되겠다던 꿈도 함께 베어내야 했다. 이제 스모 시합장 토효(土俵)는 더 이상 자신이 설 수 있는 모래밭이 아니었다. 그는 9월 11일 스모에서 은퇴했다.
여러 가지 추측에도 불구하고 역도산은 스모를 그만 둔 이유를 회고록에서 단호하게 잘라 말하고 있다.
''내가 역사생활을 포기한 직접적인 동기는 단 한 가지 뿐으로 그것은 스모협회에 있다고 단정하고 싶다.''
당시 일본 스모인들은 역도산이 조선인 또는 한국인이라는 것을 웬만큼은 알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역도산이 요코즈나가 된다는 것을 받아들일 리 없었을 게 분명하다.
식민지 상태나 종전이 되어도 그를 비롯한 재일한국인이나 조선인의 대우와 처지는 다를 게 없었다. 국적을 바꾸었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하물며 요시다 수상은 아직 귀국하지 않고 ''일본 내에 남아 있는 조선인들이 불만을 일으킬 게 틀림없다''며 미군정에 요청해 강제로 추방코자 하고 있었다. 미군정 아래서 나라를 간접통치하고 있던 일본정부는 조선인들은 공산당이며, 난폭하고, 나쁜 짓을 서슴지 않으며, 범죄자라고 낙인찍고 있었다. 그들에게 반성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 일본정부는 이미 47년 외국인 등록제를 실시해서 재일동포들에게 지문날인을 요구하고 있었다. 미군정 또한 한국인을 ''적국인''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한국인은 식민지에서 해방된 백성이면서 동시? ?적국인 신세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 역도산이나 재일동포들이 느꼈을 정체성의 혼란은 상상을 넘었을 게다. 요컨대 역도산이 스모를 떠난 것은 단지 일본 내의 조선인 차별만이 아니라 해방 뒤의 조선인 차별이라는 점을 상기해둘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반성도 징계도 없는 역사가 낳은 결과물이었다. 그렇다고 차별이 있다고 떠날 수 있는 것만도 아니었다. 역도산의 경우처럼 생활기반 자체가 일본인 경우가 허다한 터였다.
◎ 사회/정범구 박사>
그 뒤 바로 프로 레슬링 선수가 되었는가.
◑ 서해성>
아니다. 그는 공사판을 떠돌았다. 오랫동안 역도산의 상담자이자 후원자였던 닛다 신사쿠(新田新作)가 운영하는 닛다건설사 자재부장이란 직함으로 들어가 ''일본 제1의 인부(土方)''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현장감독을 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역도산은 나중에 리키 아파트(aostus), 리키 클럽, 리키 스포츠 팔래스 등을 세울 수 있었다. 리키란 역도산의 애칭이다. 역도산이 일본발음으로 Rikidozan인 데서 비롯된 말이었다.
공사현장책임자로 일하는 동안 역도산은 다시 스모로 돌아가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런 고민 속에 역도산은 밤이 되면 술을 마시고 싸움을 벌이고 돌아다녔다. 1951년 9월 어떤 미국인과 죽이 맞아 은마차라는 술집에 또 싸움이나 걸어볼까 하고 벼르고 들어갔는데, 거기서 우연히 일본계 미국인 프로 레슬러인 해롤드 사카다(런던 올림픽 역도 라이트 헤비급 은메달리스트)를 만나게 된다. 그 일로 일본에서 레슬링에 입문하게 된다. 51년 10월 고쿠키간(국기관)에서 보비 브란스와 첫 레슬링 시합을 하게 된다. 이곳은 첫 스모 경기를 치른 곳이기도 했다. 이 시합에 목욕가운을 입고 나간 역도산은 하리테(손바닥으로 목을 밀 듯이 때리는 스모 공격기술)를 사용해서 적을 공격했다. 하지만 아직 초년 프로 레슬러에 지나지 않았던 그는 석 달 뒤 브란스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그 무렵 역도산은 평양 출신의 가라테 사범 나카무라 히데오에게 하리테를 발전시킨 손 기술을 배우던 참이었다. 그 기술에 마침내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나카무라가 촙(chop-도끼로 나무를 벤다)이라고 하면 어떻겠는가 하고 제안해서 결정을 보게 되었다. 역도산은 미국에서 1년1개월 동안 레슬러 생활(유학)을 한다. 그 동안 2백60여 회의 시합(하와이/미국 본토-1주일에 평균 6회 시합/하와이)을 해서 싱글 매치 단 3번, 태그 매치 2번(반칙패/부상기권패)뿐이었다. TV의 대중적 보급으로 레슬링이 미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을 역도산을 깨닫게 되었다.
