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지붕의 파노라마적 풍경'이 내 건축의 영감"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설계, 김태수 건축가 회고전

초가지붕의 파노라마적 풍경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설명하는 김태수 건축가.
"제 건축의 영감은 한국 초가지붕들의 파노라마적 풍경에서 얻은 것이다." 미국 유학파로 미국과 한국에서 공공건축으로 유명한 건축가 김태수씨(80)는 자신의 독자적인 건축정신이 한국의 자연과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을 설계한 것을 비롯해 금호미술관, 교보연수원, LG화학기술연구원을 설계했다. 미국에서는 블룸필도 유치원,미드버리 초등학교, 스탐포드 학교, 하드포드 대학교 그레이 센터, 그로톤 노인센터, 튀니지 미국대사관, 미국 해군 잠수함 훈련시설 등 공공기관을 설계했다. 그는 초기에는 자신의 주택을 비롯해 주택 작업을 하며 자신만의 건축관을 찾아갔다.

1936년 하얼빈 태생으로 올해 80세인 김태수씨는 서울대 건축공학과 석사와 학사를 마친 뒤 25세인 1961년 미국에 건너가 예일대학교 건축학과 석사를 졸업하고 50년 이상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는 밴 블록 주택 등 주요 작품으로 미국 건축가 협회상 등 30차례 수상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김태수 건축가의 삶과 작품을 조명하는 회고전 <김태수>전이 2월 19일부터 열린다. 전시 개막에 맞춰 한국을 방문한 김씨는 "우리 건축이 미비하던 시기에 미국 유학을 택해 짧은 기간에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방향을 잡아 미국에서 인정을 받았다.한국의 젊은 건축가들에게 그것을 보여주고 싶고,이번 전시가 우리나라 건축문화를 한 단계 높이는데 공헌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태수씨가 미국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미국 유학에서 수학, 역사, 토론에 능숙한 미국 학생들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어 저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내것이 뭔가를 고민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그런 긴박성이 없는 것이 요즘 유학생들의 행복이자 불행이다"고 웃음을 지었다.

김태수 건축가가 설계한 미들버리 초등학교 (사진=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그가 찾아낸 '내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초가지붕들의 파노라마적 풍경이다. 그는 "내가 어렸을 때인 8.15 직전 아버지의 고향인 경남 함안군 칠원면에서 1년간 피난생활을 한 적이 있다. 그 때 그 마을 이미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이 내게 강하게 나타났다. 초가집이 한 채만 있으면 별로인데 초가집들이 언덕에 쫙 들어서 있는 게 나타났다. 서양 건축 - 그리스 신전, 교회-은 건물 하나가 아름답다. 내가 본 것은 파노라마적 풍경, 초가집 지붕이 죽 이어지며 생기는 형태였다. 우리나라 절 역시 하나만으로 그리 아름답지 않다. 지붕들이 여러개가 조화를 이루며 펼쳐지는 자연속 파노라마가 아름답다. 설계를 해나가면서 하나만이 아니고 마야 건물 등 여러군데서 참조를 하지만, 기준점은 한국의 파노라마적 아름다움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자기만의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다음은 자신이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를 찾는게 중요하다. 김태수 건축가는 '박스 실험'에서 성공 가능성을 예감했다.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초기에 여러 방법을 시도했고, 그 중에 조각적 건축을 시도해보기도 했다. 조각적 건축가가 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미리알았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없는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아는 게 중요하다. 그걸 모르면 우왕좌왕하며 자기 길을 찾지 못한다. 박스 실험은 내가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를 알려주었다. 심플하고, 간단하고, 소박한 재료로도 좋은 건축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내가 무엇을 거창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것을 통해 많이 발전했고, 박스 실험을 많이 했다."

1986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설계에 담긴 얘기도 구수하게 풀어갔다. "1만평이나 되는 곳에 큰 건물을 지으면서 자연을 해치지 않고 어떻게 짓나를 우선 고민했고, 다음은 재료를 어떻게 산과 조화하도록 색깔을 맞추나였다. 그래서 이태리석을 쓰지 않고 건물 전체에 화강암을 썼다. 그 당시 화강암은 너무 흔해 담장에만 쓴다며 반대 의견도 있었다(웃음). 그 후 화강암을 많이 썼다더라."

