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동물국회'의 추억과 기억상실증

2010년 12월 8일 4대강 관련 법안과 새해 예산안 처리를 놓고 여·야가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야당 의원들이 점거하고 있던 국회 본회의장 의장석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의원들이 힘으로 밀어내고 있다. (사진=윤창원 기자)
시계를 거꾸로 돌려 2010년 12월 8일로 돌아가보자. 장소는 여의도 1번지 국회의사당.


본회의장 단상은 예산안 날치기 처리에 대비해 전날부터 밤샘 농성중이던 민주당 의원들이 점거하고 있었다. 오후들어 상황이 급변했다. 경호권이 발동된 가운데 한나라당 의원들이 본회의장에 진입했고, 오후 4시 15분 김무성 원내대표가 앞으로 나서며 "다 나와!"라고 외쳤다.

이 외마디를 신호탄으로 100여명의 여당 의원들이 야당이 점거하고 있는 의장석을 향해 돌진하며 격렬한 몸싸움과 활극이 벌어졌다. 팔 골절상으로 병원으로 후송된 여성 의원이 있는가 하면 강기정 의원이 김성회 의원과의 몸싸움 끝에 피를 흘리는 장면은 당시 사진기사로 대서특필됐다.

단상이 정리되자 사회권을 넘겨받은 당시 정의화 국회부의장은 직권상정 후 예산안과 UAE파병법, 친수구역활용에 관한 특별법 등 쟁점 법안들을 일사천리로 통과시켰다. 예산안 날치기는 이명박 정부 들어 3년 연속이었다.

이게 바로 '동물국회'다. 당시 국민이 정치권에 요구한 첫번째는 제발 싸우지 말라는 것. 즉 다수당의 횡포와 폭력도 없이 대화와 타협으로 국회를 운영하라는 게 민심의 제1명령이었다.

이러한 민심에 부응한 것인지 2012년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은 총선공약으로 국회선진화법을 내걸었고, 새누리당 황우여 원내대표 등 여야 의원들이 주도해 그해 5월 합의처리했다. 당시 비상대책위원장이었던 박근혜 대통령은 "반드시 통과시켜야 한다"며 힘을 실었다. 국회선진화법은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쟁점법안의 경우 재적의원 5분의 3, 즉 180명 이상이 동의해야 본회의 직권상정이 가능하도록 규정했다.

정의화 국회의장이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20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후 국회 선진화법 개정안에 따른 중재안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윤창원 기자)
그런데 법개정 당시의 취지는 온데간데 없고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최근 국회 선진화법 개정에 매우 적극적이다. 움직임도 빨라졌고 강도도 높아졌다. 김무성 대표는 "나라가 망한다면 국회선진화법 탓"이라며 '선진화법 망국론'을 펼치다가 급기야 26일엔 '권력자 책임론'까지 거론하며 엉뚱하게 박 대통령과의 권력암투로까지 불똥이 튀었다.

새누리당이나 청와대가 주장하는 선진화법 철회의 근거는 국회가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이른바 '식물국회론'이다. 그러나 이는 해머가 등장하고 몸싸움이 난무했던 과거를 망각한 주장이다. 또 법개정 당시에도 식물국회 논쟁은 엄연히 존재했지만 폭력국회가 해외토픽감으로 소개되는 후진적인 국회에서 탈피하고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꽃피워야 한다는 명분이 우세했다. 그래서 박 대통령이 당시 찬성으로 힘을 실어준 것 아니었나.

19대 국회에선 폭력이 사라지는 등 국회선진화법이 발휘한 긍정의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되는 일이 없다는 여권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의원입법 발의와 법안의 본회의 처리 숫자는 오히려 18대 국회보다 늘었다고 한다.

법과 제도에 부작용이 많다면 당연히 손질하는게 마땅하다. 하지만 법과 제도를 바꿀 때는 정당한 취지가 있었을 것이다. 국회선진화법도 다수당의 횡포와 날치기, 이로인한 폭력을 추방하자는 국민의 요구를 수용한 결과였다.

4년 가까이 흐른 지금 국회선진화법은 명(明)과 암(暗)을 모두 지니고 있다. 중요한 것은 제도가 정착하려면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정치문화로 자리잡을 때 비로소 진정한 '선진화' 법이 되는 것이다.

청와대나 새누리당의 우려대로, 야당의 발목잡기가 도를 넘는다면 국민은 결코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국민의식의 성숙도를 볼 때 성급한 법개정이 아니더라도 자연스럽게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작동할 것으로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권이 180도 입장을 바꿔 선진화법을 '망국법'이라고 믿는다면 19대 총선에서 공약으로 심판을 받았던 것처럼 20대 총선에서는 공약으로 철회의사를 묻는 게 순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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