◎ 사회/정범구 박사>
언제 일본으로 돌아왔고 어떻게 해서 그토록 인기를 끌 수 있었는가.
◑ 서해성>
역도산은 전미레슬링협회(NWA)로부터 프로 레슬링에 관한 전권을 위임받아서 53년 3월 돌아왔다. 그는 재규어 캐딜락 크라이슬러 3대를 들여와서 2대는 후원자에게 자신이 1대를 탔다. 그 해 7월 일본프로레슬링협회를 발족시킨다.
이듬해 하와이를 거쳐 미국 본토에 간 역도산은 샤프 형제(월드 태그팀 참피언)를 초청해와 일본에서 태그 매치를 벌이게 된다. 54년 2월 19일의 일이었다. 국기관(고쿠키칸)에서 시합이 벌어지던 날 역도산은 남색 가운을 입고 등장했다. 기무라 이전에 기무라 없고 기무라 이후에 기무라 없다는 유도 귀신 기무라와 한 조였다. 당시 얼마 전 개국한 NHK TV중계방송은 미국 선수들을 일러 ''엄청나게 커 보인다. 역도산과 기무라가 작아 보인다.''고 떠들어댔다. 기무라가 먼저 링에 올랐으나 패배하자 역도산이 링에 들어가 바로 상대를 들어올려 링에 매치게 된다. 이것으로 역도산의 운명은 바뀌었다.
흰색 피부에 파란 눈을 가진 거대한 이민족을 내다 꽂는 순간 ''무조건 항복''해야 했던 일본의 팔자는 적어도 링 위에서만큼은 바뀌는 듯했다. 그것은 통쾌한 ''복수''이기도 했다. 미국은 그들의 우상이자 동시에 적이었다. 한국전쟁 특수로 다시 몸을 일으키고 있던 패전국 일본과 일본인들에게 역도산의 승리는 ''그래, 할 수 있다. 일본, 다시 일어나라.''는 직접적인 선동 이상의 효과를 내고 있었다. 2차대전 패전과 7년 간의 미군정으로 인한 굴욕감과 실의를, 일본인 중 감히 누구도 넘볼 수 없을 줄 알았던 미국 콤플렉스를 말끔히 날려주고 있었다. 다른 무엇도 아닌 일본 전통무예 가라테에서 가져온 촙이 ''핵무기''를 제압하고 있었던 것이다. 프로 레슬링을 통한 이 대리성취는 전일본인이 동시에 공유할 수 있었다. 그 해 개국한 TV방송을 통해 일본인들은 광적이라 해야 좋을 미증유의 관심과 흥분에 빠져 들어갔다. 고작 가정용 수상기가 1만대 정도 보급되어 있었지만 1천4백만 명이 하룻저녁 동안 TV를 시청하는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다. NHK 거리중계를 보기 위해 수상기 앞에는 인산인해를 이루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전봇대에 올라가는 사람도 있! 었다. 이것으로 일본의 가전제품 역사는 새로 씌어질 수밖에 없었다. 프로 레슬링과 역도산이 일본에 TV를 본격적으로 보급한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몇 번의 사건(경기)으? ?역도산은 ''천황(일왕) 다음 역도산''이라는 존재가 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일본인들은 프로 레슬링이 가지고 있는 미국적 스포츠 쇼의 특성을 모르고 있었다. 팬을 의식한 과장된 제스쳐와 화려한 기술에 이들은 압도당하고 있었다. 한 해 넘게 미국 생활을 한 역도산은 TV에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비칠지 잘 알고 있었다. 62년 3월 일인데 LA에서 벌어진 제2대 WWA 세계 헤비급 타이틀전에서 이른바 흡혈귀 프레드 브러쉬를 물리친다. 이어 4월 일본을 방문한 브러쉬가 이빨로 역도산과 그레이트 도고를 물어뜯어 유혈이 낭자한 경기가 진행되는 것을 보고 전일본인들은 분노에 휩싸였는데, 그 와중에 노인 2사람(역도산의 부인 다나카 게이코는 6명이었다고 함)이 TV 시청도중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마음이 약한 사람은 시청을 삼가라''는 것은 다른 한편 TV를 더욱 보라는 자극이자 유혹이기도 했다.
