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그렇게 아끼던 장영실을 왜 버렸을까

KBS '역사저널 그날'…기록에서 사라진 조선 최고 과학자의 흔적 추적

(사진=KBS 제공)
노비로 태어나 면천(免賤)된 뒤 상의원 별좌에 앉은 장영실. 그는 이후 각종 과학기구들을 만들어내며 종3품 대호군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이렇듯 파격적인 신분 상승을 이룬 장영실이 1442년 이후 기록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춰 버린다.

도대체 장영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오는 28일(일) 밤 10시 30분 KBS 1TV에서 방송되는 '역사저널 그날'을 통해 그 수수께끼가 풀린다.

'영실의 사람됨이 비단 공교한 솜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질이 똑똑하기가 보통에 뛰어나서….' - '조선왕조실록' 세종 15년 9월 16일


신분에 관계 없이 능력과 자질만으로 사람을 평가하던 세종은 장영실의 남다른 재주를 알아보고 그를 가까이했다. 결국 세종은 노비였던 장영실을 상의원 별좌에 앉히고 면천 시킨다. 이후 장영실은 정5품 사직, 정4품 호군 그리고 종3품 대호군에 이르기까지 파격 승진을 이어간다.

세종은 장영실을 면천시킨 뒤 온갖 일을 시키며 곁에 뒀다. 청옥을 채굴하게 하더니, 어느 날은 물시계를 만들게 하고, 또 어느 날은 금속을 합금하게 한다. 특히 장영실은 세종이 비밀리에 진행하던 천문 관측사업에 참여해 혼천의, 간의 등을 제작하며 조선 최고의 과학자로 명성을 쌓는다.

장영실은 그렇게 조선만의 시간을 갖고자 한 세종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인생을 바친다. 장영실의 업무량은 '세종의 전속 노비'라 할 만큼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1442년 장영실은 의금부에 끌려가 국문을 당한다. 세종의 가마를 만들었는데, 시험으로 운행하던 중 부서지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이 일을 담당했던 장영실은 불경죄로 삭탈관직을 당하고 이후 완전히 기록에서 사라진다.

오늘날에도 완벽히 복원하기 어려울 만큼 정교한 물시계인 자격루를 제작한 장본인이 가마 하나를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는 사실은 의문을 자아낸다. 실제로 장영실은 가마의 안전성에 대해 경고를 했고, 이를 묵인한 것은 다른 감독관이었던 조순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세종은 장영실에게는 가혹한 형벌을 내리고 조순생은 처벌하지 않는다. 그 누구보다 장영실을 아꼈던 세종은 왜 이런 불공평한 처벌을 내린 것일까. 세종과 장영실의 못 다한 이야기가 역사저널 그날에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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