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민주 구원투수 김종인, 경제 민주화·재벌개혁의 상징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 (사진=윤창원기자/자료사진)
위기에 빠진 더불어민주당의 구원투수로 나선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경제민주화의 상징'으로 불린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헌법 개정을 마련할 당시, 헌법 119조 2항에 경제민주화 항목을 포함시키도록 전두환 당시 대통령을 설득시켰다는 일화에서 유래한 별명이다.

노태우 정권에서 기록적인 부동산 가격 급등 사태가 빚어지자 경제 분야 전권을 약속받고 청와대에 입성해 대통령비서실에서 만든 5.8조치는 지금도 가장 강력한 재벌규제 조치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김 전 수석은 당시 부동산 급등 원인을 기업의 무분별한 투기로 지목하고 공급량 조절을 위해 재벌들의 비업무용 부동산을 강제 매각시키는 5.8조치를 통해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켰다.


성장과 개발이 키워드였던 시대에서 독특하게도 국가의 적극적인 시장개입을 통한 시장 통제 정책을 사용하면서 당시 재벌들과 큰 마찰을 빚기도 했다.

당시 전경련 회장을 지낸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사사건건 충돌한 비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매 정권, 특히 IMF 같은 경제위기때 마다 경제수장으로 물망에 오르면서도 번번이 고배를 마신 것도 재벌들의 강한 반발 때문이라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문재인 대표가 김 전 수석의 영입을 소득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주장한 것도 이같은 이력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경제정책과는 반대로 정치적 행보는 보수정당 쪽에 있을 때가 많았다.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제11․12대, 1992년 14대 총선에서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비례대표에 당선됐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는 새천년민주당 비례대표로 당선된 뒤 한동안 정치권을 떠나 있다 지난 대선 때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장으로 영입되며 박근혜 캠프의 경제민주화 정책을 총괄했다.

대선이 있던 2012년 초 새누리당 정강 정책 개정 때 경제민주화 개념의 도입을 강하게 추진해 중도층 표심 공략에 성공했고, 박근혜 후보와 신경전을 벌이면서까지 재벌개혁안을 최종 공약에 반영하는 뚝심을 보였다.

박근혜 후보가 당선된 직후 인수위 때부터 중용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지만 박 대통령이 이후 경제정책의 방향을 보수로 전환하면서 잊혀진 인물로 전락하는 비운을 맛봤다.

최근 신당 창당에 나선 안철수 의원과의 질긴 인연도 관심의 대상이다.

2011년 안철수 돌풍이 몰아칠 때부터 언론에 심심치 않게 '안철수 멘토'로 불렸던 김 전 수석은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 진영을 선택하면서 결합에 실패했다.

지난 2014년 안 의원이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직후 새정치추진위원회를 만들고 신당 창당을 추진하면서 김 전 수석의 영입이 현실화되는가 했지만 윤여준 전 환경부장관이 영입되면서 무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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