그 무렵 일본인들은 역도산의 출신지와 성장기에 대해 일제히 함구했다. 당연히 여기에 관심을 갖고 또 이를 추적하고 취재할만한 데 이 무언의 엠바고 혹은 오프 더 레코드를 어기는 일본언론은 아무도 없었다. 역도산은 전후 일본의 유일한 희망이었고 따라서 그가 ''조센징''이어서는 곤란했다.
역도산은 일본식 표현으로 이른바 ''시멘트''로 경기를 했다. 요컨대 스트롱 스타일로 짜고 붙는 스타일의 레슬링을 하지 않아 왔다. 그런데 자신과 짝을 이뤄왔던 유도의 귀신 기무라 마사히코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샤프 형제가 왔을 때 역도산과 태그팀을 짜고 대전했지만 이때 나는 역도산을 크로즈 업 시키는 역을 맡아 나만이 샤프 형제에게 진 것이다. 정정당당한 승부라면 역도산에게지지 않는다.''는 기무라의 신문 인터뷰 기사가 발단이었다. ''역도산의 레슬링은 제스쳐가 많은 쇼다. 쇼가 아닌 레슬링으로 역도산과 일본 프로 레슬링 제일의 실력자를 가리고 싶다.''고도 했다. 역도산의 출신에 대한 의문도 제기했다. 이미 싸움은 예정된 것이었다. 기무라는 최영의에게 기술을 배워서 출전할 준비를 갖췄다. 마침내 구라마에 고쿠키칸(국기관)에서 ''간류지마의 혈투''-오륜서의 창시자인 미야모토 무사시와 사사키 고지로의 1621년 전설적 싸움-에 비견되는 싸움이 벌어졌다. 스모 스타와 유도의 귀신의 대결, 인기는 역도산 실력은 기무라 따위로 일본이 들끓어 올랐다. 54년 12월 22일 2만 관중이 입장한 가운데 벌어진 대전에서 역도산은 기무라를 박? 爾쨈? 급소 를 공격해온 기무라에게 역도산은 발치기와 촙을 작렬시켰다. 그것은 결코 프로 레슬링이 아니었다. 여기서 무너진다면 역도산은 끝이었다. 기무라는 제대로 힘 한번 쓰지 못한 채 역도산에게 쓰러져갔다. 역도산은 위로 올라가야 했다. 비록 태그팀이라도 하더라도 그는 기무라와 명예와 유명세를 나눠 가질 여유가 없었다. 어떤 경우에도 그는 이겨야 했다. 그것이 재일동포, ''''조센징''''의 운명이었다. 마침내 역도산은 기무라를 15분49초만에 K.O로 제압했다. 이것으로 일본 최초의 프로 레슬링 선수권자가 되었다. 승리자는 105만엔, 패자도 45만엔이 주어졌다. 이 일로 유도 귀신 기무라는 세상에서 잊혀져 갔다.
이러한 역도산을 대체시킬 인물을 일본인들은 찾고 있었다. 그가 스모 요코즈나였던 아즈마후지였다. 그를 프로 레슬링으로 끌어낸 사람은 바로 역도산의 후원자였던 닛다 신사쿠였다. 55년 역도산과 아즈마후지가 한 조를 이룬 오르테가, 카티스 조와의 대결에서 초반 아즈마후지는 밀리는 경기를 했다. 이에 역도산이 링에 올라가 오르테가의 팔을 꺾어 비틀었다. 오르테가는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함성이 경기장을 넘어 전일본열도를 뒤덮었다. 이제 더 이상 적어도 프로 레슬링에서 역도산을 넘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완전히 주도권을 장악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 해 역도산을 주인공으로 한 전기영화 ''노도의 사나이''가 개봉되었다. 56년 6월 오랜 후원자였던 닛다 신사쿠가 세상을 떠난다.
