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일주일 뒤면 누리예산이 전혀 편성되지 않은 서울·광주·전남지역에서는 큰 혼란이 예상된다. 준예산이 편성된 경기도지역에서는 이미 여파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 지역의 유치원생·어린이집 원아는 64만7천명으로 전체 130만명의 절반에 육박한다.
상황이 이처럼 심각한데도 정부는 시도교육청이 충분히 예산을 편성할 수 있다고 책임 떠넘기기에 여념이 없다.
교육부는 11일 누리과정 예산을 전혀 편성하지 않은 서울시 교육청 등 7개 교육청의 본예산을 분석한 결과, 활용 가능한 재원이 모두 1조5138억원에 달해 이들 지역의 어린이집 소요액 1조2천억원보다 많은 만큼 편성 여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해당 교육청들은 교육부의 분석 결과가 자의적이거나 사실과 다르다며 '조목조목' 반박했다.
이들 교육청은 일종의 예비비 성격인 순세계잉여금(전년도 세입·세출의 결산상 생긴 잉여금)은 그동안 대폭 줄어든 교육사업비나 교육환경개선사업에 사용해야 하는 재원이라는 입장이다.
교육부가 지장자치단체의 전입금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한데 대해서도 이는 어디까지나 전망치인데다, 올해가 아닌 내년도 예산에 반영될 몫이라며 결국 예산을 미리 당겨쓰라는 얘기라고 반발했다.
◇ 교육부, 교육청에 추경 예산 편성할 것 독려
앞서, 교육부는 17개 교육청에 공문을 보내 누리과정 사업비에 충당할 추경예산편성 계획을 12일까지 제출하도록 했다.
교육부는 각 시도교육청에 내려보내는 교부금은 지난해 39.4조원에서 올해 41.2조원으로 1.8조원 가량 늘었다며 충분히 예산을 편성할 수 있다며 압박하고 있다.
그러면서 교육청이 끝내 어린이집 누리과정 예산을 편성하지 않으면, 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 시행령에 따라 내년 보통교부금 교부 때 해당 예산을 감액해 교부하겠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시도교육청은 올해 교부금이 늘었어도 이같은 규모로는 인건비 등 경상경비 상승분을 충당하기도 어렵다는 입장이다. 교사 호봉상승, 처우개선 등 인건비 상승분만 1.2조원에 이르고 지방채 원리금 상환액도 4천억원에 이른다는 것이다.
시도교육청들은 누리과정 사업으로 인해 환경개선사업과 교육사업 등 정작 중요한 교육에 대한 투자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 보수교육감 포진한 곳조차 예산편성에 구멍
하지만 시도교육청들은 보수교육감이 있는 교육청조차 예산을 온전히 편성할 수 없을 만큼 상황이 열악하다고 반박한다.
보수교육감이 있는 대구, 경북, 울산 교육청마저 누리과정 예산을 모두 편성하지는 못했다. 대구는 유치원과 어린이집 예산을 8개월분만 편성했고, 경북과 울산은 유치원 예산을 편성했지만 어린이집은 각각 6개월과 9개월분만 편성했다.
이들 지역은 교육감 뿐 아니라 시도의회마저 새누리당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올해 필요한 누리과정 예산 4조239억원 가운데 시도의회를 거쳐 확정된 금액은 1조1801억원(29.3%)에 불과하다. 유치원은 1조8916억원 중 7860억원으로 41.5%, 어린이집은 2조1323억원 중 3941억원으로 18.5%에 그치고 있다.
전국 17개 시도 가운데 서울, 경기, 광주, 전남 등 4곳은 어린이집 및 유치원 누리과정 예산을 아예 편성하지 않았습니다. 경기는 준예산 체제이며, 서울·광주·전남은 시도교육청에서 유치원 예산을 전액 편성했으나 시도의회에서 형평성을 이유로 전액 삭감해 유보금으로 남겨두었다.
세종, 강원, 전북 등 3곳은 유치원 예산만 편성하고 어린이집 예산은 편성하지 않았다. 다른 지역의 경우는 유치원 예산은 6~12개월, 어린이집 예산은 2~9개월씩 편성했다.
◇ 시도교육청 부채비율 대폭 상승
시도교육청이 부족한 재원을 충당하기 위해 발행한 지방채 규모는 2012년 2조769억원에서 지난해 10조6188억원으로 5배 이상 증가했다.