김태수 건축가의 건축정신은 "건물은 그 장소와 땅의 일부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건물에서 내 자신의 철학, 형태를 만들어낸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건축 설계시에 어떤 양식이나, 그 틀 안에서 하려고 하지 않는다. 의뢰를 받으면 그 대지에 가서 이제까지 나의 지식을 바탕으로 그리기 시작하다. 내가 아는 한도에서, 할 수 있는 한도에서 작업을 해나간다. 대지에서 그 건물의 밑그림이 보인다. 축적된 생각이 한꺼번에 나타난다. 밑그림이 눈에 보이면 쉽게 풀리고, 안 보이면 실패하는 것이다. "

1986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설계 때 일화를 들려주었다. 불과 10일간의 작업기간이 주어진 가운데,그는 수덕사와 수원성의 곡선이 연상되어 곧바로 수원성을 찾아가 기본적인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초기 모습. 지금은 고 백남준 선생의 설치작품 '다다익선'이 설치돼 있지만, 그 전엔 조각상이 설치돼 있었다. (사진=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는 백남준 선생의 대형 설치작품 '다다익선'이 설치되어 있다. 지금은 이 미술관의 기념비적 작품이 되었다. 애초 이 자리에는 조그만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었다. 김태수 작가는 "백남준이 생전에 만났을 때 나보고 '과천관이 내 작품 설치하라고 지은 것 같더라'고 하던데, 그런 소리 말라고 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다다익선'이 전시관을 꽉 채우고 있어 답답한 느낌이다. 철거하지 못할 게 뭐 있냐"며 시원스레 의견을 밝혔다. '다다익선'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으로, 설치 기한 10년이 지났다. 이 작품을 백남준 미술관으로 이전을 검토해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의 구조상 해체하면 사실상 재설치가 불가능하다고 한다. 다행히 이 작품의 설계도면이 있어 비용문제만 해결된다면 새로 설치하는 것은 가능하다.

김태수 건축가 본인이 설계해 40여년 동안 살고 있는 주택 (사진=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김태수 건축가가 설계한 주택건축도 다양하다. 그가 미국에서 40년간 살고 있는 자신의 주택은 어떠한가? 2층규모의 55평으로 아담하게 지었다. 그가 작게 지은 것은 법 규정상 55평 이하로 못 짓게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건축에 담긴 정신은 이렇다. "제일 간단하다.경제적, 실용적이어야 한다.소박한 건물도 내 성격에 맞는다는 걸 배웠다. 특별한 철학이 있어서라기 보다 경험들을 가지고 작업을 진행해나갔다."

1965년 서울시마스터플랜 제출 때 얽힌 일화도 흥미롭다. 방사형 도시개발 계획은 맞지 않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이조 초기에 두 곳을 중심으로 도성이 발전했던 점에 착안했다. 원도심은 보존하고 새도심을 여의도-인천- 영종도를 잇는 선형으로 연결해 개발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바다로 진출 통로도 중요하고, 지하철 건설도 복잡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영종도가 연결되고 한강 뱃길사업이 진행된 점을 볼 때 그의 예측은 맞았다. 그러나 그 당시 그의 서울시마스터플랜은 채택되지 않았다."강남 실세들이 땅을 모두 사두었기 때문이었다" 게 그의 후일담이었다.

김태수 건축가가 설계한 본인 주택 모형.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했다. 그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 가봤는데 무슨 패션몰처럼 설계돼 있더라. 5000억원의 세금이 들어간 건물이 이렇게 지어져도 되는 건가? 민주적인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다. 자치단체장의 보여주기식 건축은 사라져야 한다." 고 일침을 놨다.

여든 노객의 소박한 건축 정신과 장인 정신, 그리고 허식 없이 자신의 관점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자유로움. 그 내공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건 내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평생에 걸친 진지한 노력 덕분이 아닐까 싶다. "건축에서 재밌게 만들자는 발상을 아주 싫어한다. 히트를 치겠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자기만의 확신을 끝까지 밀고 나가야 좋은 건물이 된다." 는 김태수 건축가의 말이 귓전을 맴돈다.

전시주제:과천관 30년 특별전·한국현대미술작가시리즈 <김태수>전
전시장소: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제5전시실
전시기간: 2016년 2월 19일 -6월 6일

실시간 랭킹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