이어 역도산은 말레이시아의 킹콩을 제압해서 초대 아시아 챔피언이 되고 마침내 미국으로 건너가 LA 올림픽 오데트리엄에서 백 드롭의 창시자인 루 테즈를 아홉 번 도전 끝에 물리치고 NWA 인터내셔널 선수권을 차지하게 된다. 58년 8월의 일이었다. 이 선수권은 루 테즈의 무패 연승기록을 기려서 만든 것이었다.
역도산의 인기는 이미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었다.
◎ 사회/정범구 박사>
일본항공 여승무원과는 어떻게 만났는가.
◑ 서해성>
흔히 비행기를 타고 가다 알게 된 여승무원이라도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JAL 일본항공 스튜어디스였던 다나카 게이코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사진이 야구 선수 모리 도루를 거쳐 역도산에 이르렀다고 한다. 여기에 주간 묘죠(明星)의 기자나 자민당 부총재 오오노 반보쿠(한일국교회담과 관련해 62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음. 패전 직후 한인 청년에게 맞아 이가 부러짐) 등의 지원 속에 두 사람은 약혼발표와 결혼에 이르게 된다. 아내인 게이코의 부친은 요코하마 사람으로 일본 경찰서장 출신이었다. 그가 나이 차이가 많은 ''조센징''에게 딸을 내어준 것은 오오노 반보쿠의 배경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오오노의 부탁으로 마지못해 결혼을 동의했다고도 한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결혼 직후 처가에 간 역도산은 맥주 여러 병을 큰 사발에 따른 뒤 벌컥벌컥 들이마셨다고 한다. 이 행동은 단지 남성적 과시라기보다 결혼과정이나 처가에 대한 역도산의 어떤 의사표시가 아닌가 싶다. 결혼식 보증인이었던 오오노는 역도산에게 참의원으로 나설 것을 권유했다. 역도산 또한 오오노에게 1백만엔에 달하는 정치헌금을 내는 등 일본 보수 정치인들! 과 관계를 돈독히 하고 있었다. 그는 나중에 수상이 된 나카소네 야스히로와도 친교했다.
이미 역도산은 상당한 사업가이기도 했다. 자동차 세일즈로 제법 돈을 벌고 있던 요시무라 요시오를 비서 겸 동료로 참여시켜 재무관리 등을 시키게 된다. 역도산의 사업은 도쿄 아카사카에 땅 250평을 사는 것으로 시작해서 클럽 리키, 풀장이 딸려 있는 호화 리키 맨션, 리키 스포츠 팰리스(프로 레슬링 전용 시합장을 가진 이는 역도산 한 사람뿐이었음)로 이어졌다.
게이코(22살)와 결혼한 것은 63년 6월 오쿠라 호텔-이곳에는 한국에서 약탈해간 다수의 문화재가 호텔 정원 등에 널려 있는 곳으로도 유명함-이었다. 결혼식은 비용만 해도 1억 엔에 달하는 일찍이 보기 드물게 화려한 잔치였다. 참석자는 수상을 비롯한 3천여 명에 달했고 준비인원도 3천명에 이를 정도였다. 두 사람은 프랑스항공 초청으로 세계일주 신혼여행을 갔다. 파리까지는 기자들이 동행했다. 둘이 함께 산 시간은 6개월 정도였다. 그 해 12월 역도산이 죽은 까닭이다.
◎ 사회/정범구 박사>
방송 머리에 말한 남북한과의 관계는 언제부터 이뤄졌는가.
◑ 서해성>
흔히 역도산을 말할 때 철저히 조선인임을 숨기고 살았다고 하는데 이는 역도산 혼자 그러한 것이 아니라 일본사회의 암묵적 묵계와 함께 형성된 것이다. 그렇다고 역도산이 한국인들을 외면하거나 한 것은 아니다. 어떤 날은 하루에 20-30명이 찾아오기도 했다고 한다. 야구선수 장훈, 가네다 마사이치(400승 투수/김정일), 최고의 엔카 인기가수 미소라 히바리, 재일동포 프로 레슬러 김일웅, 한국에서 건너간 김일 등은 물론 고향 친구(진명근/부인은 하야시(林)이라고 함)가 운영하던 고탄다驛 불고기 집에도 틈나면 들러서 불고기에 김치를 먹고 아리랑과 도라지타령을 목놓아 불렀다고 한다. 57년 한국 씨름 선수 김일이 밀항으로 도일한 뒤 불법체류자로 갇혀 있을 때 부친 편지를 받은 역도산은 오오노 반코구에게 부탁해 직접 찾아와서 꺼내주었다고 한다. 역도산은 훈련 중에 김일을 대표로 골라 때리곤 했는데 일본 제자들은 이를 두고 ''구니몬(동향)''이라서 그런다고 수근거렸다고 한다. 역도산은 제자들에 대한 훈련강도도 아주 심했다고 한다. 나중에 김일은 역도산에게 온 한글 편지를 대독하는 일도 했다.