시도교육청의 부채비율은 지난해말 28.8%까지 치솟았으며, 특히 정부가 요구한대로 올해 3.9조원의 지방채를 발행할 경우 17개 시도의 올해 부채비율은 36.3%로 대폭 상승할 것으로 분석됐다.
부채비율은 지난 2012년 17.7%에서 2013년 18.2%, 2014년 19.8%로 완만히 상승하다 누리과정사업비를 교육청에서 모두 부담하게 된 지난해에는 28.9%로 크게 상승했다.
준예산 사태를 맞고 있는 경기도의 경우 부채비율이 지난해 40.2%에서 올해 48.4%로 높아지고, 서울은 25.4%에서 29.9%로, 광주는 20.8%에서 26.1%로, 전남은 23.2%에서 33.5%로 각각 높아질 것으로 예상됐다.
전체 교육청 예산 중 교부금이 차지하는 비율은 지난 2012년 74.9%에서 2015년 66.6%로 줄었는데 그만큼 교육청 살림살이가 빡빡해지고 있다는 증거다.
시도교육청의 세입은 지방교육재정 교부금과 지자체 전입금, 교육청의 자체 세입(학생 등록금, 재산수입 등) 등 크게 3가지로 구성돼 있다.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지방교육재정 교부금'으로, 이는 내국세 총액의 20.27% 및 국세분 교육세 전액을 재원으로 한다.
◇ 누리과정 대상만 확대하고 나몰라라 발뺌하는 정부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2년 만 5세만을 대상으로 도입된 누리과정 사업은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공약에 따라 2013년 현 정부들어 3~5세까지 대폭 확대됐다.
더욱이 복지부는 2012년에 어린이집 누리과정예산 3827억원, 2013년 3827억원, 2014년 2948억원을 국고에서 지원해오다, 지난해부터는 아예 중단했다.
지자체도 어린이집 별도 지원예산으로 2012년 3920억원, 2013년 3920억원, 2014년 1562억원을 편성했으나 지난해부터 역시 중단됐다.
누리과정 대상은 늘었지만 돈줄이 끊긴 시도교육청들이 반발하는 이유다.
특히 정부는 지난해 10월 누리과정예산을 아예 시도교육청의 의무지출경비로 못막는 방향으로 '지방재정법 시행령'을 개정해 시행에 들어갔다.
의무지출경비는 중앙부처가 시도교육청 등에 예산을 교부할 때 강제 편성하도록 한 경비다.
◇ 해법 마련 목소리 외면…시도교육청 압박에만 몰두
협의회는 기획재정부와 교육부 장관, 새누리당·옛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 대표에게 누리과정 예산 문제 해결을 위한 긴급회의를 지난달 21일 열자고 제안했지만, 정부·여당 측의 참석 거부로 무산됐다. 지난달 23일 박근혜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고 나섰으나 묵묵부답이다.
지난 6일 누리과정 문제 해결을 위해선 정부와 여야의 대타협이 필요하다고 보고 토론회(10일 이전)와 긴급회의 개최(15일 이전)를 제안했으나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다.
정부는 오히려 시도교육청을 압박하는데만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5일 "이달 중으로 시도 교육감들이 누리과정 예산편성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감사원 감사청구와 검찰 고발을 포함한 법적, 행정적, 재정적 수단 등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 강력 대처해 나갈 것"이라고 압박했다.
앞서 교육부는 지난달 29일 서울·광주·전남교육청에 대해 해당 시도 의회에 예산안 재의 요구를 하도록 요청하면서, 교육청들이 따르지 않으면 대법원에 제소하겠다고 압박했다.
교육부는 특히, 시도의회에서 '재의 요구' 안건을 상정하지 안하거나 재의를 통해서도 결과가 달라지지 않을 경우에도 대법원 제소가 가능하다며 시도의회를 압박했다.
하지만 대법원 판결이 나는데는 상당한 시일이 걸리는데다, 승소하더라도 누리과정 예산 뿐만 아니라 '시도 예산 전체'가 무효가 돼 큰 혼란이 발생하게 돼 실현가능성은 극히 낮다.
시도교육감들은 정부·여당이 땜질식 처방에 급급하지 말고 이제라도 '누리과정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한 사회적 논의기구' 구성에 나설 것을 촉구하고 있다.