1963년 1월 역도산은 전격적으로 (일본 언론 등에는) 비밀리에 서울을 방문한다. 북한도 방문을 요청하고 있었다. 그에 앞서 니가타 항에서 형과 딸을 상봉하는 등 북측과 접촉이 있었다. 오직 요시무라 요시오만을 대동하고 나선 서울행이었다. 한일 간에는 국교정상화 문제가 진행되고 있었다. 오오노에게 스포츠를 통한 친선대사 같은 거라면 일을 해보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한국측 초청자는 문교부 장관이었다. 그는 한국을 방문해서 일본말로 인사를 한 뒤 퍼레이드를 하고 명예서울시민이 되었으며, 중앙정보부장 김재춘에 이어 김종필의 집을 방문에서 요담했다.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김종필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숙소는 조선호텔이었다. 역도산은 판문점도 방문했다. 거기서 그는 외투를 벗고 실크 셔츠도 벗어버리고 ''우어, 형님''하고 울부짖었다. 동행한 요시무라도 함께 울었다. 이 광경을 북한 측 사람들이 달려나와 사진으로 찍었다고 한다. 일본으로 돌아간 뒤 그는 바로 오오노를 찾아가 한국 방문결과를 보고했다. 그 내용 또한 전하지 않고 있다. 이 대목에서 역도산의 열정이 정치적 역학 관계와 묘하게 얽혀드는 듯? ?인상을 받게 된다.
전하는 말대? ?그가 정말 통일메신저로서 역할을 자임했던 것일까.
불행히도 그 해 겨울 역도산은 죽었다. 하지만 죽어서도 역도산은 분단과 이념, ''조센징''의 운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역도산의 장남 모모타 요시히로는 한일 공동 제작영화 "역도산"(주연 설경구)의 제작을 심하게 반대해왔는데 이는 특히 역도산과 북과의 관계에 대한 부분 때문이었다고 한다. 부인 게이코 또한 북에 대한 표현은 지나칠 정도로 극히 자제하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95년 4월 평양 5.1경기장에서 열린 평화를 위한 평양 체육 및 문화축전(주최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위원장 김용순)와 일본의 신일본프로레슬링주식회사(대표 이노키 간지/안토니오 이노키/역도산 제자)/후원 국가체육위원회(위원장 박명철/딸 김영숙의 남편))가 열리기 전인 2월 일본 유족들은 기자회견을 열어 이노키에게 ''아버지 역도산을 이용하지 말라''고 했다. 장남은 ''아버지는 북쪽인 함경남도에서 태어나기만 했을 뿐 공산주의를 가장 싫어했다''''북한이 역도산을 도와주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했다. 부인 게이코도 역도산은 '' 자유사회의 이상을 사랑했다''''북한에 대한 지지자가 아니었고 공산주의자도 아니었다''''미국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숭배했다''''역도산이 CIA에게 암살 당했다는 소문 또한 사실이 아니다''고 했다. 이와는 조금 다르게 게이코는 역도산이 신혼여행 중 ''우리나라는 갈라져 있어서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기 때문에 한반도를 영세중립국인 스위스처럼 만들고 싶다''고도 했다. 그는 역도산 생전에 조총련 출신으로 일본 권투챔피언이 된 사람이 북한에 가서 김항락의 사진을 가지고 와서 본 적이 있다고 한다.
''축전''이 열리기 전인 95년 1월 역도산의 딸 김영숙은 이노키 의원의 초청으로 리종혁(아시아 태평양 평화위원회 부위원장) 등과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다. 역도산을 그토록 좋아했던 일본 언론은 정작 이를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분명한 건 북한이 역도산에 대해 상당한 배려를 해왔다는 것이다. 역도산의 맏형 김항락은 평양 체육과학연구소, 딸 김영숙은 농구를 하다 평양체육대학 입학, 손자인 박혜전은 역도 감독으로 부산 아시안 게임에 참가하기도 했다.
역도산은 61년 편지를 받고 니가타 항에 정박한 만경봉호에 올라 둘째형 공락(일설에는 큰형 항락이라는 주장도 있음)과 딸 김영숙과 상봉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김일과 측근 일본인 레슬러를 비롯해 조녕주(前 민? ?단장)도 역도산에게서 들었다고 한다. 평양에서 ''축전''이 있기 전인 94년 11월 노동신문은 ''역도산은 애국자입니다''라는 제하의 기사를 내보냈다. 여기에는 당시 역도산의 소식을 들은 김일성 주석이 북에 있는 그의 가족들을 잘 돌봐주도록 지시하는 한편 딸 김영숙을 일본에 보내 아버지와 상봉토록 했다는 내용이다. 증언에 따르면 61년 11월 역도산은 차를 몰고 혼자서 니가타 항에 나타나 배에 승선했다. 이정로(총련 기관지인 조선신보사 前 사장/당시는 니카타 출장소 소송과장)도 이를 확인하고 있다.
''저는 배에서 내릴 수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를 배 안에서 만났습니다. 아직 대학에 입학하기 전이었어요. 저는 어린 시절부터 몸이 컸기 때문에 그때까지 농구를 했습니다. 그 사실을 들으신 아버지는 조선 대표선수가 되라시더군요. 그래서 일본올림픽(1964년) 때 일본에서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체육대학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농구를 해보려고 결심했던 것입니다.''(재일동포 작가 이순일 "영웅 역도산") 김영숙은 어머니가 준비한 찹쌀과 고향의 산나물을 가지고 아버지를 대접하고 ''내 고향''이란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역도산은 인삼주를 마시고 당수로 나무판을 잘라 보이기도 했다. 돌아가는 길에 그는 아리랑을 몇 번이나 불렀다. 그 뒤 62년 4월 역도산은 김일성 수상 50세 생일을 맞아 벤츠를 선물로 보내며 64년 개최예정인 도쿄올림픽에 참가하는 북측 선수단의 비용을 부담하겠다고 약속했다. 역도산은 일본올림픽 위원회에 1천만 엔을 기탁하기도 한 사람이었다. 자동차는 현지지도를 위해 써달라고 했고 함께 부친 책에 ''평화통일 역도산 김일성 원수 만세 역도산 신락''이라고 써서 보냈다고 한다. 다나카 게이코는 역도산이 이러? ?글을 쓰는 것을 본 적이 없다며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했지만 당시 두 사람은 아직 결혼한 사이가 아니었다. 차는 현재 묘향산 국제친선관람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북한 선수단 참가비용을 대겠다던 약속은 그가 죽어버렸으므로 지키지 못했고 북한 선수단도 참가하지 못했다. 93년 김일성 주석은 김영숙을 주석궁으로 불러 ''역도산이 애국자이며, 그가 조선사람이면서 일본선수라는 욕된 운명을 진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 식민지통치가 빚어낸 후과''라고 말했다고 한다.
◎ 사회/정범구 박사>
역도산은 어떻게 죽었는가.
◑ 서해성>
63년 12월 8일 도쿄 아카사카 신일본호텔 나이트클럽 뉴 라틴 쿼터(예약해둔 코파카바나를 취소하고 들어온 술집) 화장실에서 야쿠자 요시즈미 연합회 소속 무라타 가츠시의 좁고 긴 칼에 찔렸다. 그 자리에는 두 사람밖에 없었기 때문에 싸움의 정확한 원인은 잘 알 수 없다. 역도산이 무라타의 발을 밟았느냐는 문제로 다투었다고 한다. 출혈은 경미했다. 상처 부위래야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인 고작 2.5-3.5센티미터 정도였다. 칼에 찔린 직후 역도산은 외과병원이 아니라 자신과 연고가 있는 산노(山王) 산부인과로 갔다.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수술은 경과가 좋았다. 그런데 일주일 후인 12월 15일 회진 온 원장이 혈압이 떨어지고 복막염을 일으킨 듯하다고 하면서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공식기록에 따르면 그 날 밤 9시50분, 역도산은 소장 상해로 복막염이 발병했고, 그에 따른 소장 유착으로 장폐색이 일어나 숨을 거두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역도산이 한 행동은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이는 일이었다. 역도산의 시신은 경찰의 의뢰로 부검에 들어갔다. 하지만 여전히 그 부검기록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열람이 되질 않고 있다.
◎ 사회/정범구 박사>
그 후 역도산은.
◑ 서해성>
역도산은 최고의 전성을 구가하던 중 허망하게 죽었다. 그와 함께 사인할 때 즐겨 쓰던 그 지칠 줄 모르는 ''투혼''도 사라졌다. 장례식에는 1만 명 가량의 사람의 모여들어서 오열했다. 해마다 12월 15일이 되면 도쿄 혼몬지의 역도산 묘(반신동상이 서 있음)에는 참배객이 줄을 잇는다. 역도산은 오래도록 일본 우익들에게 더 영웅시 되어왔다.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역도산에 관한 책은 40종 이상이 일본에서 출간되었다.
게이오대를 나온 큰아들은 레슬링과 풋볼을 했다. 99년 11월 사망했다. 둘째 아들은 레슬링을 하면서 회사 부사장으로, 큰딸은 도쿄에, 유복녀 히로미는 남매를 낳고 살고 있다. 역도산의 손자는 야구선수로 활동하고 있다.
흑룡강신문에 따르면 북한 중국 합작영화 ''역도산의 비밀''(조선예술영화촬영소와 창춘 영화제작소 공동제작/감독 박준희/시나리오 북한 류부연의 ''역도산의 비밀''을 기초로 씀/역도산 역 김성수:북한/아내 역 쉬쥔-장예모가 발탁한 신인)이 개봉된다고 한다.
''영웅'' 역도산 역시 분단의 굴레로부터 그 또한 전혀 자유롭지 못했다. 다른 한편 살아서 남과 북에서 고르게 인정받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는 행운아였다. 그게 그가 어떤 형태로든 민족통일의 메신저가 되고 싶은 연유가 되었으리라 짐작해볼 수 있겠다.
역도산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미디어가 만들어낸 산물이다. 중계를 포함해서 미디어가 내보내는 컨텐츠에 대한 신뢰가 가장 높았을 때-일본에서 처음으로 TV가 등장한 54년-그는 첫 번째로 등장한 스타였다. 남성적으로 잘 생긴 데다 근육질로 다듬어진 몸매를 한 사내가 상채를 벗고 화면을 꽉 채우는 것만으로도 매력은 충분했다. 당시 일본사회에서 TV를 보는 것 자체가 첨단 문명체험이요, 일종의 ''흥행'' 앞에 노출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스포츠는 거짓이 없으리라는 믿음과 중계 특성상 실제 이상으로 과장되게 보여주게 된다는 점, 또한 그렇게 인식하게 된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아울러 미디어에 의한 정보의 반복적 주입(뉴스, 가쉽 등)도 뺄 수 없다.
여기에 세 나라의 서로 엇갈리는 利害와 관심이 역도산에게 덧씌워졌다. TV는 그에게 행운이었고 세 나라의 운명을 걸머져야 하는 것은 불운이었다. 그래서 그의 죽음에 관한 의문은 아직도 그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 신비화된 의문을 풀어야 할 때다. 그럼에도 며칠 전 독도망언에서 볼 수 있듯 이 숙제는 여전히 미해결과제로 남아 있다. 한반도 핵문제가 말해주듯 민족화해와 통일 또한 마찬가지다. 비유컨대 역도산은 남과 북, 일본, (그리고 그 외곽의 숨어 있을지 모르는 어떤 힘)이라는 삼각파도에 좌초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오직 프로 레슬러로서, 그저 대중스타로 만족하기만 했다면 죽음에 대한 의문은 당초부터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것이 한반도에 태어난 운명이라면, 하고 역도산은 이를 피해가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이를 나름대로 극복하고자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점이 무엇보다 역도산이 지닌 가치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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